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 시네바캉스 서울 ]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세계

-역사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남겨진 기억들

 

그리스의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평생 동안 일관된 주제의식과 영화적 스타일을 통해 영화작가로서 분명한 발자취를 남겼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에서는 20세기 그리스와 발칸반도를 배경으로 격동적인 정치적 · 역사적 상황들이 펼쳐지며, 인물들은 그로부터 소외되고 길을 잃어 정처 없이 방황한다. 길을 잃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한 까닭에 그의 영화에서 역사란 무질서하고 혼탁하며 추상적인 것이 되고 만다. 역사는 부재의 이미지로 표상되는데, 이는 다층적인 것들의 결합에 의해 복잡하게 변동하는 세계를 담아내면서 그 부재를 채워나가는 일종의 열린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는 인물들의 삶을 억압하거나 혹은 그들이 고통받도록 내버려 둔다. 그로 인한 상처는 집단 혹은 개인의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들은 현존하는 세계에 무언가 공백이 있음을 느낀다. 무언가 부재한다는 것, 채워지기 힘든 ‘무’의 감각을 느낀다. 이런 감각은 그들의 정신에 실존적 위기를 가져온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돌아보고 직시하는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이러한 여정을 영화적으로 구현하는 데에는 인물들의 물리적인 이동의 감각(로드무비)과 함께 인간 내면의 심층으로 향하는 정신적인 여정이라는 속성이 함께 요구된다. 물리적 이동과 정신적 여정은 빈번히 뒤섞이고 혼재되며, 이를 표현하는 영화 스타일은 대개 시간을 다루는 방식─특히 시간의 지속에 대한 사유─과 관련되는 것들이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에는 롱테이크 촬영이 많아서 각 숏의 평균적인 지속 시간이 길고, 때로는 하나의 숏이 시퀀스에 이를 정도(시퀀스 숏 혹은 플랑-세캉스)인데, 이때 시간의 지속을 머금은 숏들은 단순히 외적인 길이가 긴 것만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깊은 사유를 수반하고 있다. 지속하는 시간의 이미지는 질적으로 변화하는 전체의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 현실과 추상, 현존과 부재의 혼재와 그것들 간의 이행을 내포한다. 이런 측면에서 앙겔로풀로스의 롱테이크 숏들은 외적인 측면에서나 그 내적 속성에 있어서나 질 들뢰즈가 말했던 ‘시간-이미지’의 사례에 추가하기에 충분하다. 이제 그 시간의 여정을 따라가 본다.

 

시간의 지속과 역사의 변화

앙겔로풀로스는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1970)에서부터 과거에 벌어진 사건을 재구성하는 인물을 통해 한 인간의 내면을 시간의 관점에서 탐구했고, <1936년의 나날>(1972)은 그것을 정치와 역사의 문제로 외연적으로 확장했다. 세 번째 영화인 <유랑극단>(1975)은 역사와 관련되는 문제의식과 모더니즘 영화미학을 계승한 시간-이미지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앙겔로풀로스의 초기 걸작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 영화는 고대 그리스 신화와 미학, 현대사의 정치적 굴곡에 대한 표상의 조합을 통해 감독의 급진적인 역사의식을 드러내며, 거의 모든 숏이 롱테이크로 이뤄진 엄격한 형식미를 보여준다.

<유랑극단>의 시간적 배경은 1932년부터 1952년인데, 이때 그리스는 2차 대전 당시의 독일 점령기, 해방 후 미국과 영국과 소련의 지원기와 내전의 시기가 교차되는 격변의 역사를 겪었다. 영화는 1952년에 벌어진 그리스 최초의 민주 선거를 기점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전쟁과 내전으로 얼룩진 그리스의 통절한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내는 한 유랑극단의 사람들을 따라간다. 이 영화의 시간성은 길을 잃은 역사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혼재되어 있다. 어쩌면 이러한 혼돈의 감각이야말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앙겔로풀로스 식의 대답일 것이다. 즉 이 혼돈은 이 영화의 인물들이 역사의 변동을 체험하여 느끼는 감각, 아울러 그리스인들이 과거에 겪었던 역사적 감각에 대한 구조적 표현인 것이다.

