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마이 신지 전작 회고전]



“소마이 신지는 끝을 의식하게 하는 동시에 새로운 걸 고민하게 만든다”

- <물고기 떼> 상영 후 후지이 진시 특강





김보년(프로그래머) 지난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 때도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던 후지이 진시 평론가를 이번에 다시 초대했다. 후지이 진시 평론가는 최근 일본에서 열린 소마이 신지 회고전을 직접 기획하기도 했고 최근 『되살아나는 소마이 신지』란 책을 공동 편집하기도 했다.

후지이 진시(영화평론가) 소마이 신지를 80년대 일본 뉴웨이브의 대표 감독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분들이라면 이번 <물고기 떼>를 보고 그 고전적인 느낌에 당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을 포함해 <이사>나 <아, 봄> 같은 작품은 소마이 신지 감독의 작품 중 영화적 기법이 비교적 억제된 작품이다. 어디선가 ‘소마이 신지의 롱테이크’에 대해 많이 들은 분이라면 매우 얌전한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 소마이 신지의 양의성

물론 이 영화에도 롱테이크나 대담한 영화적 기법이 많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중후한 드라마가 좀 더 강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점이 눈에 안 띄었을지도 모르겠다. 실은 바로 이런 점이 소마이 신지가 일본 영화사에서 점하고 있는 애매함, 양의성, 혹은 모순이라 할 수 있다. 소마이 신지는 ‘마크’란 어휘를 즐겨 사용했다. 여기서 마크는 스튜디오의 로고를 의미한다. 즉 그는 이 작품이 어느 촬영소의 작품인지를 많이 의식했다. 소마이 신지는 영화 촬영소가 쇠락한 다음 데뷔한 감독이지만 오히려 선배들보다 촬영소의 존재를 더 의식하고 있었다.

이번 <물고기 떼>에도 쇼치쿠의 후지산 로고가 먼저 등장한다. 쇼치쿠는 오즈 야스지로가 평생 소속되어 있었던, 일본에서 가장 전통적인 역사를 가진 영화사다. 그래서 소마이 신지 역시 쇼치쿠의 ‘품격’에 맞춰 이 영화를 제작했다. <물고기 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문예영화이고, 쇼치쿠가 강조하는 중후한 성격을 따르려 했다. 이는 현대 감독, 이를테면 타란티노가 옛날 작품을 오마주하며 흉내내는 것 같은 패스티시와는 다른 것이다. 촬영소 전통이 끝난 시대에 촬영소를 재구축하려고 도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고기 떼>는 소마이 신지의 네 번째 작품인데, 지금까지 그가 찍은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십 대 청소년이 나오는 청춘영화였다. 이 영화를 통해 소마이 신지는 일본영화의 전통적인 측면에 접근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영화는 다른 감독들도 영화화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왜냐하면 실제 참치를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소마이 신지는 포기하지 않고 진짜 참치에 집착했고 촬영 일수를 초과했지만 결국 성공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대부분의 일본인들도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운 강한 도호쿠 방언을 쓰고 있다. 일본영화에서 어떤 지역의 특색을 재현하는 건 문예영화의 전통이지만, 이 정도로 지독한 방언을 쓰는 건 일종의 도발로 봐야 한다.

다른 나라의 영화사와 비교했을 때 일본 영화사의 특징 중 하나는 촬영소 영화(스튜디오 영화)에서 현대 영화로의 전환이 촬영소의 주도에 의한 것이었고, 그것도 촬영소 내부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환이 굉장히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오시마 나기사의 주도로 이루어진 ‘쇼치쿠 누벨바그’가 1960년대에 일어났는데, 이 역시 쇼치쿠 영화사 내부에서 일어난 혁신이었다. 이후 포스트 스튜디오 시대로 이행하며 소마이 신지가 등장할 때까지 약 20년이 걸렸다. 다시 말해 촬영소 시대가 끝나고 인디펜던트 영화로 전환됐다고 이해하기보다는 약 20년간 촬영소와 인디펜던트라는 양 극단이 긴장하며 공존했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하다. 소마이 신지 역시 70년대부터 닛카츠 같은 촬영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60~70년대의 양극화를 의식하며 활동한 감독으로 봐야 한다. 구로사와 기요시나 모리타 요시미츠 같은 감독들은 학생 때부터 8mm 자주영화를 찍으며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소마이 신지는 그들보다 나이도 많았고 데뷔할 때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런 시차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마이 신지가 덜 알려진 것이라 생각한다. 현대적 작가로 보기에는 촬영소의 그림자를 갖고 있고, 촬영소 소속의 감독이라 보기에는 너무 현대적이다. 이런 모순으로 인해 소마이 신지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 소마이 신지의 영향력

