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영화 산책 - 오즈 야스지로에서 프레드릭 와이즈먼까지]


데이빗의 자리

- <스파 나잇>

 

<스파 나잇>은 한국계 미국인 앤드류 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자 2016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수상작이다. 영화는 데이빗이라는 인물의 곤경을 총체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미국으로 이민 간 한국인 집안의 3세, 경제난에 시달리는 부모의 유일한 자식, 부모의 기대와 한인 사회의 은근한 부추김 속에서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인물. 무엇보다도 지금 데이빗을 압도하는 건 자신의 성정체성을 감각하고 자각하며 느끼는 두려움과 떨치기 힘든 사회적 기대에 따른 자기 부정이다.

인물의 감정 상태와 상황을 그려가는 이 영화의 방식에는 특정한 공간이 있다. 그곳은 불특정 다수가 집단적으로 몸을 드러내는 게 공적으로 허락된 대중 목욕탕이다. 특히나 한국의 가족주의적 관습에 비춰보면 대중 목욕탕은 가족 구성원 중 적어도 출생 신고에 생물학적으로 동성이라 표기됐을 이들끼리 함께 목욕을 하며 가족만의 고유한 서사를 만들고 가족 유대를 확인한다는 믿음이 생성되던 공간이다. 영화는 대중 목욕탕이 실은 얼마나 더 은밀한 사적 서사가 가능한 곳인지를 보여준다. 영화의 첫 시퀀스도 대중 목욕탕이다. 데이빗 부자가 서로의 등을 밀어주고, 데이빗은 자신의 벗은 몸을 감각하며 나신의 타인을 의식한다. 지극히 사적인 감각은 공적 공간에서 살아난다.

데이빗이 대중 목욕탕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성정체성에 대한 자각과 자기 부정은 한층 심화돼 간다. 데이빗은 ‘크루징 스팟’으로서의 대중탕을 목격하고 경험한다. 섹슈얼리티의 맥락에서 ‘크루징’(cruising)은 남성 성소수자들 간에 관심을 드러냄을 칭하는 은어이자 극장, 공원, 공공 화장실과 같은 공적 공간에서 섹스 파트너를 찾는 행위까지를 포함한다. 대중 목욕탕에서 오가는 은밀한 시선, 그곳의 또 다른 칸막이 공간인 사우나실과 수면실에서의 유혹과 접촉, 성행위까지. 데이빗은 갈등한다. 그곳에서 자신이 본 것을 부정하고 혐오하다가도 자신이 본 것을 그 자신의 감각으로 느껴보고 싶다. 서로를 탐색한 후 그들만의 시간을 갖고자 사우나실로 향하는 이들을 지켜보던 데이빗은 이 상황을 모른 채 사우나실로 가려는 제3의 인물을 사우나실 청소를 핑계로 차단한다. 동시에 사우나실 안에서 그들만의 시간을 보내던 자들을 용인한다. 반대로 데이빗은 경찰이 출동하고 “이상한 짓을 보면 (자신에게) 알리라”는 사장의 말을 듣고는 수면실의 은밀한 행위에 거부 반응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우나실에서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 보려던 데이빗은 상대의 호의적 반응 앞에 놀라며 되레 거부 의사를 표하기도 한다. 이처럼 영화는 대중 목욕탕에서 벌어질 수 있는 전 방위적인 가능성을 통해 데이빗의 갈등과 그 양태를 점진적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데이빗은 사실상 리액션으로 점철돼 있는 인물이다. 상대와 상황의 변화 앞에서 최소한의 반응만을 보인다. 영화는 내면의 갈등을 겪는 데이빗이 누군가와 자신의 상태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시간조차 허락지 않는다. 대신 데이빗은 자신을 둘러싼 상황, 대중 목욕탕 안팎,가족과 지역 사회, 그 자신을 더 많이 보고, 듣고, 감각한다. 리액션만이 가능한 세계, 더 많이 지켜봐야 하는 이가 감당해야 하는 시간은 고통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때의 시간은 개인의 감각과 충동을 억제하게 하는 외부 세계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던 데이빗이 영화 막바지에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충동은 설득력이 있으면서도 의아함을 남긴다. 데이빗은 사우나실에서 상대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성행위를 하지만 결국 상대에게 거부당한다. 이 극적인 쾌락과 감각의 순간에 데이빗의 질문은 어째서 “한국인이냐”는 것이었을까. 거기에는 성정체성뿐 아니라 그가 미국 사회에서 자라면서 끊임없이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드리운 또 다른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경험의 세계에서 감각과 감정은 어디까지 열릴 수 있을까. 감각과 감정의 세계는 경험을 얼마나 벗어날 수 있을까. 데이빗의 곤경은 훨씬 더 복잡한 지도 위에 놓인 것일지도 모른다.


