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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

복수와 연대-클로드 샤브롤의 <야수는 죽어야 한다>(1969) 남녀가 침대에 누워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다. 남자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죽인 살인범에게 복수하고자하는 일념으로 살아가고 있는 샤를이다. 그의 곁에 누워있는 여자는 그가 살인범을 찾기 위해 접근하다가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된 엘렌이다. 그들의 얼굴은 침대 옆에 있는 조명과 상대의 얼굴에 가려져, 두 사람 모두 한쪽 눈과 반쪽 얼굴만 카메라에 담긴다. 그런데 이들의 반쪽 얼굴은 또 하나의 얼굴을 이루어서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는 두 눈을 가진 한 사람의 얼굴처럼 보인다. 샤를의 눈은 허공을 바라보고, 엘렌의 눈은 샤를을 응시한다. 엘렌은 샤를에게 왜 폴을 도와줬냐고 타박하지만, 샤를은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야수는 죽어야 한다’는 마치 샤를의 일기장에 빼곡하게 적혀있.. 더보기
야만의 풍경- 클로드 샤브롤의 <도살자>(1969) 석회동굴의 오프닝 크레딧이 지나면 영화는 작은 마을의 전경을 비추며 시작된다. 어딘가 음울하고 스산한 느낌이 들던 석회동굴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마을의 모습은 조용하고 평범하다. 이어서 영화는 결혼식장으로 카메라를 옮기는데, 이곳은 처음으로 푸줏간 주인 포폴과 사립교사 교장 엘렌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다음에 진행되는 이야기를 거칠게 설명해보자면 이렇다. 포폴과 엘렌은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그러던 중 마을에 알 수 없는 살인사건이 몇 차례 일어난다. 영화의 후반부에 밝혀지지만 줄곧 포폴이 범인이 아닐까, 추측하던 관객들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다. 마을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는, 흔히 우리가 설정 쇼트라고 부를 법한 풍경의 장면들이 영화에는 몇 차례 등장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 영화에서 풍경을 보.. 더보기
[시네토크] "이상한 나라의 자크 리베트" -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이용철 영화평론가 “이상한 나라의 자크 리베트”- 이용철 평론가 시네토크 지난 7월 2일(토) 상영 후 이용철 평론가의 시네토크가 있었다. 다양한 키워드와 함께 리베트의 필모그래피를 짚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이날 이용철 평론가가 들려준 이야기의 일부를 정리해 보았다. 이번 “자크 리베트 회고전”에서 시네토크를 제안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가 와 리베트의 유작 였다. 리베트의 영화 중 가장 즐겁게 본 작품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를 평하며 ‘시네마 오브 플레저 cinema of pleasure’라는 표현을 썼다. ‘쾌락’이라고까지 번역하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그만큼 즐거운 영화라는 말일 것이다. 리베트의 작품 중에는 무겁거나 심각한 것도 있지만 나는 그런 영화보다는 ‘가볍게’ 본 영화를.. 더보기
[클레르 드니 회고전 - 상영작 리뷰] 몸의 리듬이 전부라 말하고 싶은 <좋은 직업>(1999) [클레르 드니 회고전 상영작 리뷰] 몸의 리듬이 전부라 말하고 싶은 - (1999) 클레르 드니의 은 진행되는 내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육체의 선율에 경도되게 하는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말조차 궁색하게 느끼도록 해버린다. 적어도 이 영화를 말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드니 라방이 “이것이 삶의 리듬”이라는 가사의 노래에 맞춰 무지막지한 막춤을 추는 모습에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순간을 언어화하기 위해 이제까지의 영화를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고민하게 되는 동시에, 그런 언어화를 경유해 설명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순간이 아닌가란 고민도 하게 된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 생각을 이어나가든 그에 앞서 말하고 싶은 건 그것.. 더보기
[클레르 드니 회고전 - 상영작 리뷰] 불안의 정서 - <침입자>(2004) [클레르 드니 회고전 - 상영작 리뷰] 불안의 정서 - (2004) 의 혼란스러움은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시작된다. 먼저 국경이 있다. 프랑스와 스위스의 경계에서 세관원인 여자와 탐지견이 등장한다. 뒤이어 그녀의 가정,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집을 보여주고, 여자와 남자의 성애 장면이 이어진다. 그러고는 어두운 숲속, 담을 넘는 침입자들의 이미지. 이러한 이미지들의 배열에서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의 맥락을 잡아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오프닝 시퀀스의 역할이 서사의 인과관계를 쌓아가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봐야 할 것은 이미지들 그 자체다. 국경, 개, 가족, 그리고 침입자의 이미지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해서 변주되며 나타난다. 는 심장 이식을 받은 루이 트레보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지만,.. 더보기
[클레르 드니 회고전 리뷰] 관객의 무력한 위치 - <백인의 것>(2009) [상영작 리뷰] 관객의 무력한 위치 - (2009) 많은 경우, 클레르 드니의 영화는 그리 친절하지 않다. 특히 드니의 이야기 전달 방식은 표준적이고 양식화된 스토리텔링 형식을 크게 벗어난다. 그녀는 이야기의 인과 관계를 생략하고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주요 정보를 누락시키기도 한다. 때로는 시간을 뒤섞은 다음 그에 대한 지표도 제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꿈이나 상상 장면을 현실인 것처럼 그리기도 한다. 당연히 관객은 혼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야기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비교적 간단한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감독은 인물들에 대한 정보나 인물들간의 관계, 그리고 주요 사건에 대한 인과 관계를 생략한다. 이를테면 관객은 마리아가 생명이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왜 .. 더보기
[클레르 드니 회고전] 감각의 영화: 클레르 드니의 세계 감각의 영화: 클레르 드니의 세계 낯섦, 이방인, 주변부, 어두움, 신체, 감각, 타자 등. 클레르 드니의 영화가 연상시키는 미묘한 단어들이다. 1990년대 이후 프랑스 영화가 보여주는 새로운 흐름으로 비평가들은 ‘감각’과 ‘신체’에 대한 관심을 꼽는다. 그 대표적인 감독이 필립 그랑드리외, 가스파르 노에, 브루노 뒤몽, 베르트랑 보넬로, 카트린느 브레이야 등이다. 클레르 드니 역시 이런 경향에 속하는 주요 감독으로 여겨진다. ‘감각의 영화’라 할 수 있는 이 경향은 조형적 측면의 강조라는 프랑스 영화미학 전통을 신체와 연결해 확장시키며, 영화적 서사구조와 미장센에 독특한 흐름을 형성한다.『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조형적 내레이션을 신뢰하는 영화에 동질감을 느낀다”고 밝힌 것처럼 드니는 영화의.. 더보기
[클레르 드니 회고전] "드니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결국 그런 낯섦에 접근하는 것이다" -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 [에디토리얼] 감미로운 공포 클레르 드니를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이다. 그녀는 뉴커런츠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그리고 신작 을 들고 부산을 찾았다. 은 엠마뉴엘 베른하임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로,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나와 애인의 방으로 이사하려는 한 여성의 불안한 심리를 그렸다. 그녀는 운송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꽉 막힌 도시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차 안으로 들어오려는 남자를 거부하며 차창 바깥의 세계를 쳐다본다. 그리고 우연히 한 남자를 받아들인다. 낯선 이를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타자와의 접촉과 만남. 여기에 침입이 발생한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녀의 모든 영화는 어떤 도착, 어떤 만남, 혹은 어떤 방문을 그린다. 여기에 낯선 이에 대한 매혹, 그(녀)를 받아들일지의 주저와 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