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리는 오늘도]



“나의 얘기를 하고 싶었다”

- <여배우는 오늘도> 상영 후 문소리 감독과의 대화





장영엽(『씨네21』기자) 최근 영화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마치 유행어처럼 ‘기자님은 오늘도…’, ‘팀장님은 오늘도…’ 이런 말을 쓴다. 오늘 본 <여배우는 오늘도>는 여배우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여배우’ 대신 각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넣어도 무리가 없다. 그만큼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임순례 감독은 최근 문소리 감독에 대해 “연기도 잘하고 연출도 잘하면 반칙이다”라고 하더라.


문소리(감독) 세상이 그렇게 공평하지 않다(웃음).


장영엽 오늘은 문소리 감독이 직접 인상적인 장면 세 개를 뽑아주었다. 먼저 기본적인 질문을 한 다음 그 장면들을 보며 이야기하겠다. 이 영화는 원래 세 개의 단편으로 시작한 걸로 알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장편 개봉 프로젝트로 진행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문소리 세 편의 단편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다 같이 묶어서 상영한 적이 있다. 그때 이 단편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완결성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배우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우리들 이야기네요’란 반응을 들으며 용기도 좀 얻었다. 단편을 극장에서 개봉해 한국 영화의 다양성에 기여를 해보자, 이런 생각은 너무 거창하고(웃음), ‘뭐 어때? 해볼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 영진위의 2017년 저예산 영화 개봉 지원을 받아 여기까지 왔다. 작은 규모로 개봉 중이다.


장영엽 엄청난 GV 릴레이를 하고 있다. 여러 배우들이 게스트로 참여하는 것에 관객들의 반응도 뜨겁다. 이 영화를 본 다른 배우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문소리 많은 분들이 ‘백만 번도 더 겪은 일이다, 아우 그럼’ 이런 반응을 보여주셨다(웃음). 만약 ‘남배우는 오늘도’였으면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을지 궁금해하기도 하더라. 아나운서, 간호사, 유치원 선생님 등 살면서 직업인이면서 딸이자 엄마 등 동시에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한국 여성들의 삶에 대한 공감을 보여주셨다. 심상정 의원도 ‘심상정은 오늘도’를 만들어야 한다며, 완전 자기 이야기라고 많이 이야기하더라.


장영엽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가장 먼저 이 질문을 떠올릴 것 같다. 도대체 현실과 픽션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가.


문소리 며느리도 모른다(웃음). 사실 나도 모른다. 우리의 기억은 정확한 게 아니고 재구성된 것이다. 어떤 것은 강렬하고 길게 남지만 어떤 건 짧게 왜곡되어 남는다. 그런 기억을 다시 영화로 만들기 위해 각색을 하면 하나의 신에 얼마나 많은 왜곡이 들어갈까. 영화 안에 치과 의사랑 사진을 찍는 신이 있는데, 내가 여러 사람들과 사진을 찍은 100번도 넘는 기억이 하나의 신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실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소위 ‘팩트 체크’를 할 수 없다.

그런데 팩트보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느낀 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은 다 영화다. 실제 문소리가 나오고 실제 남편이 나오지만 전부 만들어진 것이다. 그걸 진짜처럼 보이게 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리고 그게 영화 만들기고, 그게 연기의 과정이라 생각했다. 전부 가짜인데 그걸 진짜로 믿게 하려고 온갖 가짜를 다 동원하지 않나. 가짜를 통해 진심을 전달하는 것. 그런 ‘놀이’가 영화 만들기이자 영화 보기가 아닐까.


장영엽 감독이 됐을 때 배우들에게 이것만은 보장해주고 싶다, 이건 꼭 지켜야겠다 생각한 부분이 있을 것 같다.


문소리 음... 돈은 좀 제대로 주고 싶다(관객 박수). 그런데 나도 사실 제대로 드린 것 같지는 않다. 적은 예산에 적은 회차로 찍다 보니 제대로 지급을 못 했다. 그리고 아역 배우와 작업을 할 때는 아동 연기자를 위한 조항, 법규 같은 것들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아이들한테 해서는 안 될 스케줄이나 촬영 환경이 보이면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나도 많이 노력했지만, 밤 12시에 재운 애를 새벽 4시 반에 다시 깨워서 연기를 시켰다. 비가 올 것 같아서 비 오기 전에 촬영을 해야 했다. 내 자식이면 이렇게 찍을까 싶을 정도로 미안했다.

그리고 인물의 등장도 중요하지만 퇴장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 인물이 영화 안에서 제대로 사라지지 않으면 그건 감독이 버리는 거라고 생각해 왔다. 조연이든 단역이든 그 사람의 삶의 무게는 똑같은 거다. 그 인격의 무게를 다 담아내지는 못할 망정 중간에 회피하거나 방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3막에 나오는 감독 아내가 담배 피우는 장면을 집어넣었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그런 마무리가 없었는데 촬영 전날 이 역할이 떠올랐다. 감독 아내 캐릭터가 단지 다른 배우들의 머리채를 잡으라고 만든 건 아니니 이 인물도 많은 역사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감정의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촬영 전날 담배 피우는 신 하나 찍자고 부산으로 오라고 했다. 4시간 걸려 서울에서 부산까지 오신 다음 담배 한 대 딱 멋있게 피우고 올라가셨다(웃음).


장영엽 이제 준비한 장면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첫 번째 고른 사진은 1부에 나온 장면이다.