정지혜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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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시인

- <패터슨>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주에 위치한 패터슨이라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월요일 오전 6시 10분경,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과 동명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버스 운전기사이자 시인인 패터슨이 잠에서 깨어난 다음 늘 그랬다는 듯 시계를 확인한다. 그는 아직 잠에서 덜 깬 아내 로라와 아침 인사를 나눈 다음 전날 밤에 준비해둔 것으로 보이는 옷가지를 챙긴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홀로 단출하게 아침 식사를 한다. 이후로도 영화는 요일별로 아침에서 저녁으로 이어지는 패터슨의 일과를 따라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짐 자무쉬의 전작에 익숙한 관객에게 이 오프닝은 생경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황혼의 시간과 허름한 모텔 공간을 배경으로 어딘가를 정처 없이 배회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던 그가 패터슨이라는 소도시에 뿌리내린 한 시인의 삶을 다루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번 작품에도 특정 지역과 공간에 깃든 장소감과 역사성을 언급하는 대목이 군데군데 있고, 카페나 술집에서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 수더분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짐 자무쉬의 인장과 같은 장면을 확인할 수 있음에도 <패터슨>은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인 구석이 있다. 전작들과 달리 떠나는 것보다 머무르는 것에, 일탈보다는 회귀에, 특이한 것보다는 일상적인 것에, 어둠보다는 밝음에 좀 더 친밀하게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일상적인 대상들 간의 친화력을 강조한다. ‘친화력’이라는 단어는 18세기 무렵을 중심으로 화학자와 물리학자들이 물질 간의 관계와 결합을 설명하기 위해 주로 썼던 것으로, 혹자에게 그것은 사랑을 욕망의 화학작용에 빗댄 괴테의 『친화력』을 떠올리게 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친화력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신비를 표현하는 수사에 가깝다. 짐 자무시의 <패터슨>에도 이성보다는 직관에 기초한 언어로 설명해야 할 법한 대상에 대한 끌림을 표현한 장면이 다수 있다. 영화는 패터슨이 일상의 작은 부분에 매력을 느끼고 그가 그것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묘사한다. 

패터슨의 일상적 행위와 문학적 창작 행위는 그가 일상을 시적인 언어로 번역하거나 표현하는 부분에서 만난다. 예를 들면, 식탁 위에 놓인 성냥갑, 로라의 일상적인 모습, 버스나 거리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마저도 그에게는 모두 좋은 글감이다. 그의 일상 전체가 시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는 일상의 파편들과 정신적으로 교감하는 과정에서 시를 완성한다. 이 영화에서 일상적인 대상들 사이의 유사, 동일, 차이, 반복이 강조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이름이 같은 대상들이 함께 언급되거나 쌍둥이처럼 외형적으로 닮은 것들이 나란히 놓이는 경우가 있다. 물론 영화는 그들 간의 친화력에 관해 논리적인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대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비밀과 신비를 품고 있다고 넌지시 말한다. 패터슨에게 시를 적어 놓은 공책이 비밀 노트이고, 그의 아내 로라가 만든 파이가 비밀 파이인 것처럼, 일상을 둘러싼 모든 것들의 가치는 표면을 꿰뚫고 그것의 내면을 보려는 시선과 관심 속에서 빛을 발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시인이란 사소한 것들의 껍질을 벗겨 삶의 신비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연금술사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이도훈 『오큘로』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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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것을 마주하는 방법

- <스테잉 버티컬>

 