이때 미학적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각기 다른 시간대의 변화가 주로 시간의 지속 내(하나의 롱테이크 숏 내부)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주로 시간의 지속에서 미장센의 변화를 창출한다거나 트래블링 숏의 순환적 운동에 시간의 질적 변화를 내재화하는 방식으로 구현되며, 여기에 ‘죽은 시간’(어떠한 내러티브적 사건 진행이 멈춰진 시간)과 ‘빈 공간’(어떠한 사건을 통해 특정화되지 않은 공간)의 활용이 효과적으로 결합된다. 이러한 표현 방식이 합당한 이유는 역사의 시간대라는 것이 완전히 통합될 수도 논리적으로 분리될 수도 없는 모호한 덩어리인 까닭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것을 ‘무리수적 절단’이라고 말했는데, 즉 무언가 변화가 발생했을 때 그 순간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속하는 숏을 통해 시간의 변화는 질적으로 내면화되고 그 자체로 어떠한 변증법적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느리게 진행되는 시간의 지속을 덩어리째 체험하며 프레임 내에서 발생하는 세밀한 변화들에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특별한 사례들을 몇 가지 살펴본다면, 우선 롱 테이크의 숏에서 미장센의 변화와 죽은 시간을 활용하여 역사적 시간의 변화를 표현한 장면이 있다. 이 숏은 해변가에서 투숙 장소로 걸어가는 극단 단원들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이때의 단원들의 외모, 그들이 걸어가는 도중에 지나가는 선거유세 차량, 그리고 게시판의 선거 포스터로 미루어 여기가 1952년의 시간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선거유세 차량이 단원들을 지나쳐 철길을 따라 멀어지는데, 카메라는 패닝을 한 후 멈춰 서서 사라져가는 차량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죽은 시간). 오랜 시간이 흐르고 카메라가 왜 이렇게 멈춰서 있는지 의문점을 가질 때쯤, 원경 쪽에서 전경 방향으로 다른 차량이 다가와서 단원들이 지나갔던 쪽으로 건너간다. 선거 유세 포스터가 붙어 있던 게시판에는 ‘정지(HALT)’라는 문구가 적혀있고, 옆에는 독일 군인들이 서 있다. 죽은 시간의 지속은 1952년의 시간대를 독일점령기로 되돌린 것이다. 그 덩어리째 존재하는 시간의 지속 내에서 정확히 특정할 수 없는 어떤 순간에 역사의 시간대가 변한 것이다.

두 번째 사례로서 영국 지원기였던 1946년을 맞이하는 축제가 열린 술집 앞 시퀀스를 떠올릴 수 있다. 여기서 영국 권력에 아첨하는 무리들은 총의 힘으로 진보주의자들을 압도한 후, 새벽에 술집을 나와 이열종대로 골목길을 의기양양하게 걸어가며 영국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그들의 행렬을 카메라는 수평 트래블링을 통해 아주 긴 시간 동안 따라간다. 그 사이에 그들은 길의 좌측 편을 따라 걷다가 우측 편을 따라 걷다가 옮겨 다니는데, 이는 그들이 아첨하는 대상이 바뀌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들의 행렬이 더 크게 변하는 것은 외화면에서 선거연설 소리가 들릴 때이다. 그들의 발걸음을 포착한 트래블링 숏의 지속 내에서 1946년에서 52년으로 시간의 도약이 일어난 것이다. 그 남자들은 갑자기 환호하며 뛰어가 연설의 지지 세력에 참여하며, 이때 유랑극단은 그 곁을 스쳐 지나간다. 이는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거기에 붙어 아첨하는 무리들의 박쥐 같은 행동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어떤 시기이건 변함없이 역사에서 소외된 자들처럼 부유하는 유랑극단의 처지를 보여준 탁월한 사례이다.

세 번째 사례는 독일군이 물러간 직후에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깃발을 들고 자유를 외치는, 하이 앵글의 롱 숏으로 이뤄진 시퀀스 숏이다. 사람들은 미국, 영국, 소련 등 저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강대국들의 깃발을 들고 있다. 이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다른 나라의 지배력 하에 놓이게 되는 그리스의 운명을 드러낸다. 집회 도중 갑작스럽게 누군가가 총을 발사하여 몇몇 사람이 죽고 사람들은 흩어진다. 그들의 도피를 바라보던 카메라는 광장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비춘다. 그리고 죽은 자들을 추모하는 파이프 연주자가 지나가고 살아남은 아코디언 연주자 할아버지가 도망친다. 카메라는 또 광장을 한 바퀴 돌고, 이번에는 단 한 종류의 깃발(소련)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광장에 몰려든다. 카메라의 원을 그리는 순회, 그리고 빈 공간과 죽은 시간의 활용으로 역사의 시간대가 변한 것이다. 이 순회하는 움직임은 단순히 역사의 변화만이 아니라 그것의 영원회귀와도 같은 반복적인 속성까지 드러낸다.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폭력과 그에 대한 계속되는 망각이 이 순회의 움직임에 담겨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권력으로부터 핍박받으며, 이에 계속해서 광장에 모여들어 자유를 외치는 것이다.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 자유를 향한 의지는 계속해서 좌절된다. 마찬가지로 연극 공연을 시도하는 유랑극단의 노력은 다른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끊임없이 중단된다. 극단의 멤버들은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거나 전쟁에 휘말리면서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고, 남겨진 자들은 공허의 감각에 빠진다. 그들이 겪는 세계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느끼는 부재의 감각과 ‘무’의 감각은 안개 속에 흐릿하게 잠긴 텅 빈 풍경들과 같은 추상적 이미지들로 표현된다. 시대가 변한다고 해도 그들의 삶의 조건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유랑극단>이 욕망하는 시간인 1952년 민주선거는 그리스인들의 자유를 보장해주지 않을 것이다. 이는 감독의 차기작인 <사냥꾼들>(1977)에서도 확인되는데, 이 영화에서 평생을 투옥과 고문에 시달려 온 한 남자는 빨치산 대원의 시체에 대고 말한다. “혁명은 과연 언제 일어날까?” 자유에의 열망은, 혁명은, 언제나 더 큰 권력에 의해 좌절되어 왔다.