문소리 일단 산이 나오는 장면을 하나 넣고 싶었다. 1막은 ‘산에 간다’는 아이디어로 시작했다. 그런데 다 찍고 보니 북한산이 너무 멋있게 찍힌 거다(웃음). 너무 의미를 부여한 장면 같아 보여서 일단 그 장면을 뺐다. 그런데 나중에 마침 이 안양의 삼성산 정상은 자동차 도로와 가깝다고 하더라. 정말로 차에서 내려서 조금만 걸어가니 저런 산 정상이 나왔다. 굉장히 높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게 높은 곳이 아니다(웃음). 산 정상에 올라가면 뭔가 대단한 걸 느낄 것 같지만 기대와 다를 수 있다, 그런 생각을 담고 싶었다.


장영엽 1막과 2, 3막의 촬영감독이 다르다.


문소리 1막의 시나리오를 썼더니 막걸리 마시면서 얘기하는 장면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같다고 하더라. 남녀가 눈빛 교환도 안 하는데 무슨 홍상수냐고 얘기했지만(웃음), 사람들이 자꾸 그런 말을 하더라. 박홍열 감독과 가볍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럼 제가 최대한 홍상수 감독스럽지 않게 찍어볼게요’라고 먼저 제안을 했다. 그래서 최대한 다르게 해보자고 했다.

2막과 3막을 찍을 때는 소위 ‘단편 영화’의 환경에서 만들려고 했다. 아시다시피 박홍열 감독은 홍상수 감독뿐 아니라 다른 영화 경력이 매우 많은 촬영감독이다. 그리고 많은 단편 영화들은 아직 상업영화에 데뷔하지 않은 분들이 주로 작업한다. 나도 <박하사탕> 전에 여러 단편 영화를 찍으며 새로운 동료도 사귀고 영화를 배웠던 기억이 있다. 그 경험이 지금도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도 그런 기회를 젊은 영화인들에게 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직 데뷔하지 않은 스태프 중 좋은 분을 만나 함께 진행했다. 그분이 최근 <우리들>로 장편 데뷔한 김지현 촬영감독이다.


장영엽 다음은 두 번째 장면이다. 3막의 장면이다.


문소리 이 장면은 일단 기술적으로 좀 아쉽다. 광량도 부족해서 벽에 화면이 제대로 비치는 것 같지 않다. 특히 벽지 무늬가 저렇게 도드라진다.

저 영상의 대부분은 연극 연출하는 이상우 선생님이 강원도에서 직접 촬영한 것들이다. 새벽 5시 30분에 저런 영상을 막 보내준다(웃음). 여기에 내가 헌팅 다니면서 직접 찍은 영상을 같이 편집해 만들었다. 저 안개 낀 갯벌도 내가 찍은 것이다. 거의 열흘 가까이 장례식장과 묘지 헌팅만 다녔는데 딸이 서해안 갯벌 체험을 하러 갔다가 ‘엄마도 왔으면 좋겠다’고 전화를 하더라. 그래서 혼자 부랴부랴 차를 몰고 서해안으로 갔다. 갈 때만 해도 ‘내가 지금 여기 갈 때가 아닌데’ 하면서 조급해했었다. 서해안에 도착했는데 안개가 너무 많이 꼈더라. 그렇게 안개 속에 혼자 있으니 묘한 감정이 생겼다. 사람들은 멀리 아른아른 보이고 쓰레기는 바닥에 굴러다니고, 이걸 찍어야겠다 싶어서 아이폰으로 바로 찍었다. 내가 아무리 머리를 써서 의도하고 계획을 짜도 삶이 내 앞에 보여주는 것 앞에 그냥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는 것 같다.


장영엽 3막은 앞의 1, 2막과는 조금 다른 정서를 갖고 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예술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감독 문소리’의 이야기가 더 드러난 것 같다.


문소리 2막까지 여배우가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나니 자연스럽게 ‘왜?’란 질문이 생기더라. 우리는 왜 그렇게, 무얼 위해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걸까. 명확한 답은 아니더라도 이 질문에 답하는 어떤 방향이나 지향이 있음을 얘기하고 싶었다. 그래야 이 이야기를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영엽 이제 세 번째 장면이다. 3막의 마지막 장면인 공동묘지 장면이다. 이 장면은 정말 묘하다. 지금까지 보통 바스트숏이나 클로즈업이 많았는데 예외적으로 롱숏이 나온다.




문소리 시나리오에는 장례식장 앞의 강으로 설정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곳을 찾고 보니 거긴 너무 그림 같아서 마치 ‘정답’ 같더라. 강도 흐르고 삶도 흐르는 느낌, 삶과 죽음의 강을 건너는 그런 느낌(웃음). 무슨 국어 시험 문제 같기도 하고, 단지 그림 예쁘다고 영화에 넣는 건 아닌 것 같더라. 그래서 다시 다른 곳을 찾기 시작했다.

일단 이 사람들이 외로워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함께 걸어가는 느낌이 있기를 바랐고, 그래서 묘지를 생각했다. 나는 여기 무덤에 묻힌 분들이 단순히 죽은 사람이 아니라 각자 하나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 많은 인생을 긁어 모아 영화를 만들고 배우는 저들의 삶을 가져와 연기를 한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분들과 함께 숏을 만들고 싶었다. 나는 이게 ‘떼숏’이라고 생각한다(웃음).

영화 속 공간은 부산에 있는 공원 묘지인데, 어릴 때부터 많이 봤던 곳이다. 이렇게 역사가 보이는 곳을 찾았다. 서울-경기 지역에 안 가본 묘지가 없을 정도로 찾아다녔는데 최근 만들어진 묘지는 너무 질서정연해서 데스크탑 컴퓨터가 300대 놓여있는 것 같더라. 오래된 묘지는 너무 산 중턱에 흩어져 있고. 그래서 이 무덤을 떠올리고 부산으로 가자고 했다. 처음에는 스태프들도 안 좋아했는데 막상 도착해서 보더니 다들 동의했다.

