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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오즈 야스지로 회고전

‘오즈 영화에서의 감정에 관하여’

[영화사 강좌] 오즈 야스지로를 말한다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 기간 중에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세계를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세 차례의 영화사 강좌가 마련되었다. 그 마지막 강좌로 지난 9월 30일 저녁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상영 후 영화평론가 김영진 교수의 강연이 진행되었다. ‘오즈 영화에서의 감정에 관하여’란 주제 때문인지 흥미로운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 강연 현장을 여기에 싣는다.


김영진(명지대학교 교수, 영화평론가): <고하야와가의 가을>이라는 영화는 잘 아시듯이 오즈 야스지로의 후기작 중 하나로, 이후에 <꽁치의 맛>을 찍고 돌아가셨다. 개인적으로 오즈의 후기작들도 좋아한다. 보통의 나이 든 감독의 영화 같지가 않다. 주인공인 만베이라는 캐릭터는 이전까지의 오즈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노인의 캐릭터와는 다르다. 철없는 노인의 모습인데, 나이가 들면 보통 지혜와 성숙함을 가진다는 생각에 반해, 노인이 된 오즈 본인이 늚음에 대해 그런 관점을 보인다는 것이 특이하다. 어떻게 보면 냉혹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느낌도 있다.
오즈는 당대의 거장이었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권위를 갖고 있었지만, 이 영화를 찍을 당시는 이런저런 공격도 많이 받고 있었을 무렵이기도 했다. 60년대에 정치의 계절이 시작되고, 영화 지형도 급격히 바뀌게 된다. 스튜디오 시스템이 무너지고, 희미하게나마 자주영화의 시대가 열리고, 오시마 나기사 같은 감독들이 주류로 떠오를 때이다. 마치 미국에서 60년대의 존 포드가 그랬던 것처럼 오즈 역시 낡은 세대의 대명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즈는 그를 비판했던 어느 젊은 감독을 나중에 만나 ‘영화감독이라는 것은 다리 밑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창녀 같은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임종 무렵에는 ‘영화는 사건이 아니라 드라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영화를 굉장히 크게 생각하고, 영화는 중요한 것을 찍어야한다는 경향에 맞서 오즈는 늘 홈드라마만 찍었던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는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혼담이 오가고 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되풀이 된다. 그런데도 그의 영화가 오랫동안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왜일까.
오즈는 배우가 연기를 못하게 한다.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으면 나중에는 배우가 지칠 정도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다시 찍었다고 한다. 오즈의 영화를 보면 연기가 굉장히 양식화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감정이 쌓인다. 비결이 뭘까. 일단 내러티브에서 보면 일반적인 영화에서 계속 끌고 가는 부분을 잘라내고, 내러티브 전개에는 크게 도움이 안 되는 부분을 길게 찍는 것을 볼 수 있다. 보통 영화에서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들을 묘사하지 않고, 반대로 일반적으로 누락되는 것들을 굉장히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그 느낌이 굉장히 묘한데, 그 가운데서 우리는 공간에 대한 느낌을 많이 받게 된다.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공간이다. 이는 오즈 영화의 특징적인 면이다. 이를테면 만약 아버지와 딸의 얘기라면, 딸을 시집을 보내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늘 딸이 있던 2층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비어있는 2층의 거실이나 침실을 보여주고 나면 그제야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이 밀려들면서 끝난다. 상실감이나 부재의 느낌이라는 것은 우리가 늘 함께 있던 공간에 누군가가 없을 때 절실하게 느껴진다. <고하야와가의 가을>에서는 굉장히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부재의 느낌이 있다. 만베이의 집에선 매미 소리가 계속 들린다. 굉장히 중요한 사운드 장치처럼 되어있다. 얼마 안 있어 그 매미들도 완연한 가을이 되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오즈의 영화들이 대부분 그런 방식으로 삶의 순환, 운명을 받아들이는 느낌을 보여준다. 그것이 대개는 따스하게 그려지는데, 이 영화의 마지막을 보면 조금 냉정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까마귀들이 엄청 강조 되고, 마치 조종을 울리듯 오즈 영화답지 않은 음악이 흐른다. 거기에 아키코와 노리코가 대화를 하면서 ‘나는 내 길을 가겠다’고 말한다. 일말의 미련이나 감상도 없이 탁 끊어버린다. 종래의 오즈의 영화들에 깃들어 있던 정조들, 따뜻한 느낌들과 조금은 다른 느낌을 준다.
오즈의 영화에서 내러티브가 인과관계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인위적으로 누락시키고, 어떤 부분은 보통 영화에서보다 훨씬 늘여놓는 가운데 공간의 느낌이 강조된다는 것과 함께 수평의 대화 장면들 역시 특징적이다. 통상적인 쇼트/리버스 쇼트가 아니라 스트레이트하게 붙어있는, 그것도 구도를 똑같이 해서 붙어 있는 쇼트들을 보여준다. 그런 식으로 굉장히 양식화된 화면이 주는 느낌에 우리는 반응을 하게 되는데, 그게 오즈 스타일의 힘인 것 같다. 오즈의 영화에는 화면사이즈의 양식화와 함께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쇼트들, 흔히 말하는 빈 쇼트들이 등장한다. 그야말로 통속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문득 특정한 사물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식이다. 70년대에 폴 슈레이더는 이러한 오즈의 스타일을 ‘초월적 스타일’로 명명하면서 선의 결정체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하스미 시게히코 같은 평론가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만춘>에서의 항아리 쇼트에는 항아리만 있는 게 아니라 항아리에 떨어지는 그림자와 빛이 있고, 무드가 있다고 얘기한다. 그 공간에서만의 무드가 아닌, 두 부녀가 살아왔던 삶의 무드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고하야와가의 가을>에도 그런 쇼트들이 있다. 만베이가 속한 공간은 교토의 오래된 가옥들이 있는 공간이다. 거기에 노리코가 근무하고 있는 현대식 빌딩들을 보여준다. 그런 식의 인서트 커트들은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후반부에서 까마귀나 무덤, 화장터 굴뚝에서 나는 연기 같은 것을 보여주는 쇼트들에는 기존의 오즈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근본적으로 그런 쇼트들은 누구의 시점이 아닌데, 사람에 대해서 뭔가 거리를 두는 오즈만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 영화에서의 화면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시선으로 어떤 층들을 가지고 있다. 거리감를 충분히 두고 있으면서, 애정을 갖고 있는, 그러면서 상투적이지 않을 수 있는 힘이 그런 쇼트들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날드 리치라는 미국 평론가가 서구에 일본 영화를 소개하는 어떤 프레임이 있다. ‘일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오즈도 그런 틀 안에서 시켰다. 그런가 하면 80년대에 노엘 버치나 데이비드 보드웰 같은 평론가는 서구적 맥락 안에서 오즈의 영화를 해석한다. 인과관계에 따라 내러티브가 전개되는 방식의 고전적인 영화와 다르다는 점에서 오즈의 영화를 굉장히 모던한 영화로 보았다. 오즈의 영화에서 내러티브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받쳐주는 형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구의 평단에서 오즈의 영화가 재해석되었던 맥락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하스미 시게히코 같은 평론가는 표층 비평이라고 해서 심층을 전제하지 않고 텍스트의 표면을 가지고 얘기한다. 영화에서의 표현만을 집요하게 관찰하며 비평하는 것이다. 심층을 전제하고서 설명하는 것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오즈의 영화에서 먹는다는 것, 계단을 오른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굉장히 신선하고 재미있다.
오즈에 대한 해석이 어떤 식으로 향하든 특이한 것은, 지금도 오즈의 영화가 세계적으로 앞서 있는 감독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의 페드로 코스타 같은 감독은 자신이 오즈의 영화에서 받은 영향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영화가 오즈의 영화와 닮아 있다고 말한다. 본질적인 문제인 것 같다. 오즈는 진짜와 가짜와 같은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초월해 거기서 나온 감정이 진실하냐 아니냐를 가지고 승부를 걸려고 했던 감독이었다고 생각된다. 페드로 코스타 같은 감독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핵심이라는 면에서 오즈의 영화가 굉장히 위대하다고 얘기한다. 오즈는 익숙하건 익숙하지 않건, 일종의 관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려고 했던 감독 같다. 가장 뛰어난 배우는 연기하지 않는 배우다. 훌륭한 감독이 배우에게 디렉션한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연기를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오즈도 결국 그런 것을 시도 했던 게 아닐까. 자신이 만든 양식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가짜 같다는 느낌을 결국 역설로 돌파했던 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관객1: 하라 세츠코는 늘 딸이나 며느리로 등장하는데, 그래도 다음에 볼 영화에는 또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진다. 오즈의 영화에는 늘 익숙한 배우들이 역할을 바꿔가며 등장하는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김영진: 말씀하신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웃음) 일본영화는 이미 30년대에 스튜디오 시스템이 확립되어 있었다. 당시 오즈 사단이라고 해서 작업하는 스탭들과 배우들이가 항상 같았다. 관객들이 일정한 기대를 갖고 극장을 찾게 되니까, 스튜디오 시스템에서는 그러한 것이 굉장한 자산이 된다. 오즈의 홈드라마, 카프라의 코메디, 존 포드의 서부극 하는 식이다. 익숙하다는 것은 영화 산업 안에서 티켓 파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반복 된다. 그러한 반복과 차이는 장르나 스타시스템에서 굉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그 안에서 아주 절묘하게, 계속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들이 중요하게 된다.