 

개인적이며 역사적인 여정

앙겔로풀로스는 경력의 후반부로 향할수록 역사의 변화 자체보다는 그것으로 인한 상흔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즉 역사에 휘말린 인물들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주목하고, 그것을 현재적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정신적인 문제, 기억과 망각의 문제, 실존의 위기의 문제로 풀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주목하는 까닭에, 후기 영화들에서 주인공의 비중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앙겔로풀로스의 인물들은 시간이 흘러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커다란 기억의 상흔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억을 직시하는 여정을 떠나게 된다.

이러한 여정의 사례로서 발칸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장대한 지리적 여정을 통해 역사와 기억의 세계에 접속하는 영화 <율리시즈의 시선>(1995)을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활동하던 그리스 출신 ‘영화감독A’(하비 케이텔)가 고국으로 돌아와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보여주는 로드무비이다. 영화감독A는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다. 그의 평생에 걸친 예술적 발걸음은 어느 순간 멈춰버렸다. 자기자신도 모르는 어떤 이유로 인하여 말이다. 이제 그는 잃어버린 필름, ‘마나키스 형제’의 (발칸 반도를 기록한) 첫 시선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아테네에서 시작해서 알바니아와 불가리아를 지나 사라예보에 이르는 기나긴 지리적 여정이다. 어떤 면에서 이 여정은 개인적인 것이다. 자신의 예술적 ‧ 실존적 위기에 직면하여,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발칸 반도를 기록한 최초의 시선을 바라보고 자신의 유년 시절의 기억과 조우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른 한편 이 여정은 지극히 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의 지리적 이동은 발칸 반도의 20세기 역사 전반의 상흔 그리고 동시대적인 역사성의 흔적을 모조리 훑어나가는 것이다. 발칸 반도는 마나키스 형제가 첫 시선을 담아낸 1905년에도, 영화의 배경인 1994년에도 변함없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발칸 반도를 담은 최초의 필름은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일부는 불타 없어졌고 일부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가 된 그 필름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의 격변과 굴곡 때문에 사라졌던 것이다. 또한 영화감독A의 최종 종착지인 사라예보는 1994년에도 여전히 전쟁의 화염으로 뒤덮여 있다(앙겔로풀로스는 짙은 안개로 그 어두운 현실을 표현한다).

영화감독A는 오랜 여정 끝에 사라예보에 가서 마침내 잃어버린 필름을 찾는다. 그는 필름에 기록된 기억을 보기 위해, 너무나 많은 인간들의 기억과 대지의 기억을, 그 고통과 절규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눈으로 보아야 했다. <율리시즈의 시선>은 영화감독A의 시선을 빌어, 발칸 반도의 고통에 찬 역사와 그 역사에 깃든 정신을 정면으로 마주 본다. 개인의 실존의 위기는 이 역사를 마주 봄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실존적 위기 자체가 역사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의 시간과 육신의 시간의 엇갈림

역사에 휘말려 희생된 개인들의 삶을 바라보는 앙겔로풀로스의 시선은 인간의 더 깊은 심연으로 향한다. 그 심연에는 근원적 ‘무’의 감각이 있다. 앙겔로풀로스의 인물들은 부재의 감각의 근원으로서의 모호한 실재와 조우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그것은 시간의 세계와 상상의 세계를 탐방하는 치유의 여정이다. 이때 그들의 삶에 출몰하는 기억의 시간이 과거에 실재했던 시간과 계속해서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관점에서 환기된 기억의 이미지에는 무언가 시간의 엇갈림이 있다.

<율리시즈의 시선>에는 이러한 엇갈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두 개의 시퀀스가 있다. 첫째는 영화감독A가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다가 출입국 관리소에 끌려가서 겪는 몽환적인 시퀀스이다. 그는 자신의 여권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그곳에 불려가지만, 사실은 자기자신으로서 그곳에 간 것이 아니다. 관리소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서 그의 몸은 역사의 일부분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는 그곳에서 마나키스가 전쟁 도중에 겪었던 경험을 그대로 겪는다. 마나키스의 기억이 영화감독A의 기억 속으로 통째로 수축한 것이며, 달리 말하자면 공간에 배어 있던 기억이 그 기억을 찾아 헤매는 사람의 육체를 만나 그 내부로 침투한 것이다. 그는 심문을 당하고 반동분자이자 아나키스트로 몰려 급기야는 총살을 당하기 직전까지 가며, “나는 이해할 수 없다”고 외친다. 마나키스의 기억과 영화감독A가 겪는 환상과 현실의 이행 과정은 트래블링과 패닝으로 이뤄진 롱 테이크 숏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개인의 육신과 역사적 기억의 엇갈림이다.