알랭 기로디의 <스테잉 버티컬>에는 누군가의 시선에 비친 광경을 먼저 제시하고, 그 시선의 주인을 나중에 보여주는 숏이 종종 등장한다. 오프닝 시퀀스의 드라이빙 숏은 주인공을 화면에 등장시키지 않은 채 한동안 계속된다. 관객은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그 시선의 주인이 차창 밖의 사람들을 응시하는 시점 숏을 감당해야 한다. 시선의 주인을 명시하지 않은 채 시선 숏을 제시하는 방식은 레오가 처음으로 마리를 발견하는 장면에서 다시 등장한다. 걷는 레오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숏이 등장한 직후, 카메라는 양 떼와 양치기 개, 마리가 함께 있는 풍경을 멀리서 당겨 잡는다. 이후 망원경에서 눈을 떼는 레오의 모습이 등장하면서 시선의 주인은 후술된다. 물론 그에 앞서 레오가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숏이 등장했기에 이것이 레오의 시선이라 짐작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경제적으로 숏을 연결하는 대신 시선의 주인을 확정하기를 유예하고 있으며, 그 유예된 자리에 레오의 신체가 들어 앉는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숏의 배열로 인해 레오는 보는 자이자, 누군가에 의해 보이는 자라는 복합성을 지니게 된다.

기로디의 영화에서 시선은 보는 자의 주체성 혹은 보이는 자의 대상화라는 시선의 권력 구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보는 자의 시선은 종종 몸을 숨긴 채 쫓기는 신세로 언제든 전락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관계 대신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관계는 상호동시적인 응시다. 관객에게 있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때때로 고통스럽다. 레오가 마리의 임신 소식을 듣는 장면은 쿠르베의 회화 『세상의 기원』을 연상시키는 성기의 클로즈업 숏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숏은 곧이어 등장한 적나라한 출산 장면과 맞붙는다. 카메라는 앞서 성기를 보여주었던 것과 유사한 위치에서 출산하는 성기를 마주 본다. 영화가 성기를 보여주는 방식은 끔찍하리만치 적나라하되 선정적이진 않다. 기로디가 그려낸 인간의 탄생 장면은 가축의 출산 장면과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을 천하게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이미지를 자연에 가까운 순수한 상태로 돌려놓는 것에 가깝다.

기로디가 말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레오가 테라피스트에게 검진을 받는 장면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무줄기처럼 보이는 선을 얼굴과 몸에 부착한 채 레오는 누워있고, 테라피스트는 몸의 소리를 듣는다. 엑스레이를 통해 신체 내부를 가시화하는 것과 대조되는 치료 방식에는 영화가 풍경을 다루는 방식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 카메라는 몇 개의 드라이빙 숏과 대초원을 보여주는 원경 숏을 통해 풍경을 훑거나, 그 속에 던져진 레오가 늑대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예감에 두려워하면서도 길 위에 선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카메라의 움직임은 두려움과 매혹으로 가득 찬 풍경과 그것이 숨기고 있을 짐승의 기운을 더듬는 것처럼 보인다. 극은 대체로 레오의 시점에서 진행되기에 다른 인물의 등장은 종종 느닷없이 발생하곤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늑대는 어쩌면 이러한 기운을 응축한 대상처럼 보인다. 기적인지 비극일지 모를 두려움과 매혹 속에서 레오와 장 루이스가 늑대와 대치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필요한 것은 힘겨루기나 승패 정하기가 아니라 일단 서로를 감지하는 것이기에 응시의 순간은 좀 더 지속되어야만 한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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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관객이 줄어든다는 얘기는 이십 년 전부터 했다”

예술영화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


지난 12월 14일(목),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는 일본 오사카의 예술영화관인 ‘플래닛 플러스 원’의 도미오카 구니히코 대표를 초대하여 영화를 둘러싼 얘기를 나누는 특별한 자리를 가졌다. 특별히 대전아트시네마에서 진행된 이 자리에는 서울, 청주, 대구 등에서 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스태프들이 참여하여 깊이 있는 이야기를 오래도록 나누었다. 도미오카 구니히코 씨는 신인 감독들이 만든 독립영화의 중요성을 여러 번 강조하며 조만간 한국과 일본의 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하자는 제안도 하였다.

