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마스 앤더슨 35mm 필름 투어]


건들건들 느껴볼 것

- <인히어런트 바이스>

  

조연으로 출연한 조쉬 브롤린조차 처음 읽었을 때 “빌어먹을, 한 단어도 못 알아먹었다”고 토로한 바 있는 토머스 핀천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옮긴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가 안 간다고 불평하게 만들기에 딱 좋은 작품이다. 제법 이름 난 비평가인 조너선 롬니조차 『필름 코멘트』에 쓴 <팬텀 스레드>의 리뷰에서 이 전작을 언급하면서 지독히 두서없는 영화란 뜻에서 “차라리 인코히어런트 바이스(incoherent vice)라고 불러야 한다”며 비꼬았을 정도니 말이다.

이 영화를 멋지게 독해해내려는 시도는 무모한 도전으로 남겨지게 마련이다. 독해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 그 이상야릇한 무드에 다짜고짜 전염되어 볼 수밖에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립탐정 닥(호아킨 피닉스)이 뉴타운 지역의 매춘업소를 방문했다가 누명을 뒤집어쓰고 경찰에 붙잡혔을 때, 그 뒤에 펼쳐진 모래 언덕 위로 정체모를 사람들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대목이 있다. 이런 장면을 보고 뭐라고 콕 집어 해석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의도적으로 오묘하게 만들어진 장면 앞에서는 말보다 주인공과 함께 오묘한 기분에 빠져드는 편이 좋을 것이다. 혹은 파트너를 잃은 상처를 지닌 형사 ‘빅 풋’이 대놓고 초콜릿 ‘하드’를 쪽쪽 빨아대는 모습을 보고 어떤 진지한 ‘썰’을 늘어놓을 수 있을 텐가. 이 영화의 두서없는 흡입력 앞에서는 너무 난감해 말고 그냥 킥킥대며 빨려드는 태도가 필요한 것 같다.

물론 한편으로 생각하면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1970년대 미국 청년 세대를 짓누르고 또한 폭발시켰던 음모론, 편집증, 폭력주의와 반폭력주의, 리버럴리즘, 약물, 죄의식, 멜랑콜리, 분열증 등을 아주 노골적으로 상기시키며 끌어들이는 영화다. 그러니까 미국사의 한 시대를 형성한 사건들이나 사상들을 뒤적이면서 그럴싸한 말로 이 영화의 소위 ‘정체’에 대해 자못 엄숙한 태도로 몇 마디 정리된 말을 늘어놓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정리된 말은 토마스 핀천의 원작이나 폴 토머스 앤더슨의 각색에도 썩 어울리지 않는 리액션이다. 이 영화는 정리가 잘 되지 않는 상태로 즐겨야 한다.

말하자면 다른 한편으로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미국에 대한 사회 비평적 영화가 아니라 핀천의 원작에 대한 영화적 리액션이다. 그리고 이 영화적 리액션은 잘 조율된 불협화음으로 넘실거린다. 주인공을 압박해오는 힘들과 주인공을 이완시키는 힘들 사이의 모순, 파편화된 서사와 통합적 형식 사이의 긴장, 폴 토마스 앤더슨 초기에 자주 볼 수 있었던 다선적 구조와 그의 2000년대 영화들에 나타나기 시작한 미니멀한 구조 사이의 결탁, 필름에 대한 시대착오적 향수와 자본과 산업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 사이의 갈등 등, 불협화음은 영화 내외를 가로지르며 울려퍼지고 있다. 그러니 이로부터 일관된 결론을 도출하려 하지 말고, 남부 캘리포니아의 햇빛과 바람에, 마리화나 연기에 취한 기분으로 건들건들 느껴볼 것을 권한다. 


이후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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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마스 앤더슨 35mm 필름 투어]


말씀의 탄생

- <데어 윌 비 블러드>

 

1898년에 시작한 영화는 1927년 대공황의 시기에서 멈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라는 시대 배경은 역사적 맥락 외에 영화사적 맥락을 환기하는 측면이 있다. 말소리가 소거된 채 숨소리와 비명, 과잉된 음향으로 채워진 약 15분간의 도입부를 통해 영화는 무성영화를 인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초기 영화의 반향으로 영화를 읽을 때 두드러진 이미지가 있다. 시축 기계가 땅에 꽂히자 땅에서 석유가 흘러나오는 모양을 클로즈업한 숏은 어쩐지 몸속에서 피가 불거져 나오는 양상을 연상시킨다. 비유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검은 석유는 곧 흑백 영화의 검은 피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석유를 추출하는 것만큼이나 기계가 사람의 몸에 꽂히는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그곳에서 땅과 신체는 공동의 운명을 짊어진다.