두 번째 사례는 영화감독A가 기차를 타고 가던 도중 어머니를 만나며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 빠져드는 시퀀스이다. 1945년이 시작점이다. 이 시퀀스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친척들은 그 당시 과거의 모습이며, 영화감독A는 중년의 육신 그대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어린 소년으로 인식된다.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들어간 후, 10분여에 이르는 롱테이크 숏이 시작된다. 집에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가족 파티가 열리고 있다. 이때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집에 돌아온다. 아마도 전쟁터 혹은 수용소에서 돌아왔을 것이다. 피아노가 연주되고 모든 이들이 기쁨에 들떠 춤을 춘다. 이어 시간의 주기가 바뀌어 1948년 새해 첫날, 한 남자가 잡혀간다. 피아노의 곡조는 슬퍼진다. 또 시간의 주기가 바뀌어 1950년 새해 첫날, 인민군이 들어와 집안의 가구들을 가져간다. 심지어 피아노까지 가져가서 이제 춤조차 출 수 없다. 그들의 새해 파티를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역사의 권력이다. 대신에 그들은 가족사진을 찍는다. 유년 시절의 유일한 기록으로 남을 이 가족사진을 찍을 때, 외화면에서 들어온 영화감독A는 소년의 모습으로 같이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는 소년의 얼굴로 줌-인을 한다. 시퀀스가 바뀌고 커트가 되면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이 시퀀스에서 영화감독A는 현재의 육신(물질)으로 과거의 기억과 접촉한다. 이때의 엇갈림은 기억의 본질적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앙겔로풀로스의 마지막 장편영화인 <먼지의 시간>(2008)에서 찾을 수 있다. <먼지의 시간>은 2차 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막 시작되던 시기에 격정적 사랑에 빠졌던 남녀 스피로(미셸 피콜리)와 엘레니(이렌느 야곱),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던 남자 야곱(브루노 간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피로는 어떠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도피 중인 엘레니를 찾아 소련에 온다. 그들은 단 한 번의 사랑을 나누고, 스피로는 추방되며 엘레니는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그들이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이들은 한순간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었다. 역사는, 그리고 국가권력은 언제나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영화는 세 명의 희생당한 삶을 현재와 과거의 기억을 자유로이 오가며 보여준다.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선형성을 벗어나 시적 논리로 계속해서 만나고 교차한다. 이를 일반적인 형식의 플래시백과 구별해야 하는 이유는 기억의 이미지에 대한 회상 주체가 명백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추상적 기억의 이미지들이 혼재되며 형성하는 순간적인 생성의 순간, 부재의 이미지로 표상되던 역사는 그 일순간에 비로소 섬광과도 같은 상을 갖게 된다.

역사 속에서 길을 잃은 그들의 정신적인 시간은 여전히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고 어떤 다른 차원의 시간대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인물의 육신과 정신은 같은 차원의 시간으로 조우하지 못하는데, 그들은 그 엇갈림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를 두고 다른 측면에서 두 가지 분석이 가능하다. 첫째, 그것은 역사 속에서 표류 중인 그들의 시간대가 기억 속에서조차도 결코 온전히 조우하지 못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회상은 결코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지 못한다. 그들의 시간은 이미 어긋난 채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둘째로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상상의 힘에 의한, 하나의 치유의 과정일 수 있다. 가령 영화의 중반부에 노년의 몸으로 조우한 엘레니와 스피로와 야곱이 예전에 함께 갔던 술집에 가는 시퀀스 숏의 예를 들어본다. 술집에서 스피로는 늙은 육신을 지닌 채 갑작스럽게 과거의 기억에 빠져들어 엘레니와 상상의 결혼식을, 혼자만의 결혼식을 올린다(1인극처럼 혼자서 신랑, 신부, 주례의 역할을 한다). 그 결혼식은 실제로는 결코 이뤄질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부재하는 대상인 엘레니와 그녀와의 결혼이라는 것을, 상상의 힘을 통해 현존하는 욕망의 대상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여기에는 실현 불가능성과 더불어 시간의 어긋남이라는 이중의 부정이 있다. 그 쓸쓸한 결혼식 후 문밖으로 나가려던 스피로는 갑자기 엘레니를 만나게 된다. 늙은 육신의 스피로와 젊은 육신의 엘레니는 포옹하고 키스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그 술집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이 시퀀스에서 상상 속에서나 이뤄질 수 있는, 혹은 어긋난 시간을 통해서만 가능한 과거 시간과의 만남은 그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정신적 여정일 수 있다. 영화는 그 이후 그들이 현재 시점에서 행복하게 그 술집을 걸어 나오는 장면으로 연결되는데, 이는 이 두 번째 해석에 대한 정당성을 보다 강화해 준다. 이와 유사한 엇갈림의 사례가 있는데, 스피로를 찾아 미국에 갔던 엘레니가 새로운 가족을 형성한 스피로를 보고 좌절감에 빠져 안개 속을 헤맬 때(과거), 엘레니의 아들이 현재 모습인 중년의 육신(윌렘 데포)으로 나타나 그녀를 안아주는 장면이다. 마치 어머니의 기억 속 트라우마를 직접적인 포옹으로 치유하고 구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세 노인들의 현재와 과거를 보여주던 영화의 여정은 기억의 여정이자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는 여정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세 명은 마침내 노년의 몸으로 서로 온전히 조우한다. 때는 20세기 마지막 날이다. 이들의 여정이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의 여정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스스로 이야기하듯 그들의 시간대는 이제 끝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야곱과 엘레니가 죽자, 스피로는 당신을 데리러 왔다며 엘레니에게 절망에 찬 손을 내민다. 그때 그의 손에 와 닿는 기적과도 같은 손은, 손녀 엘레니의 손이다. 영화는 눈 내리는 21세기 첫 번째 날의 거리를 스피로와 손녀 엘레니가 손을 잡고 행복한 얼굴로 뛰어가는 숏으로 끝난다.