도미오카 구니히코(플래닛 플러스 원 대표) 만나서 반갑다. 나는 1995년부터 오사카의 ‘플래닛 플러스 원’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공간은 내가 중학생이던 70년대부터 보기 힘든 영화를 상영하는 장소였다. 주로 16mm 필름을 상영했고, 무성 영화 시절의 프랑스 영화, 70년대의 미국 영화를 자주 상영했다. 필름은 내가 개인적으로 수집한 것도 있고, 고베영화자료관에서 수집한 것들도 있다.


강민구(대전아트시네마 대표) 대표님의 젊은 시절이 궁금하다. 언제부터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나?


도미오카 구니히코 중학생이던 73년 정도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 끝 무렵이었고, 텔레비전에서 <미지와의 조우>가 방영되던 시절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나 알프레드 히치콕, 존 포스, 하워드 혹스의 영화를 보면서 성장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3편을 동시 상영하는 극장이 있었는데 영화자료관에서 이미 상영된 것들을 상영하곤 했다. 그런 영화관에서는 50~60년대 영화는 잘 상영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히치콕의 영화를 보고 흥미가 생겨 관련된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책에는 쓰여 있지만 볼 수 없는 영화를 체크해서 메모를 해두기도 했다. 이후 텔레비전이나 영화관에서 상영되지 않는 작품들을 체크해 나갔는데 리스트가 길어질수록 볼 수 없는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대학에 입학해서 영화 서클을 하게 됐다. 그곳 부원들끼리 두 달에 한 번씩 영화관이나 텔레비전에서 볼 수 없는 영화를 선정해 필름을 빌려 대학교 홀에서 상영했다. 당시 일본에는 16mm 필름을 대여해 주는 곳이 있었는데 부원끼리 돈을 모아서 충당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가장 먼저 배운 게 16mm 영사기를 다루는 법이었다. 그때는 일본의 어느 대학이든 16mm 영사기를 갖추고 있었다. 상영하는 작품에 관한 리플렛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었다. 이런 활동의 연장선에 플래닛 플러스 원이 있다. 일반적인 영화관과는 다르게 우리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뽑아서 상영하는 자주상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에 구로사와 기요시가 8mm로 영화를 자주제작한다는 기사를 봤다. 나도 친구들과 극 영화를 자주제작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두에 도쿄로 이사를 가서 5년 정도 살았는데 그때 구로사와 기요시와 알게 되어 그의 작품의 각본을 쓰게 됐다. 1980년대 이전에는 일본에서 자주제작하던 감독들이 프로로 데뷔하기 어려웠다. 보통 영화사에 취직해서 7~8년 동안 조감독을 하고 감독이 되는 게 일반적인 수순이었는데 70년대가 되면 영화사들이 어려워진다. 영화감독을 지망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영화사에서 조감독을 모집하지 않았다. 그래서 피아영화제(PIA Film Festival)에 자주제작 영화를 출품하고 감독이 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지금 60대 정도인 감독들은 대개 그렇게 자주제작 영화를 만들던 사람들이다.

90년대 중반에 구로사와 기요시, 다카하시 히로시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과 함께 기요시의 집에 모여 밤새 영화 얘기를 하곤 했다. 그러다 우리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기획은 영화사에서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에 젊은 관객은 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고, 영화사는 영화의 내용이 엉성하더라도 인기가 있는 아이돌이나 스타가 출연하길 원했다. 스타가 출연하기만 하면 영화감독이 그 안에서 뭘 해도 좋다는 게 일반적이었다.

여러 편의 영화를 동시 상영하는 시스템이 있었는데 한 편은 제대로 된 배우와 스토리를 갖추고 있는 작품을 틀고, 다른 한 편은 소위 ‘B영화’, 즉 이상한 영화를 틀었다. 대표적인 게 로망 포르노다. 그때의 감독들은 자신만의 시도를 하는 게 가능했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감독이 자신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찍지 못하게 됐다. 흥미롭고 좋은 작품들은 흥행엔 참패했다.