땅과 신체 속을 흐르는 석유와 피는 그 자체로 서사의 흐름을 창출하는 두 요소다. 대니얼(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피붙이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지만 대니얼은 늘 혈연과 가족에 붙들린다. 이를 강제하는 건 석유에 관한 대니얼의 욕망이다. 그런데 혈연관계는 안정적인 기반이기보다는 늘 불안정함을 수반한다. 불안정은 혈연관계 대체자의 희생으로 드러난다. 대니얼이 공동체를 중시하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필요했던 어린 아들은 시축 중 발생한 가스 폭발 사고로 청력을 상실한다. 아들의 빈자리를 대체했던 동생 헨리는 거짓말이 발각되며 대니얼의 손에 죽는다. H.W.는 다시 아들의 자리로 돌아오나 관계는 끝내 파탄난다. 결국 욕망이 혈연을 요구하는 것은 와해와 파괴를 위해서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일련의 과정은 대니얼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가까우며, 교회는 운명에 순응하도록 마을 사람들을 통제한다. 일라이가 집전하는 교회는 석유의 통제 불가능한 힘에 맞서 사람들을 안정시키는 기능을 한다. 대니얼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그의 신은 교회에 있지 않다. 영화에서 첫 번째 등장하는 말인 대니얼의 대중에 대한 연설은 일라이의 교리 행위와 대구를 이룬다. 즉 그가 전도하는 신은 석유다. 영화는 대니얼의 말을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외화면에서 먼저 등장시키면서 그가 전지전능한 말씀의 담지자임을 은밀히 보여준다. 대니얼이 일라이의 축원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일라이의 행위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말로 사람들을 홀리는 것임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거짓이 거짓을 알아보듯, 그는 일라이의 교리 행위를 꿰뚫어 보고 그것을 ‘쇼’라고 비꼰다.

영화의 결말부, 늙은 집사와 함께 홀로 남은 대니얼을 찾아온 일라이는 사뭇 가족을 강조한다. H.W.가 일라이의 어린 동생과 혼인하면서 둘은 인척관계로 얽힌 것이다. 돈을 구걸하는 일라이에게 대니얼은 종교와 교리 부정을 요구하며 자신의 승리를 확정 짓고자 한다. 대니얼에 의한 일라이의 살해로 귀결되는 마지막 장면의 목적은 일라이에 대한 대니얼의 승리, 혹은 종교에 대한 자본의 승리가 아니다. 석유를 모두 갈취당한 메마른 땅처럼, 인간의 육체 역시 피와 땀을 송두리째 잡아 뽑힌 채 소진되었음을 이미지로 확증할 뿐이다. 영화에서 유정탑은 하나의 상징물처럼 교회 맞은편에서 활활 타는 스펙터클로 제시된다. 이 괴상한 신전은 새 시대를 예감하듯 보존과 유지가 아닌 파괴와 무너짐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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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마스 앤더슨 35mm 필름 투어]


사랑의 동선

- <펀치 드렁크 러브>


폴 토마스 앤더슨이 만든 장편 중 가장 짧은 결과물인 <펀치 드렁크 러브>는 90분 남짓한 러닝타임 동안 멈춤 없이 내달리는 영화다. 항공사에 전화를 걸어 행사 상품에 관해 문의하는 배리(아담 샌들러)의 모습으로 다짜고짜 시작하는 오프닝 시퀀스의 문이 열리면 카메라는 결코 후진하는 법 없이 인물의 동선을 따라 사방으로 질주한다. 날렵하지만 유려하고, 재빠르되 능수능란한 속도와 테크닉으로 곧장 결말에 도달해 버리는 이런 영화를 보고 덧붙일 말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저 배리라는 인물에 부여된 몇 가지 특수한 조건을 이야기하고 싶다. 

<펀치 드렁크 러브>가 멈춤 없이 내달린다는 말은 단지 비유적인 표현만은 아니다. 영화는 배리에게 안정적인 거주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집 안에서 그는 가족들의 파티를 망치거나, 어설프게 폰섹스를 시도하다 딘 일당에게 협박의 빌미를 제공하거나 한다. 심지어 은밀한 대화를 나누던 직업여성에게 집값을 요구받은 뒤로는 마치 실내로부터 추방되기라도 하듯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배리의 작업장 한가운데 어색하게 지어진 사무실 세트는 ‘내부’에 정착할 수 없는 배리의 상태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유리벽으로 구성된 사무실은 바깥에서 쏟아지는 빛과 소리에 별수 없이 노출되는 공간으로, 폐쇄 지향적이지만 외부의 영향에 끊임없이 휩싸이는 배리의 세계를 집약한다. 레나를 만나기 위해 하와이로 떠난 배리가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이나 그 유명한 키스 장면이 둘만의 애정을 나누는 내밀한 장소가 아니라 타인의 침범과 개방이 손쉽게 허용되는 공공장소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배리는 시종일관 가만히 있질 않는다. 전화를 받으면서도 연신 몸을 움직이기 마련이다. 이따금 뛰어다니기도 한다. 산만하게 이동하는 배리의 동선을 좇으며 카메라는 한 가지 특수한 공간적 감각을 제공한다. 영화의 도입부를 떠올려 보자. 시네마스코프 화면 구석엔 배리가 왜소하게 배치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엔 가로로 길게 늘어진 수평선이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배리가 작업실 밖으로 나오면 반대로 전경부터 후경까지 막힘없이 이어지는 거리의 수직적인 광경이 드러난다. 내부와 외부를 잇는 배리의 동선에 맞춰 수평선과 수직선이 매개하는 것이다. 이후로 영화가 진행되면서도 마트와 복도, 거리와 도로를 오가는 배리의 동선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건 수평과 수직이라는 움직임의 선이다.