<물고기 떼>로 돌아가면, 소마이 신지는 쇼치쿠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고, 평생 이런저런 촬영소를 거치면서 13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가 만든 영화들의 저작권은 여기저기 흩어져있고, DVD 박스 세트를 만드는 것도 어렵다. 그렇다고 소마이 신지가 생전에 비평적으로 저평가를 받은 건 아니다. <태풍 클럽>은 제1회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당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절찬을 받았다. <이사>는 칸영화제에서 상영됐고, <아, 봄>은 베를린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별 작품이 높은 평가를 얻은 것이지, 그를 일관된 스타일을 가진 ‘작가’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인(奇人) 취급을 받은 감독이었다.

1980년대 일본, 특히 도쿄는 세계의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 도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80년대 도쿄를 중심으로 흥미로운 기획이 이어졌고, 관객의 눈도 함께 높아지며 이른바 ‘시네필’이라 불리우는 관객층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한 영화가 바로 소마이 신지의 작품들이었다. 이때 지적하고 싶은 건 소마이 신지는 비교적 덜 유명한 배우들, 특히 아이돌을 캐스팅해 리허설을 거듭하며 한 명의 배우로 성장시키는 감독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소마이 신지의 영화를 보는 건 한 사람의 소녀가 영화배우로 성장하는 것을 목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네필들도 자연스럽게 영화를 보며 자신이 성장하는 감각을 맛보게 된다. 당시 시네필, 특히 소마이 신지의 팬들은 자신의 청춘과 결부해 소마이 신지를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그중 자라서 영화감독이 된 사람들에게 소마이 신지가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일화를 예로 들고 싶다. 마틴 스콜세지는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을 보고 비로소 감독이란 존재를 의식하고 감독을 지향하게 됐다고 한다. 알다시피 <시민 케인>은 누가 보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과잉된’ 스타일을 가진 영화다. 소마이 신지의 영화도 그런 굉장히 과잉된 스타일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마이 신지의 영화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면이 있었다. 90년대 일본 감독들의 작업을 보면 분명 소마이 신지를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유레카>(2000)를 만든 아오야마 신지는 다무라 마사키라는 촬영감독하고만 작업을 했었다. 애석하게도 다무라 마사키 씨는 최근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소마이 신지의 <숀벤 라이더>를 촬영한 감독이다. 나는 아오야마 신지가 <숀벤 라이더>의 다무라 마사키와 함께 작업하며 소마이 신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롱테이크의 가능성을 파고들었다고 생각한다. 구로사와 기요시도 마찬가지다. 그는 <세일러복과 기관총>에서 조감독을 맡기도 했었는데, 소마이의 스타일을 동경하면서도 그 동경을 감추고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요시는 현명하게도 소마이 신지와 자신의 시대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소마이 신지와 같은 행보를 걸으면 앞으로 영화를 찍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소마이 신지를 반면교사 삼아 굉장히 ‘합리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찍고 있다.

