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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시네토크] “마이크 리의 인물들은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 같다” - <커다란 희망> 상영 후 윤여정 배우, 이재용 감독 시네토크

[2017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마이크 리의 인물들은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 같다”

- <커다란 희망> 상영 후 윤여정 배우, 이재용 감독 시네토크




정지연(평론가) - 한국 영화에서 대단히 중요한 두 분을 모셨다. 윤여정 배우와 이재용 감독이다.


윤여정(배우) - 안녕하세요, 윤여정입니다. 


이재용(감독) - 안녕하세요. 이재용 감독입니다. 오늘 윤여정 선생님이 이 영화를 추천했다. 나는 오늘 같이 자리에 앉는 줄 모르고 영화를 보러 왔다. 


정지연 - 평소 두 분이 서울아트시네마에 종종 같이 오신다고 얘기를 들었다.


윤여정 - 이재용 감독이 자주 오고 나는 가끔 본다. 여기서 봤던 제일 지루했던 영화가 생각이 나는데 바로 <자객 섭은낭>이었다(웃음).


정지연 – 오늘 본 <커다란 희망>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처음 상영하는 영화다. 이 영화를 추천한 분이 누구인지 궁금했었는데 윤여정 선생님이더라. 어떻게 마이크 리의 작품 중에서도 초기작을 선택하셨는지 궁금하다. 


윤여정 - 내가 마이크 리 감독을 좋아하는데 이재용 감독이 이 영화를 안 봤더라. 그래서 나 대신 이재용 감독이 추천하고 자기가 영화를 보러왔다. 내 이름을 도용한 셈이다(웃음). 

마이크 리는 느닷없이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늘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그려서 좋아한다. 단적으로 말해 재벌 이야기가 아니다. 재벌은 우리가 잘 모르지만 마이크 리의 인물들은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 같다. 


이재용 -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봤고, 또 좋아한다. 1989년쯤에 외국에서 영화 공부할 때 우연히 그냥 봤다. 그런데 자막 없이 그냥 봤더니 노동 계급 사람들의 영국 악센트가 너무 심해서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영화를 제대로 봤던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웃음).


정지연 - 마이크 리는 노동 계급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감독을 언급할 때 켄 로치와 함께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다. 오늘 이 영화를 다시 보신 소감이 궁금하다. 


이재용 - 나도 궁금하다. (윤여정 배우에게) 안 조셨어요?



윤여정 - 안 졸았다. 나는 영화 보면서 졸지 않는다, 누구처럼(웃음).


이재용 - 다시 보니까 두 가지 장면이 생각났다. 할머니가 문이 잠겨서 옆집에 갔을 때 ‘변소를 써도 될까요’라고 했더니 ‘아 화장실 말이죠?’라고 받아치는 대화가 재밌었다. 계급이 다른 사람들이 쓰는 언어의 뉘앙스로 농담을 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도 정말 인상적이었다. <커다란 희망>이 굉장히 유머러스한 영화란 걸 새삼스레 느꼈다.


정지연 – 감독, 촬영감독, 배우 등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면 하는 일에 따라 보는 부분이 다른 경우가 많다. 오늘 윤여정 선생님은 연기의 측면에서 특별하게 느끼신 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윤여정 - 나는 늙었으니까 늙은 할머니 역을 잘 본다. 확실히 마이크 리가 젊었을 때 만든 영화 같다. 마이크 리가 아마 나와 비슷한 세대일거다. 그런데 지금 여기 나온 할머니가 극중에서 70세인데, 저렇게 분장하고 정말 늙은 사람처럼 연기한다. 그런 걸 보니 마이크 리가 너무 젊었을 때 만든 영화가 아닌가 생각했다. 마이크 리 감독도 지금 70인데 영화 속 저런 모습은 아닐 거다. 노인을 그릴 때 많이 과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재용 – 나도 영화 보는 걸 좋아했지만 옛날에는 다양한 영화를 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주로 할리우드 영화였고 가끔 유럽 영화를 봤다. 우연히 “High Hopes”란 제목의 영화를 간판에서 보고 극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내가 평소 보던 영화와는 결이 달랐다. 

최근 <죽여주는 여자>를 만들었는데 <커다란 희망>과 비슷한 요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노인 문제 등. <죽여주는 여자>가 내 필모그래피 중에서 의외의 영화처럼 받아들여지는데, 사실 내가 써놓은 시나리오 중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더 있다. 내가 오랜 시간 관심을 두고 있는 요소들이 다 <커다란 희망> 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보통 사람들, 옆집 중산층의 허위적인 모습들 같은 요소. 어떻게 보면 현재 한국 같기도 하다.


정지연 - 1988년은 대처 시대의 후기였고, 이전에 세워놓았던 사회당의 공공정책들이 많이 붕괴됐었다. 그때 노동 계급이 느낀 위기감이나 정서를 잘 보여준다. 특히 마이크 리는 데뷔작을 찍은 뒤 약 10년이 지나서야 이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제작비 조달도 쉽지 않았고 ‘좌파 예술가’들에 대한 검열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커다란 희망>에는 계급 문제에 대한 묘사가 까칠하고 직설적으로 들어있다.

마이크 리가 배우와 어떤 식으로 작업하는 지에 대한 글을 읽은 적 있다. 마이크 리는 캐릭터를 설정하기 전에 배우와 계속 얘기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한다고 하더라. 배우의 평소 모습과 원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실제로 마이크 리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국제영화제에서 연기상도 많이 받았다. 이재용 감독님은 윤여정 배우와 작업할 때 어떤 과정을 거치는 지 궁금하다.