일찍이 앙겔로풀로스가 어린아이의 남겨진 삶에, 다음 세대에 대해 이 정도의 희망적 시선을 보내준 적은 없었다. 영화에서 노인들의 열망은 역사로 인해 거듭 좌절되었지만, 아이는 그로부터 자유롭다. 과거와 현재는 온전히 만나지 못하지만, 현재는 미래를 향해 활짝 열린다. 영화에서 복잡하게 얽힌 기억의 이미지들이 변주를 이루면서 생성해낸 삶의 열망이 담긴 이미지들은 이러한 미래의 희망과 만나 트라우마를 치유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기억의 외재성을 받아들이는 것, 즉 니체적인 의미의 망각을 이루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그것을 기억할 세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적 여정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중단된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의 마지막 이미지가 가장 희망에 찬 시선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는다.

 

박영석 중앙대학교 영화학박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필름 누아르 특별전]

필름 누아르의 불온성을 지우다

- <길다>(찰스 비더)

 

<길다>는 두 개의 인상적인 만남으로 시작한다. 먼저 도박사 조니와 카지노 주인 밸린, 이 두 남자 사이의 만남이다. 조니는 뉴욕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굴러들어간 과거가 모호한 도박사다. 길거리에서 주사위 사기로 막 한몫을 잡았는데, 현지의 불량배에게 모두 뺏길 판이다. 그때 밸린이 나타나서 조니를 구한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강인한 인상의 밸린은 끝에 칼이 숨겨진 지팡이로 악당을 물리쳤다. 밤 항구에서 만난 두 미국인 남자는 서로에게 호감을 보이고, 함께 담배를 나눠 피운다. 이들의 만남은 강한 스포트라이트 조명과 투 숏 덕분에 마치 연인들의 설레는 만남처럼 묘사돼 있다.

두 번째 만남은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길다의 등장 장면이다. 길다는 밸린이 여행지에서 만나 바로 다음날 결혼한 미국인 여성이다. 밸린의 소개로 조니와 길다가 서로를 처음 봤을 때 두 사람의 시선으로 묘사되는 클로즈업의 빈번한 교환은 이들의 강렬한 욕망을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는다. <길다>는 이 세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필름 누아르다. 필름 누아르의 공식에 따르면 젊은 여성 길다는 팜므 파탈, 조니는 추락하는 순진한 남자, 그리고 돈과 권력을 가진 밸린은 희생되는 악당이 될 것이다.

그런데 <길다>는 필름 누아르의 관습을 비튼다. 먼저 길다의 캐릭터가 남성들의 미움을 받는 악녀 팜므 파탈에 머물지 않는다. 길다는 다른 팜므 파탈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작전을 짜는 ‘영리한’ 인물이 아니라 오직 조니의 사랑에만 헌신하는 ‘착한’ 여성으로 비치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길다가 처음 등장할 때, 누아르 특유의 범죄적 열정보다는 조니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더욱 강조된 데서 길다의 멜로드라마적 캐릭터는 이미 드러나 있었던 셈이다. 길다는 누아르 특유의 불온한 캐릭터가 아니다.

그리고 두 남자의 관계도 전형성과 다르다. 이 점은 개봉 때부터 일부에 의해 꾸준히 지적돼 왔는데, 두 남자는 우정을 넘어 동성애적 관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첫 만남에서 두 남자가 보인 상대에 대한 특별한 호감, 그리고 조니가 남성성을 상징하는 밸린의 지팡이에 강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순간들이 주요한 이유로 제시됐다. 돈과 권력을 가진 밸린은 조니가 제거해야 하는 사랑의 라이벌이 아니다. 더 나아가 조니는 밸린과 길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랑의 포로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밸린이 사라진 뒤 길다를 학대에 가깝게 대하는 조니의 태도는 밸린에 대한 배반의 죄책감을 길다에게 덧씌우는 것 같다. 이쯤 되면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팜므 파탈이 길다인지 조니인지 혼란이 생길 정도다.

<길다>는 필름 누아르 계보에서 늘 빠지지 않는 대표작으로 소개된다. 아마도 리타 헤이워드의 압도적인 매력, 그리고 명암의 강렬한 대조를 마법처럼 잡아낸 촬영(루돌프 마테)의 솜씨 덕이 클 것이다. 그러나 사실 <길다>는 누아르의 불온성은 교묘하게 피해가고 결국 윤리를 강조하는 멜로드라마처럼 종결된다. 아마 스타였던 리타 헤이워드를 악녀 팜므 파탈로 만들거나 비극적 결말의 장본인으로 내세우는 데 큰 부담을 느낀 것 같다. <길다>는 불온성보다는 대중성을 선택했는데, 그럼에도 필름 누아르의 전설로 남은 특이한 위치에 있다.