소마이 신지의 영향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애니메이션이다. 특히 고교 시절을 그린 학원물들이 그렇다. <태풍 클럽>의 영향을 많이 찾을 수 있다. 특히 호소다 마모루는 (최근은 달라진 것 같지만) 한때 굉장히 소마이 신지에 경도되었던 것 같다. 호소다 마모루는 <이사>의 각본을 쓴 오쿠데라 사토코와 함께 작업을 하기도 했었다. 도쿄에서 소마이 신지 회고전을 했을 때 실제로 호소다 마모루를 초대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마이 신지 감독을 좋아한다고 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한편 소마이 신지는 단순히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려고 하는 감독이 아니었다. 그는 이 전통을 보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 전통을 어떻게 계승할지 고민한 감독이었다. 그런 소마이 신지와 특히 깊은 관계를 맺었던 게 닛카츠였다. 닛카츠는 알다시피 일본에서 굉장히 유서 깊은 촬영소다. 하지만 경영 악화로 70년대 이후에는 로망포르노로 잘 알려진 영화를 만들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소마이 신지가 닛카츠에서 조감독으로 있을 때 만들었던 영화도 역시 로망포르노다. 로망포르노는 그 제작 특성상 젊은 감독들의 과격한 영화적 실험의 무대가 되기도 했었다. 이때 소위 ‘소마이 팀’이라고 불리는 스태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닛카츠의 언저리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 이후 여기서 성장한 스태프들은 소마이 신지와 많은 작업을 함께했다. 그중 특히 중요한 인물이 프로듀서인 이지치 게이다. 그는 데뷔작인 <꿈꾸는 열다섯> 외에도 소마이 신지의 거의 전 작품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를 한다. 소마이 신지처럼 시간이나 돈을 태연스럽게 오버하는 감독은 보통 프로듀서에게 미움을 받기 쉽다. 하지만 감독 지망생이었던 이지치 게이는 소마이 신지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결국 <숀벤 라이더> 같은 어처구니 없고 과격한 영화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소마이 신지의 현장

또 하나 얘기하고 싶은 것은 촬영감독에 대해서다. 방금 ‘소마이 팀’이라고 얘기했지만 이상하게도 소마이 신지는 거의 항상 다른 촬영감독들과 작업을 했다. 이게 소마이 신지의 개성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다시 말해 항상 과격한 스타일의 영화를 찍지만 특정 촬영감독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이 말이 소마이 신지가 촬영에 무관심했다는 말은 아니다. 일본영화 현장에는 촬영과 조명이 뚜렷하게 나뉘어 있다. 소마이 신지의 현장에서는 촬영감독은 항상 바뀌지만 구마가이 히데오라는 조명감독은 바뀌지 않았다. 이런 일화가 있다. 소마이 신지는 끝없이 계속되는 리허설로 유명하다. 그래서 배우와 리허설을 할 때 스태프들이 바로 움직이지 않다가, 슬슬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구마가이 씨가 세팅을 시작한다. 그러면 다른 스태프들도 비로소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구마가이는 굉장히 개성적인 조명감독이다. 그저 피사체를 아름답게 볼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빛으로 연출에 관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물고기 떼>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배우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바다 쪽에서 빛이 계속 흔들렸던 걸 기억할 것이다. 이 빛이 구마가이 씨가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이 빛을 ‘반짝반짝’이라고 표현했었는데, 인물의 심정을 웅변적으로 전환한 훌륭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마가이의 조명 역시 ‘왕도’가 아니라 이단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마이 신지는 촬영소에서 단련된 베테랑 스태프들과 일하면서도 촬영소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지 않았다. 그는 촬영소에서는 제대로 꽃피울 수 없었던 재능을 본격적으로 활용하였다. 다시 말해 이단적 스태프들을 해방시킨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물고기 떼>와 같은 비교적 ‘얌전한’ 영화들을 다시 사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물론 과격한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꼭 그런 작업만 한 감독은 아니었고, 촬영소의 전통을 어떻게 계승할지 적극적으로 고민한 감독이었다.


- 한 시대의 끝에서 다음 시대를 고민하기

소마이 신지는 2001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영화의 디지털화를 제대로 경험하지 않은 채 필름으로 충실하게 영화를 만들었다. 물론 많은 분들이 소마이 신지의 이른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지만, 반대로 소마이 신지가 ‘좋은 시절’에 활동했다고 말하는 지인들도 있다. 만약 조금 더 오래 활동했다면 그의 특징이자 장기였던 현장에서 끈질기게 버티는 리허설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어처구니 없는 롱테이크를 시도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타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그렇다고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을 두고 이런 가정을 하는 것도 소용 없을 것이다. 대신 지금 소마이 신지의 영화를 이렇게 보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는 게 더 바람직할 것 같다.