관객2: 오즈 의 영화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오즈의 영화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유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김영진: 홍상수 감독이 좋아하는 감독 중의 한명이 오즈 야스지로다. 일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오즈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대한 얘기 중 하나가 비판이 사건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인간의 욕망을 하나로 제한시켜 놓고, 공간이나 시간, 아이덴티티를 확장시켜가면서 이를 변주해 가는데, 오즈의 영화에서도 그런 점들을 높게 평가하는 것 같다. 그리고 굉장히 일상적인 사물인데 오즈의 영화에서 보면 굉장히 특권화된 순간처럼 보일 때가 있다. 삶에 대해 생각할 때, 늘 같은 일상 가운데 갑자기 무언가 감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마 그런 점에서 유사성을 느낄 수 있지 아닐까 추측해 본다.


관객3: 오즈의 영화 같이 늘 비슷하고 평범한 홈드라마가 당대에도 흥행 했는지 궁금하다.
김영진: 오즈는 흥행 감독이었다. 그가 쇼치쿠에서 영화를 찍으면서 항상 최고의 스탭들, 배우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영화가 흥행이 잘 됐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영화는 역설이다. 고다르는 40,50년대가 사람들이 르누아르나 존 포드, 윌리엄 와일러의 영화를 부담 없이 보러가던 좋은 시대였다고 말했다. 당시의 서민적인 오락이었으면서도, 지금 보면 굉장히 에센스가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던 시대였다.

정리: 장지혜(관객에디터) 사진: 조유성(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