그리고 이 수평과 수직의 매개가 도형을 이루는 최종적인 순간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하와이에서 만나기로 한 배리와 레나는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 카메라는 서로에게 다가가는 두 인물의 걸음을 정면에서 보여준다(‘수직선’). 사람들이 가로축으로 이동하는 평면과도 같은 배경 속에서 그들의 만남은 성사된다(‘수평선’). 마침내 서로에게 접촉하는 배리와 레나는 그림자의 형상으로 하나의 원형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배리와 레나의 로맨스는 이야기상으로는 도로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교통사고처럼 우발적인 것이지만, 움직임의 선을 중심에 두고 보자면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건축된 사랑의 동선을 가로지르며 이루어지는 운명적인 만남인 것이다. 


김병규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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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마스 앤더슨 35mm 필름 투어]



모자이크 없이 감상하자

- <부기 나이트>




 

<부기 나이트>의 국내 개봉(1999.3.20) 당시 엔딩 장면에서 더크 디글러(마크 월버그)의 성기를 모자이크 처리하게 한 공연윤리위원회(현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처사는 폭력이었다. 모든 영화가 대표작이자 마스터피스라고 할 수 있는 폴 토마스 앤더스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 <부기 나이트>(1997)는 제도권에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공동체를 형성해 유사 가족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밟는다. 제도권의 상식은 종종 보기 좋은 것을 상수에 두고 그렇지 않은 것을 골라내어 나쁜 것 혹은 쓸모없는 것 취급해 경계 밖으로 쫓아내고는 한다.


더크의 경우를 들어 설명해 볼까. 원래 이름은 에디 아담스. 공부 대신 나이트클럽 주방 아르바이트에, 동급생 여자와 잠자리를 나누는 게 엄마에게 들통난 17세의 소년은 호된 질책을 받고는 집을 나온다. 갈 곳 없는 그를 받아주는 건 포르노 영상물 업계에서 거장 대접을 받는 연출자 잭 호너(버트 레이놀즈)다. 에디가 남다른 아랫도리의 소유자임을 간파한 잭 호너는 성인물 배우로 데뷔를 권유한다. 부모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에디는 유일한 재능을 뽐낼 기회를 얻자 그 즉시 업계의 ‘빅’스타로 ‘발기’한다.



엄마가 알지 못하는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겠다며 집을 나온 에디, 아니 더크는 엄마를 향한 복수심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엄마를 대신해줄 앰버(줄리언 무어)와 유사 모자 관계를 맺고 연출자로 만난 잭 호너를 아버지처럼 따르며 롤러 걸(헤더 그레이엄)과는 남매처럼 격의 없이 지낸다. 이들을 한곳에 모아준 건 성인물이지만 더 중요한 감정은 외로움의 빈틈을 메워준 사랑이다. 더크와 마찬가지로 잭 호너의 주변을 원으로 두른 앰버, 롤러 걸, 버크 스워프(돈 치들), 리틀 빌(윌리엄 H. 머시), 스코티(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아픈 과거의 기억이 있거나 괴로운 현실에 처해 있다.


근데 왜 하필 포르노이냐고? 섹스하는 광경을 비디오로 찍으면서 웬 사랑에, 가족 타령이냐고? 이들이 성인물에 종사하는 건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쉽게 돈을 벌기 위한 선택이 아니다. 더크에게, 엠버에게, 롤러 걸에게, 버크 스워프에게, 리틀 빌에게, 스코티에게 성인물은 당당한 돈벌이였고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장이었으며 아픈 과거를, 괴로운 현실을 공유하며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가족과 같은 공동체의 개념이었다.


잭 호너가 더크를 발굴하고 앰버와 롤러 걸에게 처음 소개하는 자리에서 카메라는 더크의 시점을 대체하면서 종종 그 자리에 참여하고 있는 독립적인 한 사람의 시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때의 시점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 이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 극 중 인물을 바라보는 태도가 그대로 반영된 설정이다.