영화를 개봉하고 이렇게 GV를 여러 번 하면서 극장의 관객석 풍경이 무덤과 굉장히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웃음). 무덤 17번, 18번 이런 식으로. 내가 지금 이 경사로를 올라 뒷문으로 퇴장을 하면 영화 속 장면과 비슷한 그림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내게 극장의 이미지가 무의식 속에 이런 식으로 남아있는 건 아닐까 생각을 하고 있다.


관객 1 재밌게 봤는데 스트레스도 너무 많이 받았다(웃음). 사는 건 힘들고 나는 피해자지만 또 살아갈 수 있는 건 친구들과 이런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나를 죽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며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문소리 나만 생각하고 나만 들여다보면 답이 안 나온다. 많은 문제는 관계 안에서 풀리는 것 같다. 나, 나, 나 하고 살아가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심지어 더 고통스러워진다. 그런데 관계를 들여다보면 배우는 것도 있고 위로도 얻는다. 때로는 다른 사람과 싸우면서 새로운 힘을 얻기도 한다.


관객 2 1, 3막은 화면비가 16:9인데 2막만 시네마스코프다.


문소리 오늘 전문가들이 많이 오신 것 같다(웃음). 이렇게 묶어서 개봉을 할 생각이 없었다는 강력한 증거다. 2막을 찍을 때는 달리는 장면이 중요해서 시네마스코프를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2막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 간의 거리를 중점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가로로 넓은 화면에서 인물 사이의 거리감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네마스코프로 찍었다.

그렇게 촬영과 편집이 거의 끝난 다음 남편에게 보여주었더니 ‘무슨 생각으로 2.35:1로 찍었냐’고 묻더라. 사람들이 1막이랑 이어서 볼 텐데 통일을 해야 된다는 거다. 그래서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답했었다(웃음). 생각이 짧았던 거지.




관객 3 직접 캐스팅도 하셨을 텐데 캐스팅이나 오디션에서 어떤 기준을 갖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문소리 영화인들끼리 하는 얘기가 있다. 어떤 감독이 훌륭한 감독인지 판단하는 제일 쉬운 기준은 그 감독이 어떤 배우와 일하는지 보면 된다는 거다. 다시 말해 감독의 중요한 능력은 배우 캐스팅이다. 그렇다고 내가 좋은 감독이란 건 아니지만(웃음), 이번에 괜찮은 배우들이랑 많이 작업을 했다.

1막에는 비전문 배우랑 많이 작업했다. 배우와 배우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다 보니  비전문 배우를 많이 캐스팅했다. 그런데 2막에서부터는 이게 다큐가 아니라 ‘영화’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전문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이미 연기를 하는 분들이라서 특별한 연기 오디션을 보지는 않았다. 대신 잠깐 나오는 분들이라도 5분 이상 평범한 대화를 나누며 ‘실제 느낌’을 보려고 했다.


관객 4 보통 TV나 영화에는 20대 여성 아니면 노인 여성들만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배우들이 나와서 좋았다.


문소리 그래서 이 영화를 만들 때 내 작품의 별명이 ‘중년 단편’이었다(웃음). 특히 단편 영화에는 중년 남성도 많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내 주변에서 제일 평범하게 사는 편이다. 직업만 영화배우일 뿐이지 삼십 대 중반에 결혼해서 애도 있고 어른들을 모시고 살아간다. 그런데 내 주위에는 정말 다양하게 사는 친구들이 많다. 그 친구들이 ‘우리 얘기’가 담긴 영화가 없다고 말한다. 차이밍량이 ‘세계를 걱정하면 상업영화고 자기를 걱정하면 예술영화’라는 귀여운 얘기를 했다고 한다. 우리도 그런 얘기를 했다. 왜 이렇게 영화들이 우주를 걱정하고 세계를 걱정하냐고. 그냥 각자 걱정하는 영화를 만들자는 말을 했다. ‘우리의 걱은 사소한 건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그냥 우리의 얘기, 나의 얘기를 하고 싶어졌다.


장영엽 마지막 이야기를 듣고 오늘 자리를 마칠까 한다.


문소리 많은 극장에서 GV를 했는데 서울아트시네마는 서울아트시네마의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오늘 많은 얘기를 했는데 사실 내가 뭐라고 얘기했든 별 상관 없다. 여러분이 본 느낌 그대로가 좋다고 생각한다. 음… 앞으로도 나 역시 좋은 영화의 좋은 관객이 되도록 노력하고, 그런 인생을 즐기고 싶다. 그러면 여기서 더 자주 여러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시 9월 29일(금) <여배우는 오늘도> 상영 후

정리 김보년 프로그램팀

사진 이정훈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이마무라 쇼헤이 회고전]



“이마무라 쇼헤이의 세계”





김성욱(프로그램 디렉터) 이마무라 쇼헤이 회고전을 기획하면서 덴간 다이스케 감독을 초청했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아들이기도 한 덴간 다이스케 감독은 <우나기>의 시나리오에도 참여한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이며, 현재 일본영화학교의 학장이기도 하다. 먼저 이마무라 쇼헤이에 대한 덴간 다이스케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덴간 다이스케(감독)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에 저항감이 있어 그동안 얘기한 적이 거의 없었다. 나는 오늘 상영한 <우나기>의 각본 작업에 참가했었다. 아버지와는 네 편의 영화에서 각본 작업을 함께했다. 작업을 할 때는 부자 사이라기보다는 각본가와 감독의 관계에서 격렬하게 싸우기도 했다. <우나기>는 원작소설을 가지고 있는데, 소설과는 이야기가 약간 다르다. 원작은 밤에 장어를 잡고 낮에 장어구이집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런 설정으로는 제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발소로 설정을 바꿨다. 각본을 쓰다가 아버지와 영화의 방향성에 대해 심한 대립이 일어났다. 절반 정도 각본을 쓴 시점에서 나는 빠졌었다. 결국 이후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이 썼고, 각본이 다 완성된 시점에 한 번 읽어봐 달라고 연락이 왔다. 재미없는 부분이나 안 풀렸던 부분이 있으니 읽고 수정해달라고 했다.