그때는 스필버그나 조지 루카스가 활동하던 시기였고 대학에서 영화를 배우던 사람들이 감독으로 데뷔하는 걸 보면서 관객을 키워야 한다는 걸 새삼 절감했다. 영화를 보지 않고 성장한 세대들이 영화가 가진 재미를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1920년대 이전의 무성 영화를 포함해서 오래된 영화들에는 이미지를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대한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굉장히 많다. <네 멋대로 해라>의 대사에도 나오는 것처럼 할리우드의 수많은 영화 문법들이 1912년 그리피스의 작품에서 이미 시도되었다. 젊은 감독들에게 그런 좋은 영화를 보여주지 않으면 영화엔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감독이 영화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영화를 만들기 이전에 영화를 보여주는 게 앞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의 누벨바그나 독일의 뉴 저먼 시네마도 모두 시네마테크가 있었기에 가능한 창작 활동이었다.

휴대폰으로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개인적으로 필름이야말로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복수의 사람들과 함께 보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고베의 한 영화관에서 우디 앨런의 <애니 홀>을 봤다. 당시의 나에겐 그 영화가 그리 재밌지 않았는데, 어떤 외국 관객들이 한 대목에서 폭소하고, 다른 대목에서는 또 다른 관객층이 폭소하는 모습을 봤다. 극장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봤을 때 그곳은 하나의 사회가 형성된 거라고 볼 수 있다. 각자의 인생 경험에 따라서 영화의 서로 다른 장면에서 반응하는 걸 보게 된다. 그러면서 내가 모르는 세상이 많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초등학생 때 <시민 케인>을 봤고 재미없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자꾸 명작이라고 해서 고등학생 때 한 번, 대학생 때 또 한 번 다시 봤다. 그때서야 무척 흥미롭고 훌륭한 영화란 걸 알게 됐다. 연령과 지식이 쌓이면서 영화의 풍부한 레이어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플래닛 플러스 원을 그런 장소로 생각하고 있다.


강민구 긴 시간 동안 세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의 미니시어터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대학 시절 영화 동아리 활동을 했던 분들이 많은데 도미오카 대표도 극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영화 제작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있을 것 같다. 영화와 관련된 워크샵이 있다면 소개해주면 좋겠다.


도미오카 구니히코 ‘시오토’라는 프로젝트가 있다. 플래닛 플러스 원을 20년간 운영해 왔는데 1996~1997년경에 젊은 감독 지망생들이 자신이 만든 16mm 작품을 가지고 와서 상영해 달라고 했다. 우린 주로 오래된 영화들을 틀고 있었는데 그때 무명의 젊은이들이 만든 작품을 상영했다. 그러면서 젊은 감독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을 상영하는 것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던 중 오사카시에서 영화제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시네 드라이브’라는 간사이 지역 자주영화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신 시(市)의 문화예산으로 제작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어떨까 싶었다. 젊은 감독들에게 예산을 지급해서 이듬해 영화를 제작하도록 하는 전주영화제의 ‘디지털 3인 3색’을 참조했다. 그렇게 생겨난 게 시오토다. 전주영화제만큼 많은 예산을 제공하지는 못하지만 한 작품당 30만 엔 정도 지급하고 있다. 

최근 들어 일본의 미니시어터에서도 독립영화를 많이 상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최근의 독립영화들은 질이 저하되었다고 생각한다. 누구든 간단하게 영화를 찍는 시대가 되었다. 감독 본인이나 감독의 친구들이 관객으로 오곤 한다. 이게 독립영화 상영의 실상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이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싶다는 건 많이 느껴지지 않고 감독 자신의 사적인 표현만 있을 뿐이다.