한창호 영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필름 누아르 특별전]


밤과 도시의 이중적 성격

- <고독한 영혼>(니콜라스 레이)


<고독한 영혼>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살인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던 딕슨이 형사 부부를 배우로 삼아 자신이 재구성한 살인현장을 연출하는 장면이다. 딕슨은 살인마 역할을 맡은 형사에게 아내의 목을 더 강하게 조일 것을 요구하면서 광기 어린 눈빛을 드러낸다. 카메라가 포착한 그의 얼굴에는 연원을 알 수 없는 빛이 드리워져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그러나 지금 딕슨의 얼굴을 강렬하게 뒤덮는 이 빛은 외부의 광원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그의 내부로부터 분출된 가학적 쾌감의 시각화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딕슨의 광기를 추동하는 빛은 자연광이 아니라 도시의 인공조명이다. ‘황혼의 시인’이라 불린 니콜라스 레이가 선택한 주인공답게 딕슨은 백주의 시간대와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다. 태양빛이 내리쬐는 동안 그는 졸음을 호소하거나,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것은 몇 년 만이라며 무기력하게 중얼거린다. 그의 폭력성과 가학성은 밤의 기운 속에 침잠해 있다. 한밤의 도시가 내뿜는 야경의 빛이 그의 파괴적인 면모를 격렬하게 충전시키는 것이다(한편으론 딕슨이 지닌 밤의 정서는 대단히 매혹적이기도 한 것이어서, 그와 로렐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사건도 밤에 발발한다). 도시 한복판의 도로 위에서 발생한 사소한 시비를 담아낸 도입부의 광경은 과잉된 분노와 민감한 반응들로 가득한 도시의 구동원리를 지목한다. 도시는 개인의 고립을 과도한 폭력성으로 표출한다. 바로 이 세계를 딕슨이 떠돌고 있다. 원제에 명시된 ‘고독한 곳(lonely place)’은 딕슨의 폐쇄적인 내면을 가리키는 은유인 동시에 그의 서식지인 할리우드라는, 이 차가운 소외의 세계에 할당된 표지인 셈이다.

<고독한 영혼>이 그려낸 밤의 풍경은 아름다우면서도 불안하고, 서정적이면서도 음험하다. 이곳엔 모순된 비이성적 충동이 도처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밤에는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시나리오 작가는 폭행과 스캔들을 일삼으며, 상대를 향한 무시와 다툼은 일상적으로 만연해 있고, 차들은 위협적으로 달려들며, 인물들은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에 휩싸이는 곳. 연인의 사랑과 동료들의 격려를 주변에 두고 있음에도 광기와 분노에 휩싸이며 파국을 맞이하는 딕슨의 운명은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엔딩에 이르러 딕슨은 집을 나서 거리를 향해 걸어간다. 그의 발걸음은 오직 신경질이 난무하는 도시의 무방비한 거리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장소라는 것을 깨달은 체념 섞인 선택처럼 느껴진다.

도시의 야경과 딕슨의 얼굴에 드리워진 빛이 그토록 강렬하게 각인된 까닭도 여기서 비롯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도시라는 고독의 세계와 딕슨의 얼굴이 공명하고 있음을 예견하는, 또한 딕슨의 자기파괴를 탐미적으로 수긍하는 도취의 빛이다. 딕슨은 할리우드의 밤거리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마지막 장면의 딕슨은 첫 장면의 도로 위로 되돌아올 것이다). 니콜라스 레이 특유의 냉엄한 관측과 묘사가 이 사내와 그가 몸담은 도시 전경에 독특한 비애감을 부여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 <고독한 영혼>의 미감에는 밤의 관능적인 분위기와 한 남자가 마주한 파국의 기운이 연결되어 있다. 불길하지만 유혹적인 아름다움이다.

 

김병규 관객에디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한국 독립영화 신작전]


“신부님은 ‘일’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내 친구 정일우>의 김동원 감독과의 대화


김성욱(프로그램디렉터) <내 친구 정일우>를 어떻게 처음 기획했는지 궁금하다.

김동원(감독) 개봉할 생각 없이 만든 작품이다. 요즘 개봉 이야기가 나와서 좀 혼란스럽긴 하다(웃음). 처음에는 예수회나 제정구기념사업회도 이 영화를 만들 계획이 없었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 나중에 예수회와 일반 후원회원들에게 지원을 받아서 만들었다.

김성욱 감독님의 작품 중 <한사람>(2001)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 작품과 <내 친구 정일우>가 연속 선상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사람>에 대해 감독님이 “한 개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한 사람에 대한 작품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난다. 친분이 있는 사람에 대한 영화를 찍는다는 건 감독과 그 사람이 너무 가깝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다. 그 사람을 전혀 모르는 관객들도 영화를 볼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할 것이다. 영화를 만들 때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무엇인가.

김동원 <내 친구 정일우>를 만들 때는 <한사람>의 방법론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두 영화 모두 한 인물에 대한 연대기를 다루기 때문에 영화의 형식은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걸 스스로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두 영화를 다르게 만들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일우 신부님이 너무 완벽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다큐에 담았을 때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신부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신부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취합해서라도 신부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려고 했다.