이 영화는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 유럽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일본에서도 비교적 흥행에 성공했다. 한국에서도 일본 영화로서는 꽤 이른 시기에 개봉했던 걸로 안다. 만약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를 <우나기>로 처음 접한 분들이라면 그의 다른 작품을 보고 놀랄 수도 있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하나의 스타일을 고수하지 않았고 시대마다 변화했다.



이마무라 쇼헤이 작품들의 공통점

그 작업들을 관통하는 공통점 몇 개가 있는데, 그 공통분모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많이 언급되는 것으로 첫 번째는 섹스 묘사가 항상 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 영화를 볼 수가 없었다. “네 아버지는 에로 영화만 찍는다”며 주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처음 아버지 영화를 극장에서 봤는데, 일반적인 포르노와는 다른, 솔직히 보고 싶지 않은 영화였다.

두 번째 큰 특징은 차별받는 사람이나 범죄자, 아웃사이더들이 주로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는 일본인이 어떤 종교관과 사고관을 가지고 그동안 살아왔는지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조주의적 접근이 작품 중심에 있다. 섹스의 문제나 소외자의 문제는 사회나 인간 심리의 큰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요소로 들어가 있다. 아버지의 전체 필모그래피의 중반쯤 되는 지점에서부터는 일본의 신화를 모티프로 해서 구조주의적인 영화를 만들게 된다. 대표적으로 <신들의 깊은 욕망>이 있다. 또 한편으로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여러 사건에 관심을 가졌고, 그들을 리얼하게 묘사하려 했다. 그 시기에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다큐멘터리를 찍고 리얼리티를 추구하다 보니 배우의 연기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질 때도 있었고, 그래서 다큐멘터리의 기법을 극영화에 활용한 작업도 있었다. 오늘 <우나기>도 그렇지만 말년의 작품들은 오히려 연극적인 연기를 표현한다.


영화 작업을 하며 아버지가 겪은 갈등들은 굉장히 흥미롭다. 모든 영화가 다 재미있지만 상업적인 영화는 한 편도 없다. 그래서 계속해서 가난해졌고, 영화를 찍을 때마다 빚이 늘어났다. 더 이상 도쿄에서는 살 수 없어서 시골로 이사했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유머다. 어떤 작품을 보더라도 유머가 있다. 무거운 희극이라고 해서 본인의 영화를 ‘중(重)희극’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인생, 세상, 역사가 희극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상황이 희극적으로 느껴졌다는 아버지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정말 에피소드가 풍부했던 사람이다. 그중 하나는 빚에 쫓기면서 시골에서 살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아버지가 마을을 걸어가다가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뭔가 하고 봤더니 범죄의 현장 검증이었다. 범죄자가 아닌 사람이 살인 누명을 쓴 거였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서 양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그 현장으로 돌아갔다. 현장에 경찰관도 많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수고하십니다”라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안으로 들어갔고, 정말 흥미진진하게 현장 검증을 보고 들었다. 그러다 결국 관계자가 아닌 걸 들켜서 쫓겨났는데, 쫓겨난 다음에도 다시 한 바퀴 돌아서 부엌으로 이어지는 뒷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 집안 식구와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잡담을 나누고 있는 곳에 능청스럽게 끼어들어서 현장 검증하는 얘기를 계속 들었다. 어떤 게 궁금할 때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분이다. 이런 일화들은 정말 많다. 나는 아버지가 영화에서 소외자를 다룬 것도 처음부터 사회적, 사상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싶은 것에 대한 호기심에 먼저 충실했던 결과라고 생각한다.

아버지 영화에는 반미적인 특성도 있다. 아버지는 청년 시절에 전쟁을 겪었고, 일본이 전쟁에 패하는 걸 목격했다. 군국주의 청년은 아니었고 그것에 비판적인 청년이었지만, 패전을 하고 일본이 미국에 지배를 당하는 걸 보게 된다. 전쟁에 패한 남자들은 풀이 꺾여서 일본으로 돌아오는데, 오히려 여성들은 미군을 상대하면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면이 있었다. 그런 풍경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돼지와 군함>이나 <붉은 살의> 같은 영화가 그러한 영향을 보여준다.

김홍준(감독) 이마무라 쇼헤이의 회고전이긴 하지만, 덴간 다이스케 감독님도 처음 한국을 방문했으니 감독님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다. 덴간 다이스케 감독님은 영화 연출자이자 시나리오 작가, 교육자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무슨 작업을 했는지 궁금하다. 또 일본영화대학이 이마무라 쇼헤이 영화학교의 발전한 형태라고 알고 있는데, 학교에 대해서도 소개를 부탁한다.

덴간 다이스케 요즘에는 연극을 몇 편 연출했다. 일본에서는 ‘자주영화’라고 표현하는데, 작은 예산을 가지고 만드는 독립영화를 직접 제작해서 일반 극장이 아닌 곳에서 상영회를 갖는 활동을 몇 년 전부터 해오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가 만들었던 일본영화학교가 발전되어 일본영화대학이 됐다. 처음에는 전문학교였는데 지금은 대학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현재 일본에는 이 학교 출신의 스탭이 없는 현장은 없다고 봐도 될 정도다.