비평이 결여된 영화계의 상황도 이에 영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보기 힘든 영화를 상영하는 장소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일본 영화계는 비평의 영향력이 없다. 아무도 비평을 쓰지 않고, 영화에 관한 글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사적인 코멘트에 그친다. 영화가 왜 재미있는지를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옛날 영화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을 위한 설명도 부족하다. 이런 것들이 앞으로 제작될 영화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청중 1 젊은 관객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극장에서 좋은 영화를 상영해도 낡은 시설에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 젊은 관객들을 유치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이에 대해선 어떤 고민을 하고, 실천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도미오카 구니히코 시설이 아니라 내용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질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제대로 알리는 수밖에 없다. 플래닛 플러스 원은 교실 정도의 크기이고 의자도 간이 의자를 사용한다. 영화가 목적이면 시설이 좋지 않더라도 관객을 끌 수밖에 없다. 홍보에도 한계가 있다. 좋은 작품을 잘 알리는 게 가장 우선이기 때문에 극장의 스태프들이 작품에 대해 직접 글을 써서 좋은 작품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밖에 오역이 많은 자막을 수정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관객이 줄어든다고 얘기하지만 그 이야기는 20년 전에도 했다. 한 번 오고 말 사람을 잡기보다는 영화를 목적으로 꾸준히 찾아올 사람들을 찾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발 밑으로 쥐가 지나가는 누추한 극장에서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를 봤던 기억이 있다. 10년 전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한국의 커피는 일본보다 맛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서울이든 오사카든 똑같은 백화점이 있고 스타벅스가 있다. 차이나 낙차가 이야기를 만든다고 생각하는데 체험으로서의 세계가 점점 균일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청중 2 관객의 세대 구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도미오카 구니히코 1980년대 일본은 ‘시네필 세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화의 붐을 겪었던 세대다. 그때의 젊은 관객들이 이제 나이가 들어 중년 관객으로 영화를 보러 온다.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스크린으로 영화를 본다는 공통의 욕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단점이라고 할 만한 건, 미니시어터에 찾아오는 연령층이 높다 보면 젊은 관객들이 선입견을 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관에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연령층이 찾아오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한 회식 자리에 80대 노인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최근에 볼 만한 영화가 없다고 하길래 우리 영화관에서는 존 포드의 <콰이어트 맨>을 상영한다고 말씀드렸다. 당신은 어릴 적에 그 영화를 봤고 최근 중고 DVD를 구입해서 다시 봤다고 하면서, 어릴 적에 놓쳤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더라고 하더라. 이게 영화라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영화가 가진 복잡한 레이어를 다시 발견하게 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부터 노인층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유기적으로 다수의 반응이 발생하고, 이를 통해  사회에 나와 다른 타자가 존재한다는 인식을 사고하게 하는 곳이 영화관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동시에 각기 다른 반응을 하는 것. 그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청중 3 간사이 지역의 다른 극장들과 어떤 교류를 가지는지 궁금하다.


도미오카 구니히코 일종의 간사이 네트워크가 있어서 간사이 지역에서 극장을 운영하는 분들과 종종 모여 이야기를 한다. 도쿄와 비교했을 때 오사카는 극장 간의 교류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간사이 지역에서도 한국의 독립영화를 상영할 수 없을까 생각하고 있다. 극장끼리 작은 서킷을 만들어서 서로 자기 나라의 영화 상영을 제안하는 시스템이 구축되면 좋을 것 같다. 홍콩과 마카오에서 독립영화를 만드는 한 감독의 작품을 모아서 상영한 적이 있었다. 비슷하게 홍콩, 대만, 한국, 일본 등 아시아 지역의 영화관들이 동시에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어떨까. 배급사가 관여하면 어쩔 수 없이 흥행 실적이 중요해진다.


정리 황선경 관객에디터

사진 장승미 대전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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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만나다]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치유의 경험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 <황제>, <설계자> 상영 후 민병훈 감독 시네토크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오늘 상영한 <설계자>와 <황제>를 보면서 최근에 민병훈 감독의 영화가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두 편의 영화 모두 예술가들이 중심적으로 나온다. 시나리오를 쓴다던가, 무대 연출가라던가.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들과 그들이 가진 고민이 있다. 민병훈 감독의 초기 작품이 가진 활력과 비교하자면 많이 무거워졌다.