이재용 – 윤여정 선생님과 처음 찍은 영화는 <여배우들>이다. <여배우들>은 특별히 별도의 캐릭터를 만드는 게 아니라 배우들의 캐릭터를 이용하는 리얼리티 쇼 같은 영화였기 때문에 그냥 편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했다. <죽여주는 여자> 때도 미리 글을 써놓고 맞춰가는 게 아니라 내가 몇 년간 옆에서 보고 느꼈던 윤여정 배우의 말투를 담았다. 내가 하는 이야기나 농담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아도 윤여정 선생님은 다 아실 것 같아서 배우를 따로 찾을 필요도 없었다. 윤여정 배우를 놓고 영화를 계획한 셈이다. 따로 설명을 해야 하는 부분이 많이 없어서 더 수월했다고 할 수 있다. 


정지연 – 윤여정이란 배우의 연기를 볼 때 개인적으로 느낀 건 ‘스타’의 존재감이다. 에드가 모랭은 스타의 요소 중 하나로 ‘배우 자체가 녹아들지 않는 기호’를 꼽았다. 배우가 어떤 역할을 맡아서 연기를 할 때 배우 원래의 스타일, 그 사람 본연의 어떤 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드가 모랭은 그게 스타의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윤여정 선생님의 연기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어떤 영화에서 어떤 연기를 해도 ‘윤여정’의 몫은 분명히 캐릭터에 살아 있기 때문에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한국 영화 산업이 워낙 젊은 스타 중심이라서 중년의 여성 배우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기 쉽지 않은 데 윤여정 선생님은 화면을 장악하는 힘을 갖고 있다. 


윤여정 - 나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 작품이 들어오는 게 많지도 않고 선택의 폭도 넓지 않다. 하지만 변한 건 있다. 지금은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나한테 제안을 하느냐가 먼저다. 그 사람이 감독일 때도 있고 작가일 때도 있다. 물론 이렇게 하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내가 만약 지금 40대 배우면 따질게 많을 것 같다. 후배들을 보면 따지는 게 많다. 자기 역할에 포커스가 맞춰져야 하고, 돈도 많이 받아야 된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게 없어졌기 때문에 여러 겹의 옷을 벗은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다. 이 나이에 따져서 어떡하겠나. 따지면 누가 날 써줄까.


정지연 - 혹시 마이크 리의 영화 중 무얼 제일 좋아하는가.



윤여정 – 모르고 무심히 본 영화인데도 ‘어머, 이 영화 괜찮다’하면 거의 마이크 리 영화였다.  <베라 드레이크>도 마이크 리의 영화인 줄 모르고 봤는데 굉장히 잘 봤다. <비밀과 거짓말>도 좋았고 정말 다 좋았다. 이 사람 영화를 보면서 ‘이거 뭐지?’ 싶은 영화는 없었고, 아, <미스터 터너>는 ‘아유 이분이 이런 영화는 왜 하셨을까’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임에는 틀림없다. 


이재용 – 나는 잡식성이어서 한두 명을 꼽기는 어렵다. 실망하지 않는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감독 중에는... 마이크 리도 ‘성공률’이 높고 에릭 로메르도 그렇다. 우디 앨런의 영화는, 다른 사람들이 흉보는 영화들도 나는 좋아한다. 결과적으로 블랙 유머나 시니컬한 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관객 1 – 최근 예술과 윤리를 함께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배우로서, 영화 안에서 어떤 것까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내용이 너무 끔찍하면 그걸 실제 삶과 분리시켜서 생각한다. 그런데 직접 연기를 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다. 


윤여정 - 나는 메소드 액팅을 잘못하는 배우일 수 있다. 막 몰입해서 그 사람이 되는 그런 걸 못한다. 내가 영화나 대본을 해석하는 방법은 ‘내가 저 사람이 되면’, 또는 ‘이 여자가 이런 상황을 겪는다면’이라고 가정을 하는 것이다. 막 몰입해서 그 사람이 된 다음 신들린 연기를 하는 건 잘 못하는 것 같다. 


관객 2 -  제목이 ‘커다란 희망’인데 극 중 할머니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윤여정 - ‘high hopes'라는 것 자체가 약간 시니컬한 제목이 아닐까. 정말로 커다란 희망을 말하는 게 아닌 것 같다. 나름 다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인생은 우스운 거고 사실은 희망이 없다는 식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할머니한테는 희망이 없다. 그냥 거기까지 올라가는 게 희망이 아니었을까.


정지연 – 나도 윤여정 선생님의 말씀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한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친구와 대화를 한다. 모든 사람이 먹을 게 충분하면 좋겠고, 집이 있으면 좋겠고,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정말 기본적인 건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주인공이 그런 세상이 오면 아이를 낳자고 말하니까 여자 친구가 완벽한 세상은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느낌을 제목으로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윤여정 - 그 얘기할 때 존 레논의 『Imagine』 가사가 생각나더라.


이재용 – 중산층들은 영화 속 주인공들을 보고 루저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저런 작은 소망들조차 커다란 희망이 되어버린 사회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상 텃밭을 가꾸며 꿈을 꾸는 사람들의 평범한 삶은 계속된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정리 l 김혜령 관객에디터

사진 l 장혜진 포토그래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