김홍준 필모그래피를 보면 하야시 가이조, 미이케 다카시 감독과 시나리오 작업도 많이 같이 했다.

덴간 다이스케 미이케 다카시 감독은 일본영화학교 출신이다. 하야시 가이조 감독은 다른 곳에서 만난 분이다. 나는 영화학교 출신은 아니다. 저예산 영화를 만들다가 하야시 감독을 알게 됐고, 입봉하게 된 후에는 여러 감독을 만나 공동 작업을 했다. 미이케 다카시 감독은 이마무라 쇼헤이 촬영팀의 조감독 막내로 일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알게 됐다.


김홍준 <우나기>는 1983년의 <나라야마 부시코>에 이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탔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일본의 영화감독 중 유일하게 황금종려상을 두 번 수상한 감독이다. 일본에서 소위 ‘국민 감독’의 칭호를 얻는다거나 국가적 지원을 받을 법도 한데, 아까 빈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나기> 이후 제작 환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덴간 다이스케 상을 받은 직후에는 돈이 잘 모인다. 그런데 차기작에서 또 실패하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다시 마이너스로 출발해야 한다. 해외에서 젊었을 때부터 평가를 많이 받았던 감독들과 달리 이마무라 쇼헤이는 그렇지 않았다. 이를테면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일찍부터 유럽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아버지는 “오시마 나기사는 사무라이고 나는 백성이기 때문에 안 되는 거다”라고 말씀하셨다.

칸영화제에 <나라야마 부시코>가 초대받았을 때 오시마 나기사의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도 함께 초대받았다. 당시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 팀에서는 데이빗 보위, 사카모토 류이치와 함께 성대한 파티가 이어졌고, 오시마 나기사가 수상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한편으로 <나라야마 부시코>의 파티는 프랑스인이 알 리 없는 사카모토 스미코라는 여배우가 노래를 부르는, 조촐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분위기가 좋게 작용한 것 같다. 인지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나타난 일본 감독이 호기심을 자극한 게 아닌가 싶다. 왜 <우나기>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김홍준 여담인데 나도 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1997년 칸영화제에 갔었다. 그해 칸영화제의 후일담 중 하나는 올해 최고의 파티가 <우나기> 팀이었다는 얘기다. 메인 메뉴로 장어구이가 나왔다(웃음).



관객 1 이마무라 쇼헤이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다 보면 한국에 대한 언급이 종종 있다. ‘조선’, 또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하다.

덴간 다이스케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들을 만나면서 그분들에 대한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학생일 때도 “오늘 한국의 영화감독과 술을 마시면서 얘기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도 한국 영화감독과 교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앞서 이야기했던 현장 검증 에피소드의 누명을 쓴 사람도 재일한국인이었다.

관객 2 영화의 이미지나 인물의 동선이 다층적인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퍼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혹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수학이나 수에 대해 관심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

덴간 다이스케 아버지는 “각본은 수학적으로 써야 한다. 논리가 중요하다. 그렇지만 너무 지나치게 균형이 있는 건 좋은 시나리오가 아니다”라고 말씀을 하셨었다.

관객 3 한국영화 중 <2009 로스트 메모리즈>라는 영화에 이마무라 쇼헤이가 단역으로 출연했었는데, 어떤 경로로 출연했는지 궁금하다.

덴간 다이스케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그 감독님이 아버지 영화의 팬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출연하신 것으로 안다.

관객 4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오즈 야스지로의 조감독을 맡았던 적이 있는 걸로 안다. 평상시에 오즈 야스지로 감독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시곤 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배우들과의 관계가 어땠는지도 궁금하다.

덴간 다이스케 아버지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을 존경했다. 스타일은 전혀 달랐다. 젊을 때는 반발도 있었다. 오즈 야스지로는 테이크를 반복하면서 거듭 다시 찍는 스타일인데, 그러다 보면 배우들이 가지고 있던 생생함이 사라지고 나중에는 좀비처럼 된다. 때문에 아버지는 오즈 야스지로의 그런 방식에 대해 동의하지 못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지금 생각해 보면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정말 대단했다”라고 말씀하셨다.

연기 연출에 있어 아버지는 구체적인 지시 없이 대략적인 느낌을 던지고 본인이 원하는 것이 나오도록 기다리는 타입이었다.

관객 5 <우나기>를 보면서 일반적인 기승전결이 아니라 연대기적 서사라고 느꼈다. <우나기>는 원작이 있는데, 어떤 부분에 초점을 두고 각색하셨는지.

덴간 다이스케 클라이막스를 향해 가는 근대극적인 방식은 아버지가 쇼치쿠 소속이었을 때 주로 사용했었다. 하지만 독립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고 나서는 이전까지 자신이 해왔던 것에서 벗어나려 하는, 균형을 깨려는 싸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우나기>는 기존의 ‘균형 잡힌’ 대본이라고 생각한다. 근대극적인 방식을 어느 정도 즐기면서 만든 작업이 <우나기>가 아닌가 싶다. <우나기>를 만들 당시에는 이미 연세도 있었고, 개성이 굉장히 강한 감독이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디렉션은 없었다. 선문답 같은 막연한 얘기를 하면 그걸 가지고 ‘이런 뜻이겠지’ 추측하며 작업했다.



 

관객 6 영화에서 이발소가 중요한 장소로 나온다. 각색된 설정인데, 이발소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덴간 다이스케 형무소에서 재소자들은 몇 가지 직업 훈련을 받는데, 실제로 수감자들이 출소한 다음 가장 많이 선택하는 직업이 이발사다. 이발소가 리얼리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발소라는 공간이 갖는 분위기도 매력적이었다. 이발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모이고 이야기를 나눈다. 일본에는 ‘이발소 담화’라는 말도 있다. 매일 머리를 자르는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여드는 장소로 이발소가 매력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관객 7 이마무라 감독의 작품을 보면 아버지와 자식의 대립, 혹은 아버지가 없는 자식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다.