어쩌면 1980~90년대 개봉 당시 영화를 보는 것보다 2018년에 소마이 신지의 영화를 보는 게 더 큰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촬영소의 시대가 끝난 후 영화를 시작한 감독이다. 즉 무언가가 끝난 후 새롭게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만하다. 실제로 소마이 신지는 예전에 했던 강연에서 “저는 20세기와 함께 영화는 이미 멸망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이전에 좋아했고 믿었던 영화라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걸 스스로 의식했던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소마이 신지는 영화를 매우 비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마이 신지는 굉장히 풍요로운 작품을 꾸준하게 세상에 내놓았다. ‘필름’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고, ‘영화’의 정의도 바뀌고 있다. 이런 시기에 소마이 신지를 본다는 건 ‘끝’을 의식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는 계기를 제공해 주는 것 같다. 지금 여기 모인 관객들도 ‘더 이상 이런 건 안 되겠구나.’라고 인식하는 동시에 또 다른 새로운 걸 탄생시키길 기대한다.

김보년(프로그래머) 제작자, 혹은 기획자로서의 소마이 신지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다. 소마이 신지의 이력을 검색하면 그가 만들었던 제작사인 ‘디렉터스 컴퍼니’가 나온다. 어떤 면에서는 메이저와 마이너를 넘나드는 주도면밀한 전략가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낭만적일 정도로 무모했던 제작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후지이 진시 80년대 중반 소마이 신지가 참여한 ‘디렉터스 컴퍼니’가 세워졌다. 자신이 찍고 싶은 작품을 찍기 위해 영화감독들이 모여 만든 회사였다. 구로사와 기요시도 참여했었다. 그런데 내가 전해 듣기로는 소마이 신지는 별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웃음). 심지어 디렉터스 컴퍼니가 망하는 데 소마이 신지의 책임도 일정 부분 있다고 볼 수 있다. 경영의 재능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 상영하기도 하는 <하늘이 이렇게 푸를 리 없다>를 개봉 당시 본 사람들은 다들 놀랐다고 한다. 소마이 신지가 제대로 제작을 해냈기 때문에 ‘하면 되는데 왜 안 하냐?’라고 화를 냈다고 하더라(웃음). 참고로 소마이 신지는 영화를 찍지 못하던 시기 TV 광고도 많이 찍었다. <하늘이 이렇게 푸를 리 없다>를 봐도 그렇고, 그는 자신과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높게 평가했던 것 같다.




관객 1 소마이 신지의 영화에는 강한 비와 바람이 많다. 촬영도 어려웠을 텐데 왜 이렇게 비를 사랑했는지 궁금하다.

후지이 진시 실제로 기후나 날씨의 변화를 연출에 활용하는 건 촬영소 시대에는 자주 있었던 일이다. 당시는 그런 연출을 모두 스튜디오 내부에서 했었다. 하지만 소마이 신지는 야외 로케이션에서 날씨의 변화를 직접 보여준다. 질문하신 것처럼 영화에서 비 장면을 촬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태풍 클럽>을 찍을 때는 근처의 수도가 메말랐다는 일화까지 있다.

왜 이렇게 고생을 하느냐고 물을 수 있을 텐데, 나는 소마이 신지가 일부러 이런 고생을 함으로써 뭔가 나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대단한 고생을 모두 함께 거치면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소마이 신지는 스태프들에게 부조리한 걸 종종 강요했었다. <물고기 떼>를 만들 때는 참치의 생태를 연구해 오라고 지시했었다. 그런 점들이 실제로 화면상에 반영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만큼 모든 스태프들이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음으로써 새로운 무언가가 만들어질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한 바람이 불거나 지독한 비가 내리는 건 단지 인물의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촬영현장 자체의 열기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물고기 떼>에서도 여배우가 폭우 속을 필사적으로 뛰어간다. 이 장면에서 만들어지는 스토리를 초월하는 무언가를 여러분들도 느꼈을 것이다.

관객 2 소마이 신지의 영화를 보면 롱테이크를 자주 만날 수 있다. 내가 알기로는 미조구치 겐지 감독이 도드라지는 롱테이크를 자주 썼었다. 영화사적 의미에서 소마이 신지의 롱테이크를 어떻게 볼 수 있는지 궁금하다.