민병훈(영화감독) SF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나의 이야기, 내 주변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영화제에 초대받아서 마르세유에 가게 됐는데 간 김에 영화를 찍어야지 생각하고 급하게 시나리오를 구상해서 나온 게 <설계자>다. 그냥 내 얘기를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영화제나 전주영화제에 가는 즐거움이 전보다 많이 사라졌다. 나이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네마의 형태가 많이 사라졌기 때문인 것 같다. <황제>도 많이 무겁다. 가벼운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황제>는 김선욱 피아니스트의 연주와 나의 속내를 연결하는 과정이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인물들이 가진 우울이 있고, 현실의 많은 사람들과 나에게도 우울이 있다. 그 우울의 형태와 늪에 빠져 있는 인간들의 초상을 음악과 함께 영화의 이미지로 드러내고 싶었다. 즐거운 도전이 된 작업이다. 두려움이 있었지만 값진 경험의 시작이었고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활력소를 얻는 ‘힐링’의 경험이었다.

김성욱 영화에 남성적 멜랑콜리가 느껴지는 장면들이 있다. <설계자>의 남자가 절벽에 서 있는 모습이나 <황제>의 초반부에서 남자가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미지는 우울함과 함께 어떤 심연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그림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가 연상됐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 모두 물의 이미지가 강하다.

민병훈 물이나 불같은 소재를 이용해서 인간의 심리를 표현하는 작업은 이전에도 했었다. 그때는 살짝 건드리는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아예 전면에 두고 작업했다. 러시아에서 공부를 했던 경험이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다. 러시아의 대자연에서 보이는 심연의 세계 같은 것들이 내 정신세계와 맞닿아 있다. 이번에는 내가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지형도나 문제의식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이미지로 드러낼 수 있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지금 나아진 건 아니지만 내 작품에도 새싹의 기운이 태동하고 다른 방식의 영화가 생겨날 것 같다. 본질의 변화가 영화의 변화를 이끌 거라고 생각한다.

김성욱 두 편의 영화가 갖는 공간의 특성이 있다. 집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에서 집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개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가 없는 것 같다. <황제>에서는 “집으로 돌아가세요.”같은 말이 몇 번 언급되는데 돌아갈 집이 어딘지 의문이 든다. 피아니스트와 오케스트라가 나오는 장면이 있고 그 전에 영화관 장면도 나오는데 둘 모두 관객은 없다. 아까 말씀하셨던 어떤 변화, 관객의 공간이 점점 소멸하는 느낌이 있다. 그렇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자연의 풍경 속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 장면을 보면서 만약 음악이 있고 연주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있고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든다면 그 장소를 집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민병훈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콕 집어서 하시니 더 이상 보탤 말이 없다.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이 그렇다. 집이 있든 없든 어차피 떠돌이 인생이고 찰나의 삶인데, 많은 사람들이 부질없는 걸 뒤쫓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들 때 그런 부분을 조심해야 한다. 영화가 우상이 되거나 그 안에 빠져 허우적거리면 작품도 자멸할 거다. 자존감 있는 이야기는 영화를 만들 때 내 정신이 얼마나 곧게 서 있고 튼튼한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다른 예술가들을 바라볼 때도 그 고유의 형태를 존중하려고 한다. 김선욱 피아니스트 몰래 연주를 들으러 가기도 했었다. 관객으로 거기에 앉아 있는 행위 자체가, 혹은 그 공기의 기운 자체가 이미 100점이기 때문에 결과물에 치우칠 필요가 없다고 본다. 2년에 걸친 나의 모든 생각을 포함한 것이 이 영화가 가진 자존감이라고 생각한다. 관객들도 일종의 예술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상업성과 무관하게 그 행위가 그 자체로 소중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가 어딘지 알 필요가 없고 집도 필요 없었다. 그 안의 무국적성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김성욱 배우와의 연기 작업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내레이션과 모놀로그가 많아서 연극적으로 느껴지는데, 실제 연극은 두세 시간 동안 감정이 연결되어 가지만 이 경우엔 공간도 계속 달라지고, 시간적으로도 분절적인 작업을 했다. 배우들의 감정이나 대사의 리듬을 연결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민병훈 쉽지 않았다. 영화 작업이 길어지니 도중에 도망간 배우들도 있다(웃음). 어떤 정보 없이 공간에 데려가서 배우들에게 몸을 풀거나 생각할 시간을 준 다음 바로 시작하는 편이다. 리허설을 많이 하지도 않는다. 내가 왜 배우들을 새벽에 깨우는지, 왜 촬영을 저녁에 하는지는 나와 대화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들도 이해한다. 처음 야외에 피아노를 놓았을 때는 김선욱 피아니스트가 꽤 낯설어했다. 그러다 점점 장소의 분위기를 보고 어떤 연주를 해야 하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 생각해서 스스로 그 공간에 맞는 곡을 선곡하기도 했다. 다른 배우들도 내가 정한 큰 틀 안에서 몇 번 비슷하게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호흡이 깨지지 않았던 것 같다.