김성욱 60~70년대의 청계천, 80년대의 상계동, 그 이후 농촌 생활로 이어지는 신부님의 삶의 궤적을 볼 수 있다. 이때 서로 다른 네 사람의 나레이션이 들린다. 각 시대와 관련된 분들이 나레이션을 한 것 같은데, 이 구성은 어떻게 생각한 건가.

김동원 <송환>에서 과도한 나레이션을 쓰긴 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나레이션을 어려워한다. 그런데 내가 아는 신부님의 모습은 실제 그분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각 시대마다 신부님의 모습을 가장 잘 이해하고 묘사할 수 있는 분들을 찾아 신부님께 보내는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예수회 시절에서 한 분, 청계천 시절에서 한 분, 괴산 시절 한 분. 가장 가까웠던 분들에게 편지를 받았고, 화면이랑 대조해 나갔다.



김성욱 영화에서 느껴지는 시대적인 변화 중 하나는 공동체의 붕괴다. 상계동에서 같이 계셨던 분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는 걸 거부하기도 한다. 점점 공동체가 붕괴되고 작아지는 것에 대해 감독님이 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김동원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공동체에 대한 나의 확신이 엷어져 가는 것에 대한 성찰. 괴산의 할머니가 옛날에는 대보름 잔치가 신났는데 이제는 잔치 같지도 않다는 말씀을 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요즘엔 집들이 같은 것도 없어졌다. 가족 관계나 친구 관계가 변한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고 공동체의 미덕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그 얘기를 꼭 하고 싶었다. 상계동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김성욱 영화 첫 장면도 인상적이다. 신부님이 무슨 생각으로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건너오셨을까. 어떤 생각과 믿음으로 이런 일들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누가 신부님에게 고민을 얘기했을 때 어떤 조언을 하기 보다는 그냥 듣고 있었다는 증언들도 인상적이다.

김동원 내가 신부님을 미화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신부님은 눈에 띄지 않게 일을 했다. 상계동에서 철거가 시작되면 계속 녹음기를 가지고 당시의 정황을 녹음했다. 그 기록들을 통해 상계동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는 일을 많이 하셨다. ‘복음자리’와 ‘목화마을’을 만든 것도 신부님이었다. 그런데 ‘일’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게 신부님의 신념이었다. 훗날 상계동 사람들에게 배반당했을 때, 복음자리를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았을 때, 신부님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궁금하다는 관객들의 반응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픈 경험은 신부님뿐 아니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 거기서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이 있고 그걸 이겨내는 사람이 있는데, 신부님은 후자였다. 버티는 게 목회자나 활동가의 숙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관객 1 신부님이 3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이 영화 제작을 언제 결심했는지 궁금하다. 또 2007년에 상계동 주민들과 술자리를 갖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빈 테이블을 보여준다.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김동원 신부님에 대한 영화를 만들려고는 했었는데 구체적인 준비는 못 한 상태에서 신부님이 돌아가셨다. 따로 인터뷰도 한 번 못 했기 때문에 후회를 많이 했다. <상계동 올림픽>을 만들 때는 투쟁의 주체는 주민들이어야지, 신부님이 드러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괴산에도 몇 번 가지 못했다. 병원에 계실 때의 모습은 간병인들이 찍은 거고, 괴산 장면은 거의 평화방송이 찍은 것이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든 건 신부님이 돌아가신 후부터다.

사실 20년 전부터 상계동 주민들의 지금 삶에 대한 영화를 기획했다. 그런데 자꾸만 기획 의도가 달라지더라. 주민들의 지금 삶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뚜렷한 관점을 제시하기 어려웠다. 포기의 순간까지 갔었지만 신부님을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다시 상계동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관객 2 영화 중간에 세월호 선체를 부감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김동원 슬퍼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사람들이 앞서서 싸우는, 피해자들이 오히려 가장 선봉에 서는 모습을 상계동에서도, 세월호 참사 때도 보았다. 그분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가난뱅이가 세상을 바꾼다”는 신부님의 말에 공감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정말 그렇게 될까 싶은 회의도 있다.

김성욱 마지막으로 다음 작품 계획을 듣고 싶다.

김동원 내 나이는 이제 하나씩 정리만 해도 좋을 시기라는 생각을 한다. 일단 <송환>의 다음 이야기를 해야 하고, 이 작품을 ‘상계동 올림픽 2’라고 우기고도 싶다(웃음). 또 봉천동 이야기도 정리해야 하고, <상계동 올림픽>의 나레이션을 하셨던 손인숙 수녀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싶다. 아직은 모호한 생각만 있다.


일시 6월 21일(수) 오후 7시 30분 <내 친구 정일우> 상영 후

사진 이한슬 자원활동가

정리 황선경 관객에디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한국 독립영화 신작전]



배우의 표정에 대한 짧은 생각

- <꿈의 제인>에서 이민지 배우의 연기를 보고



1.