덴간 다이스케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은 구조적으로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를 다룰 때 도식적으로 잘 활용된다. 종교나 전쟁을 다룰 때에도 아버지와 아들의 구조가 활용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할아버지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김홍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주변부 인물에 대한 작업을 꾸준히 했다. 이런 작품 세계가 오늘날의 일본영화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궁금하다.

덴간 다이스케 정신적인 영향을 받은 분들은 많을 거다. 학교에서 배운 제자들도 많다. 이마무라 쇼헤이를 전혀 모르는 젊은 감독들도 아버지의 작품을 보고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을 거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믿는 길을 걸어간 분이다. 현재 일본영화계에도 자신의 길을 믿으며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김홍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를 지금 서울에서 본다는 건 오늘날의 한국영화들, 그리고 그 한국영화들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현실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오늘 자리에 대한 감독님의 소감을 듣고 마치겠다.

덴간 다이스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작품을 이렇게 많이 상영하는 기회는 일본에서도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평생을 두고 재밌는 영화를 만드는 걸 추구했던 분이다. 시대에 따라서 연출 방식이 완전히 바뀔 때도 있었지만 모두 그때그때 성실하게 만들었던 작업들이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를 오늘 처음 보시는 분들도 많을 텐데 영화에서 많은 것을 느끼면 좋겠다.


일시 9월 9일(토) 오후 5시 <우나기> 상영 후

정리 황선경 관객에디터

사진 주민규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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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에르 멜빌 탄생 100주년 회고전]



이상한 행운

- <도박꾼 밥>



<도박꾼 밥>(1956)을 보고 이 영화의 마지막 10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멜빌의 첫 번째 본격 범죄 영화인 이 작품은 멜빌이 이후 즐겨 선택한 테마를 잘 보여준다. 한때 잘 나갔지만 지금은 옛 영광을 추억하며 도박으로 살아가는 밥은 거액의 현금이 들어 있는 카지노의 금고털이를 기획한다. 그러나 젊고 경력 없는 부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생각이 짧은 미모의 여인은 작전을 방해한다. 게다가 그의 적도 밥의 앞을 막아서고, 오래된 ‘친구’인 경찰도 밥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이처럼 장애물이 많지만 밥은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밥은 아마 작전에 실패하고 비극을 맞을 것이다. 사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전개이며, 특히 장 피에르 멜빌의 세계에서 이런 실패는 자주 등장한다. 알다시피 멜빌의 주인공들이 비극을 맞는 건 드문 경우가 아니다. 이때 중요한 건 주인공은 자신의 마지막 운명을 모르지만 관객인 우리는 그 결말을 일찌감치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멜빌이 만드는 비극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그러나 멜빌만의 특징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멜빌은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이 걷고 있는 내리막길을 멀리서 오래도록 바라보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이 느끼는 안쓰러움도 갈수록 커져가고,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운명을 뒤늦게 알아챈 주인공이 삶의 비애를 느낄 때에는 그 슬픔이 최고조에 다다른다. 여기서 방점은 ‘뒤늦게’이다. 멜빌은 강력한 슬픔을 한순간에 터뜨리기보다는 그 슬픔을 길게 늘여서 오래도록 보여주는 걸 더 선호한다. 멜빌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유독 ‘분위기’, ‘무드’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는 주인공과 관객이 슬픔에 서서히 젖어들게 만든다.


그런데 이런 맥락에서 <도박꾼 밥>의 마지막 도박 시퀀스를 다시 떠올려보면 멜빌의 영화에서 조금 예외적인 장면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멜빌의 특징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밥은 몇 시간 뒤에 동료들과 함께 카지노의 금고를 털 계획이다. 이를 위해 밥은 미리 카지노에 도착해 분위기를 살피고, 그동안 룰렛과 카드 게임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한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운이 좋은 밥이 거액의 돈을 따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그 돈은 전부 밥이 훔칠 돈이지만, 밥은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도박에 열중한다. 영화는 이 단순한, 그러나 이상한 행위를 거의 10분 동안 특별한 대사도 없이 보여주며 관객이 삶의 아이러니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유도한다. 조금 후 많은 돈을 훔치려는 주인공이 합법적인 행위를 통해 그 돈을 먼저 가져가는 상황(밥은 이제 굳이 카지노를 털 필요도 없다!), 또는 가장 이상한 순간에 주인공을 찾아온 뒤늦은 행운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여기에는 어쩔 수 없이 약간의 비뚤어진, 또는 허탈한 웃음이 동반되며, 이는 경찰에 붙잡힌 밥의 대사에서 더 도드라진다. 그는 자신이 도박에서 딴 돈을 지키고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방금 카지노에서 받은 돈으로 비싼 변호사를 고용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감독의 짓궂음까지 느껴지는 이 상황과 대사 앞에서 관객은 마음껏 슬퍼할 수도, 그렇다고 마냥 재미있어할 수도 없다. 등장인물에 대한 깊은 감정이입을 방해하는 이와 같은 기묘한 아이러니와 유머는 멜빌의 영화에서 쉽게 만나기 힘든 순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주인공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운명의 얄궂은 개입은 멜빌의 특징적 요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깔끔하게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복잡한 요소들을 끌어안고 있는 <도박꾼 밥>의 결말은 멜빌의 범죄 영화를 감싼 비극적 분위기의 정체를 고민할 때 좋은 참조점이 될 것이다.