후지이 진시 미조구치 겐지와 소마이 신지의 롱테이크를 비교하는 건 굉장히 중요한 질문인 것 같다. 하지만 소마이 신지는 롱테이크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식으로 롱테이크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마이 신지의 후기 작품을 보면 점점 롱테이크가 줄어든다. 그래서 ‘소마이 신지 = 롱테이크’로 생각했던 관객들은 그의 후기작을 보며 실망할 수도 있다.

80년대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무모할 정도의 얼토당토 않은 소마이 신지의 롱테이크는 앞서 말했던 비 장면과 비슷한 맥락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현장의 열기를 이끌어내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미조구치 겐지의 롱테이크는 모든 게 세심하게 컨트롤된 연출이다. 그것과 비교하자면 소마이 신지의 롱테이크는 잡스럽다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그만큼 소마이 신지의 무턱대고 찍는 롱테이크는 촬영 현장의 박력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어쩌면 소마이 신지는 자신도 컨트롤할 수 없는 순간을 이끌어내기 위해 롱테이크를 구사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소마이 신지는 독재자라고도 말할 수 있는 미조구치 겐지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일시 9월 1일(토) <물고기 떼> 상영 후

정리 김혜령 관객에디터

사진 목충헌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2018 시네바캉스 서울: 작가를 만나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믿고 싶어서 계속 매달리는 인물들의 이야기”

- <독전: 익스텐디드 컷> 상영 후 이해영 감독과의 대화




이해영(감독) 아까 상영관 앞에서 만난 관객분이 <독전: 익스텐디드 컷>보다 개봉판이 더 완성도가 높다고 하시더라(웃음).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컷이 더 많이 붙어 있으니 <독전: 익스텐디드 컷>이 감독의 의도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원래 오리지널 버전이 내 의도가 가장 많이 반영된 버전이다.
사실 처음에는 <독전: 익스텐디드 컷> 제작을 거절했었다. 영화가 두 개의 버전으로 남기를 바라지 않았고, 특히 엔딩에 다른 컷을 넣는 건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개봉 후 정말 많은 분들이 제안을 해주었고, 그래서 일종의 팬서비스 개념으로 만들기로 했다. 많은 분들이 ‘감독판’ 잘 봤다고 하시던데(웃음), 감독판은 아니다. 만약 오늘 “독전”이란 영화를 <독전: 익스텐디드 컷>으로 처음 본 분이 계시다면 굳이 개봉판을 다시 보지는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주변에 아직 <독전>을 안 본 분이 계시면 개봉판을 보라고 권해주면 좋겠다.

모은영(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 원작에 대한 얘기를 먼저 물어보고 싶다. 아시다시피 이 영화의 원작은 두기봉 감독의 <마약전쟁(독전)>(2014)이다. 이해영 감독의 전작을 본 분이라면 <마약전쟁>과 어떻게 연이 닿았는지 궁금해할 것 같다.

이해영 <독전>의 제작사인 용필름 임승용 대표에게 제안을 받았다. 당시 두 가지 제안을 받았다. 하나는 <마약전쟁>의 리메이크였고, 하나는 여성들이 주인공인 스릴러였다. 그런데 내 전작이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5)이었기 때문에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경성학교>가 흥행에도 실패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변화에 목 말라 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민망하지만 한국에서 데뷔작을 만드는 건 열 명 중 한 명이고, 데뷔작이 흥행에 실패했을 때 두 번째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그중에서도 열 명 중 한 명이다. 그런데 나는 세 번째 영화까지 흥행이 안 됐다. 연속으로 흥행이 안 되면서도 네 번째 영화를 만든 사람은 내가 알기로 나밖에 없다. ‘아 드디어 삼진 아웃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독전> 제안을 받았고, 이제 관성의 고리를 끊고 ‘갱생의 삶’을 살기 위해 다른 선택을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험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사실 두기봉이란 이름은 영화감독들에게는 너무 대단한 이름이다. 이 사람의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건 약간 미친 짓이고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었고 그냥 과감하게 달려들었다. 많은 분들이 알겠지만 두기봉은 아주 비정하고 하드보일드한 장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고, <마약전쟁>도 뜨겁고 날카로운 ‘남자 영화’다. 하지만 그런 점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심 나도 즐겁고 관객도 즐거운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갖기도 했었다. 결국 <독전>을 만난 건 내겐 정말 행운이었다.