선택한 업종이 포르노라는 게 특별할 뿐 일희일비하는 일상은 이들을 루저 내지 별종으로 바라보는 제도권의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삶의 주기라는 것은 성공과 실패의 중간 단계를 주로 유지하는 가운데 위로 살짝 올라가기도 아래로 단번에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부기 나이트>가 성인 영화의 인기가 절정에 있던 1970년대 후반과 비디오의 출현으로 극적으로 침체한 1980년대 초반을 극 중 배경으로 잡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성공의 달콤함에 빠져 스며드는 쓴맛을 감각하지 못하다가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지나간 세월을 후회하고는 한다. 이에서 중요한 건 새 출발의 다짐이다.


17세의 문제아에서 포르노의 빅스타로, 스포츠카의 주인에서 남의 돈이나 훔치는 약쟁이로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탄 더크 디글러는 잭 호너를 찾아 다시 재능을 살리기로 한다. 오랜만의 신작 출연을 앞두고 의지를 다지기 위해 거울 앞에 선 그는 자신의 ‘물건’을 꺼내 바라보며 용기를 얻는다. 그런 중요한 장면의 성기를 모자이크 처리했다? 그로 인해 아픈 기억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여, “폴 토마스 앤더슨 35mm 필름 투어”에서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없는 더크 디글러의 전설적인 ‘그것’을 노 모자이크로 감상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지 아니한가!

 

허남웅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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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영화 산책 - 오즈 야스지로에서 프레드릭 와이즈먼까지]



고독의 공기

- <조용한 열정>


19세기 미국의 여성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스크린으로 옮긴 테렌스 데이비스의 <조용한 열정> 전반부에는 어딘지 모르게 밝고 환한 기운이 감돈다. 기숙학교에서 숨 막힐 듯한 삶을 살고 있던 에밀리 디킨슨은 친애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시 쓰기 활동을 시작한다. 집이라는 실내 환경은 새로운 외부로의 가능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듯하다. 개인의 삶에 대한 그녀의 강고한 철학이 보수적인 종교관을 가진 이모를 놀라게 하기도 하지만 큰 갈등은 빚어지지 않는다. 가족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안정감과 견고함이 적어도 한동안은 이 영화를 지배한다.

그러다 영화가 시작된 지 20분 정도 경과했을 때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 영화는 초기 사진술이라는 장치를 디지털적으로 활용해 시간을 빨리감기한다. 사진이 발명된 초기에 한 장의 사진이 완성되려면 카메라 앞의 인물은 오랜 노출 시간을 견디며 앉아 있어야 했다. 그래서인지 시간을 박제시킨 듯한 사진들은 피사체에 미친 시간의 작용과 그 내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대 사람들이 사진 속에 자신의 영혼이 갇혀 있는 듯한 느낌에 몸서리를 쳤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러한 효과를 의식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이 전환점을 기점으로 하여 영화는 지독한 개인주의자였던 에밀리 디킨슨의 내면적 삶 속으로 서서히 침잠해 들어간다.

이후 이 영화의 주된 풍경을 이루는 것은 이별과 고독과 소멸과 죽음 같은 것들이다. 만남과 우정과 사랑과 삶도 결국에는 이별과 고독과 소멸과 죽음에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에밀리 디킨슨은 브라일링 버펌이라는 당대에 보기 드문 자유로운 여성과 친분을 나누기도 하고, 자신의 시를 알아봐주는 왓츠 워스 목사에 큰 애착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친분과 애착은 반복해서 상대의 결혼이라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 중단되거나 가로막힌다. 그럴 때마다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에밀리 디킨슨에게 삶은 결코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심지어 한때 누구보다 절친했으나 어느새 자신의 불륜을 정당화하는 가증스러운 사내가 되어버린 오라비와도 공유할 수 없는, 철저히 고독한 것이다. 개인의 고독이라는 삶의 명제에 충실하려는 그녀에게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타협이나 절충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타인들과의 잦은 불협화음은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그녀를 향해 이 영화에서 그녀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인 동생 비니 디킨슨조차 매번 “왜 태도가 그러느냐”고 괴로운 듯 묻는다.

시대는 물론 자신과 가장 친밀한 자들과도 불화하기를 무릅쓰며 오직 자기 개인의 내밀한 진실에 충실하고자 한 은둔가를 통해 영화가 찍고자 하는 것도 그녀를 둘러싼 고립의 공기인 것 같다. 카메라는 이따금씩 무언가를 말하거나 어딘가를 쳐다보는 인물을 지나쳐 주변의 공간을 느린 속도로 돌아본다. 그 순간 영화의 화면을 통해 절절히 다가오는 것은 인물과 인물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 그 거리로서의 공기다. 그 손에 잡히지 않는 스스로 고립한 개인의 공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눈부신 점인 것 같다.


이후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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