김보년 프로그램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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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에르 멜빌 탄생 100주년 회고전]



시대착오적 인물들의 마지막 통찰

- <암흑가의 세 사람>


고다르는 카메라의 두 가지 용도를 거론하면서 지질학자의 영화와 맹인의 영화에 대해 언급한다. 고다르의 진단은 카메라의 재현이라는 쟁점과 관련한 것이지만 그가 말한 두 가지 원리는 영화 내부의 서사와 형식에서도 발견되곤 한다. 먼저 주인공을 둘러싼 현상을 응시하고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발생했는지 되묻는 지질학자의 영화가 있다. 이들은 사건의 인과 관계와 흔적에 새겨진 지층의 역사에 몰두하면서 카메라에 부여된 탐사의 힘을 강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태의 진원지로 시선을 돌리고 세계의 작동 원리를 가늠하며 그러한 원리를 쫓아가는 과정에 온전히 몸을 내맡기는 영화의 양식을 다른 말로는 성찰의 로드무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일찌감치 호러영화의 서사적 관습으로 자리매김한 구조이기도 하며(가령, 눈에 보이지 않는 악령과 저주의 역사를 탐색하는 영화들) 전후의 할리우드가 발전시킨 멜로와 필름 누아르에서도 목격할 수 있는 장르의 성질이다. 문제를 인식하고 성찰의 길목에 섰을 때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 통찰을 얻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필름 누아르의 인물들은 거리 한복판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다른 한편엔 맹인의 영화가 있다. ‘고다르의 자화상’으로도 알려진 <JLG/JLG>(1994)에는 눈먼 편집기사를 고용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이를 통해 고다르는 영화에 감도는 비가시성에 대해 질문한다. 대상을 보여주는 매체인 영화에도 볼 수 없는 것과 보지 않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질문에 맹인의 영화의 논제가 있다. 이 부류에 해당하는 영화의 인물들은 세계의 규칙과 마주하지 않는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거대한 흐름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고작해야 눈앞에 있는 것을 볼 뿐이거나 아예 본다는 행위마저 박탈당하곤 한다.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보는 상태로의 전환을 긍정적으로 수긍하는 서사적 기획은 이 유형에 포함되지 않는다(최근 천만 관객을 모은 <택시운전사>가 이런 예시에 해당한다). 맹인의 영화란 자신들의 삶을 이루는 세계의 구조를 직면하기 힘든 자들의 소외와 맹목을 드러내거나 보편적인 응시의 체계가 아닌 다른 방식의 ‘보기’를 모색하려는 영화다. 눈이 멀었음에도 두 손으로 편집 작업을 하는 <JLG/JLG>의 맹인 편집기사처럼 말이다.




장 피에르 멜빌의 <암흑가의 세 사람>은 후자의 구조를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 명의 범죄자와 한 명의 형사, 그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지만, 정작 그들은 자기 삶의 흐름에 무지하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제시되는 라마크리슈나의 잠언대로 “그들은 피할 수 없이 붉은 원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출소 직후 옛 동료의 돈을 훔친 코레는 뜬금없게도 당구장을 찾는다. 그가 세 개의 공을 놓고 당구를 치는 모습을 카메라는 부감 숏으로 내려다본다. 그 무심한 응시는 당구대 위에 놓인 존재들의 처지를 차갑게 암시한다. 동선은 복잡하고 치밀하지만, 출구는 없으며 도착지는 결정되어 있다. 세 범죄자의 경로도 마찬가지다. 이제 곧 코레를 따라온 추격자들이 들이닥칠 것이고, 예정된 범죄 행각과 도주와 전락이 시작될 것이다. <암흑가의 세 사람>에서 인간은 요동치고 뒤섞이는 당구공이다. 마지막 시퀀스에 이르러 최후의 거래를 치르기 위해 숲속의 별장에 도착한 코레가 실내에 배치된 당구대를 매만질 때, 그는 그 사각의 닫힌 공간에 그려진 자신의 운명을 뒤늦게 자각하면서도 파국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암흑가의 세 사람>에 사진 혹은 사진적 이미지에 대한 부정이 드리워져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탈주한 범죄자 보젤과 함께 예전에 살던 집을 찾은 코레는 액자에 담긴 옛 애인의 사진을 버린다. 그의 몸짓에는 과거의 상처와 역사에 대한 단절의 의지가 새겨져 있다. 그것은 되돌아갈 수 없는 기억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현재형의 상태이다. 코레가 문 앞에서 옛 애인과 대면하기를 회피하고, 마테이 경감의 책상에 놓인 액자 속의 여인이 누구인지 설명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이런 점에서 형사와 범죄자는 은근히 공명한다). 카메라는 오직 인물들이 수행하는 곧 사라지게 될 일회성의 감각을 주시할 뿐이다. 이러한 시선이 <암흑가의 세 사람>의 숙명적인 비극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든다.




부정과 단절의 정조로 형성되는 사진적 이미지를 대리하는 것은 영화를 연상케 하는 장치들이다. 저격수 장센은 총을 삼각대 위에 올려두고 표적을 향해 탄환을 발사(Shoot)한다. 보석상의 감시카메라는 영사기의 소음과 유사한 음향을 내면서 이들의 강탈을 기록한다. 범죄라는 일회적인 체험의 현장성과 영화 매체의 특질이 맞물리는 것이다. 영화에 대한 느슨한 은유로 작동하는 그 장치들은 또한 원형의 모습을 띠는 사물이기도 하다. 총구의 둥근 시야, 빙글빙글 돌아가는 테이프의 움직임이 이를 나타낸다. 원형의 범람은 인물들의 운명을 표상하던 당구공의 외형을 환기하며 그것이 어느새 이들을 포괄하는 환경으로 전이되었음을 보여준다. 세 범죄자가 벌이는 정교한 강도행각의 표면을 은밀히 둘러싸고 있는 것은 이러한 원의 폐쇄적 순환 운동이다.