영화에서 캐릭터의 감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 배우의 얼굴이다. 물론 손의 작은 움직임이나 어깨의 떨림으로도 감정을 보여줄 수 있지만 가장 직접적이고 효율적인 건 결국 얼굴이다. 사람의 얼굴은 이마의 주름, 눈썹의 각도, 눈가의 주름, 코의 찡긋거림, 굳게 다문 입술 등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다. 배우들은 자신의 얼굴에 적절한 표정을 만들어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고, 관객은 배우가 만들어낸 이목구비의 기표들을 해석하여 캐릭터의 감정을 짐작한다. 이를테면 어떤 배우가 눈을 크게 뜨고 미간을 찌푸린 채 양 눈썹을 위로 올리고 입을 크게 벌리면 우리는 그 캐릭터가 화가 났다고 판단할 수 있다. 즉 배우의 얼굴은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하는 특권적인 신체 기관이다.

이때 연기는 캐릭터의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일차 목표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표준적인’ 방식을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는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하고, 기쁨을 연기하는 배우는 ‘기쁜 표정’을 지어야 한다. 이런 방식을 따르지 않고 완전히 독자적인 연기를 펼치는 배우는 ‘실험적인 연기’를 한다고 평가받거나, ‘연기를 못한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맥락에서 연기의 의미는 배우와 관객 사이의 기본적인 합의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합의’는 자칫 상투적인 연기를 끌어낼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만약 슬픔을 연기하는 백 명의 배우들이 모두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존의 익숙한 방식으로만 슬픔을 연기한다고 상상해 보자. 아마 관객은 어느 순간부터 캐릭터의 감정은 느끼지 못한 채 단지 ‘일그러진 얼굴’이라는 기표만 보게 될 것이다(요즘 한국영화에서 거의 모든 배우들이 번갈아가며 선보이는 ‘감정 폭발’의 연기를 떠올려보자). 결국 배우는 기본적인 연기 양식을 지키는 동시에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어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진다.

또 다른 문제는 배우가 캐릭터의 감정을 너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캐릭터의 감정을 꼼꼼하게 설명하는 연기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어떤 인물의 마음 상태는 여러 가지 감정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정확한 구성 요소와 비율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각자 자신만의 개입과 해석을 통해 그 캐릭터의 심리를 상상해야 한다. 같은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도 서로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영화 보기의 큰 즐거움 중 하나이며 영화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여백을 거의 남겨두지 않은 채 캐릭터의 감정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연기는 관객이 캐릭터의 내면에 개입할 여지를 차단해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뛰어난 연기의 대부분이 어떤 모호한 감정의 영역을 끌어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2.

그래서 때로는 얼굴, 또는 표정을 지우는 연기가 상투적으로 친절한 연기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이를테면 어떤 영화의 배우들은 슬픔의 눈물을 흘릴 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동경 이야기>에서 하라 세츠코가 이렇게 운다). 이때 관객은 배우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지만 그(녀)의 슬픔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 또한 어떤 감독은 짙은 그림자로 배우의 얼굴을 덮기도 한다(필름 누아르가 이런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스타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연출은 관객이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 밖에도 배우가 카메라를 등진 채 연기하거나 가면이나 붕대로 얼굴을 가리는 경우도 있다. 구체적인 방법에는 저마다 차이가 있지만 모두 배우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지 못하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배우의 표정을 가리는 연출이 항상 정답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런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의 표정과 그 감정의 관계, 나아가 ‘좋은 연기’에 대해 더 다양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3.

최근 이런 고민을 다시 하게 만든 건 <꿈의 제인> 속 이민지 배우가 보여준 연기였다. 이 영화에서 이민지가 연기한 소현은 매우 끔찍한 상황에 처해있다. 현실과 환상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이야기하자면 소현은 최소 두 명의 친구를 떠나보냈으며 자신 역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었다. 게다가 미래에도 별 희망은 없어 보여 당분간은 계속 괴로운 시간을 보낼 것 같다. 이처럼 누가 보아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소현은, 또는 이민지는 관객에게 (오열이 아닌) 무표정을 보여준다.

이 무표정은 일단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 정도의 힘도 없는 상태라는 걸 암시한다. 관객은 무표정을 통해 소현이 극도로 지쳐버린, 일종의 감정의 진공 상태에 처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무표정의 두 번째 효과는 관객의 불안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배우의 표정은 그 캐릭터의 감정을 알려주는 특권적인 지표이다. 하지만 이민지의 무표정은 관객이 소현의 감정을 정확히 짐작할 수 없게 한다. 우리는 소현이 어떻게, 얼마나 슬퍼하고 화가 났는지 알 수 없다. 즉 소현의 심리 상태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이때 우리는 캐릭터의 감정을 쫓아갈 표지를 잃어버리고, 이는 결국 어떤 불안함으로 이어진다. 스크린 속에서 따라가고 있던 캐릭터가 갑자기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대상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관객은 백지와 같은 이민지의 얼굴을 보며 단지 이런저런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며, 그 얼굴의 의미는 마지막까지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민지의 무표정의 얼굴이 <꿈의 제인>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 순간의 정서가 정확하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나 역시 구체적으로 답하기는 힘들다. 다만 소현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가 이민지의 무표정을 매개 삼아 그 자체로 굉장히 생생하게 전해진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이민지의 연기는 관객에게 불안을 설명하지 않고 관객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꿈의 제인>에서 이민지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하고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김보년 프로그램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