관객 1 영화 속 자연과 음악이 무척 좋았다. 다만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가 너무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다.

민병훈 연기가 부자연스럽다는 얘기를 해주는 분들이 꽤 많다. 배우의 연기 패턴의 문제라기보다는 연출자의 몫이다. 원래 자연스럽게 연기 잘하는 분들이다. 나는 이 방식으로 정제되어 나오는 걸 원했고, 하나의 그림이 되기를 바랐다.

김성욱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드라마틱한 연기와는 전체적으로 톤이 맞지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연기를 요구한 작업은 아닌 것 같다. 배우들이 서 있는 특정한 위치, 자세, 포즈가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다. 김선욱 피아니스트에 대한 자료를 조금 찾아봤다. 영화에서는 연주하는 모습과 표정만 잠깐 나오는데, 인터뷰를 보니 곡에 대한 해석이나 태도가 상당히 흥미로운 연주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병훈 내가 김선욱 피아니스트와 영화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가 가진 인간적인 묘한 매력 때문이었다. 예술가로서 자신의 삶을 잘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대화할 때에도 젊은 세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풍요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촬영하면서 단 한 번의 충돌도 없이 서로 존중하면서 작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맙단 말을 하고 싶다. 서로에게 시너지가 되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김성욱 영화가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을까에 대해 확신이 없지만 음악이나 자연은 가능한 것 같다. 15년 동안 계속 영화를 상영하고 있지만 영화가 관객에게 치유를 줄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극장에 들어와서 영화를 볼 때는 세상과 단절되기 때문에 그 경험이 관객을 다른 세계로 이끌어 여행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고민하던 자리에서 떠나면 고민을 조금 덜 하게 되듯이. <황제>는 음악이 훨씬 우위에 있는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민병훈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같이 나는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 비관적인 사람이다. 영화의 인물들이 사실 다 자살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런 걸 피하지 않고 얘기하고 싶었다. 영화에서 비겁하게 가고 싶지 않았다. 이 작품이 불편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에게 나름 해소의 역할을 하면 그게 치유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상태에선 최선을 다했다고 본다.

관객 2 김선욱 피아니스트와 함께 작업을 시작한 구체적인 과정이 궁금하다.

민병훈 김선욱 피아니스트의 연주회를 다녀오고 그 다음 주에 바로 만나서 얘기했다.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처음엔 거절하더니 영화를 만들고 싶은 이유를 이야기하자 그럼 한 번 해보자고 답하더라. 음악 영화이지만 김선욱에 대한 다큐도 아니고 클래식 음악 영화도 아니다, 이 영화가 음악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아파하는 분들에게, 또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치길 바란다고 얘기했었다. 출연료도 없이 함께 작업해 줬고, 나중에는 함께하길 잘한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김성욱 앞으로 여러 기회를 통해서 <황제>가 계속 소개될 거라고 알고 있다. 혹시 기획하고 있는 다른 프로젝트가 있으면 말해 달라. 

민병훈 이 이후에 만들 작품으로 두 가지 프로젝트가 있다. 하나는 뉴욕, 파리, 베이징에서 촬영할 ‘약속’ 시리즈. 아마 약속 시리즈가 마지막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이걸 진행하는 도중 여러 영화들을 계속 찍을 예정인데 일단 ‘아티스트’ 시리즈가 이어서 나올 거다. 아티스트 시리즈는 지금 네 분을 생각하고 있는데 아직 그분들은 모른다. 섭외가 잘 되려면 일단 <황제>를 많은 분들이 보아야 한다. 


일시 12월 16일(토) 오후 2시 30분

정리 황선경 관객에디터

사진 하수정 홍보팀장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