코레와 보젤과 장센, 그들은 주어진 운명을 묵묵히 수용한다. 이것이 <암흑가의 세 사람>을 맹인의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이다. 그런데 멜빌은 맹목적 응시의 상태에서 영화를 끝맺지 않는다. <암흑가의 세 사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범죄자들의 최후가 아닌 마테이 경감의 시선과 걸음이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최종적인 거래를 치를 때 그는 맹인처럼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모든 것과 관계 맺은 자인 그는 도둑들의 추레한 말로를 지켜본 후 “모든 인간은 유죄”라는 감사관의 충고를 듣는다. 그리고는 차마 무언가를 똑바로 응시하지도, 한곳에 멈춰서지도 않은 채 천천히 걷는다. 사소하고 미약하지만, 그것은 비로소 폐쇄적으로 순환하는 세계의 원리를 확인한 자의 수직 이동이다. 맹인의 눈으로 시작한 영화의 응시가 성찰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전환의 순간이 이 마지막 장면에 담겨 있다. <암흑가의 세 사람>이 감동적이라면, 단순히 시대착오적 인물들의 삶을 영화에 되살려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인간의 시선이 어떻게 통찰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치열하게 숙고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김병규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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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 장 피에르 멜빌 회고전]



또다른 레지스탕스



1947년, 장 피에르 멜빌은 파리 13구 주택가의 삼층 저택을 개조해 즈네(Jenner)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촬영소는 물론이고 두 개의 사운드 스테이지와 편집실, 의상실과 시사실, 자료와 서적, 재즈를 중심으로 한 방대한 레코드 콜렉션을 구비한, 당시로서는 감독 개인이 소유한 유일한 스튜디오였다. <바다의 침묵>(1949)을 시작으로 <도박꾼 밥>(1956)과 <맨해튼의 두 사람>(1959)을 멜빌이 독립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물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독립성을 위해서는 창조적 아이디어뿐 아니라 빌딩과 물질이 필요하다. 즈네 스튜디오에서 멜빌은 자신의 영화뿐 아니라 타 영화 제작에 스튜디오를 임대해 주었고 - 샤브롤의 초기작과 자크 베케르의 유작 <구멍>(1960)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 촬영에 들어가지 않을 때는 인근 극장에서 필름을 구해와 시사실에서 매일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고 한다. 스튜디오는 취미와 작업이 일체화된 공간으로, 제작자의 주문에 구애받을 필요 없이 자신이 찍고 싶은 작품을 고집스럽게, 장인의 수법 그대로 제작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멜빌이 스튜디오 중심의 고전적 방식만을 고수했던 작가는 아니었다. 뉴욕에서 독립적인 방식으로 제작한 <맨해튼의 두 사람>은 이미 누벨바그 영화의 미학을 선취한 작품이었다. 이 영화에는 멜빌 영화를 특징짓는 사전의 치밀한 계산도, 정교한 영상 표현도, 완성도도 부족해 보인다. 아니, 무언가가 결여돼 있다기보다 그 반대로 자유분방한 터치를 추구한 영화다. 프랑수와 트뤼포의 데뷔작이 파리에서, 동시에 존 카사베츠의 데뷔작 <그림자들>(1959)이 자유롭게 촬영되고 있던 때에 멜빌은 시네마베리테의 스타일에 B영화의 터치로 뉴욕에서 영화를 완성했다. 유엔 총회에서 프랑스 수석대표가 실종되자 그 이유를 찾기 위해 프랑스 통신사 기자와 카메라맨이 맨해튼의 밤을 떠돌아다니는 하룻밤 동안의 이야기다. 멜빌은 영화의 감독, 각본, 그리고 뉴욕의 촬영도 맡았지만 통신사 기자 역도 직접 연기했다.



맨해튼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멜빌의 눈에 드러나는 것은 과거 레지스탕스 전설과의 조우로, 여기에는 그의 과거 경력과 삶의 동력이 숨어 있다. 멜빌은 1937년에 군 복무를 했고, 1940년 덩케르크의 철수 작전 후에 프랑스군의 일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 전쟁과 레지스탕스는 멜빌의 삶과 영화에서 중요했고, <맨해튼의 두 남자>는 그런 레지스탕스의 대중적 신화를 재고하는 것으로,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떠올리게 한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멜빌은 이 영화 이후로 자신을 배반하지 않으면서 대중적인 상업 영화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한다. 1967년 즈네 스튜디오가 화재로 소실되면서 이 방향은 더 분명해졌다. 시스템의 바깥에서 모든 제약 없이 법적 허가를 얻지 않고 영화적 문법을 무시하며 특유의 레지스탕스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던 작가가 이제 소수파의 영화광에만 알려진 전설로 남지 않겠다며 누벨바그와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이는 스스로 전설을 지우면서 세상의 경멸을 인내하는, 어쩌면 전보다 더 어려운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2004년의 첫 회고전에 이어 탄생 백 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장 피에르 멜빌 전작 회고전에서 암흑영화의 고독과 만나기를 기대한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암흑의 고독 - 탄생 100주년 장 피에르 멜빌 회고전"

기간│2017년 10월 25일(수) ~ 11월 12일(일)

주최│(사)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후원│영화진흥위원회, 서울시, 서울영상위원회, 주한프랑스대사관, 주한프랑스문화원, 합동영화(주)서울극장

상영작 편수│총 15편

문의│02-741-9782 / www.cinematheque.seoul.kr

관람료│일반 8,000원, 청소년/경로/단체/장애인 6,000원, 관객회원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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