모은영 <독전>에는 원작에 없는 완전히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차승원 배우가 연기한 브라이언이다. 기독교적 요소 같은 이 인물의 몇 가지 설정은 한국적 상황을 드러내기에 적절했던 것 같다.

이해영 먼저 ‘이선생’의 정체를 원작과 다르게 설정했다. 그 과정에서 전반부는 진하림(김주혁)이 이야기를 맡아주었고, 후반부에도 강력한 인물이 하나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브라이언이었다. 처음 시나리오에는 믿음이라든지 종교에 관련된 뉘앙스가 전혀 없었다. 그냥 재벌 2세, 그냥 봐도 돈 많아 보이는 사람, 그런 심심한 캐릭터였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본 차승원 배우가 카페에서 만나자고 하더니 자리에 앉자마자 캐릭터가 너무 재미없다고 하더라(웃음). 그렇게 한 30분 정도 캐릭터가 재미없다는 얘기를 계속 듣다 보니 내가 왜 혼나고 있지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모든 말발을 동원해 굉장히 열심히 이 캐릭터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때 <더 마스터>(폴 토마스 앤더슨, 2013)의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이야기도 했었다. 그렇게 한창 설명을 하니 차승원 배우가 방금 그렇게 말한 그대로 써달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내가 무슨 말을 했지 하면서 앓아누웠었다(웃음).

그렇게 차승원 배우에게 맞춰서 시나리오를 고치고, 성경도 참고해 가면서 브라이언을 좀 더 한국적이고 괴상하고 기이한 캐릭터로 만들 수 있었다. 만약 차승원 배우가 내가 처음에 썼던 캐릭터를 연기했다면 정말 재미없었을 거다. 그만큼 차승원 배우는 어떻게 해야 이 캐릭터가 잘 살아날 수 있고 관객이 더 이입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모은영 이 영화의 제목은 “독전”인데 영어 제목은 “Believer”다. 그만큼 믿음이 중요한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실제 극 중 모든 사람이 믿음에 대한 얘기를 한다. 이들은 아무도 믿지 못하거나 타인에게 믿음을 강요하거나 누구를 믿을지 계속 찾고 있다.

이해영 각 인물들을 대표할 수 있는 말이 결국 어떤 것을 믿는다, 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가 믿는다고 믿는 것에 매달리는 자들이다. 원호와 락은 물론 진하림과 브라이언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믿고 싶어한다. 사실 믿음을 커다란 주제로 잡고 시작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촬영이 다 끝난 후 후반작업을 할 때 임승용 피디가 “Believer”라는 영어 제목을 제안했다. 처음에 그 제목을 듣고 ‘에? 신자?’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좋은 제목 같았고, 지금은 이 영화를 대표할 수 있는 표현이자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대만에서 <독전>이 개봉했을 때 제목이 “신도(信徒)”였다.

모은영 이 영화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보여주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첫 장면을 보면 노르웨이의 설원을 향해 쭉 들어가는데, 마치 정말 이상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고 보면 <경성학교>의 첫 장면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해영 일단 조진웅 배우가 노르웨이의 설원에서 운전을 하는 얼굴이 너무 좋아서 내가 옆에서 계속 찍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카메라를 들고 메모리를 끊임없이 썼고, 조진웅 배우는 직접 운전을 하면서 노르웨이의 설원을 굉장히 오랫동안 달렸다. 그렇게 했던 게 조진웅 배우에게도, 나에게도 매우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막상 갖고 와서 보니 다 쓸 만하지는 않았지만(웃음), 그래도 이 순간들로 영화를 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오연옥(김성령)과 이학승 회장, 그리고 아직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브라이언의 장면으로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원호의 얼굴이 너무 소중했기 때문에 이 얼굴로 영화를 열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원호의 입장에서 보는 플래시백 구조가 만들어졌다. 즉 원호가 이 지난한 여정들을 반추한 다음 락을 대면하는 느낌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엔딩의 뉘앙스가 더 풍성해지기를 바랐다. 역시 엔딩은 익스텐디드 컷보다 오리지널 버전이 더 적절한 것 같다.
높은 곳에서 찍은 촬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일단 자동차를 드론으로 찍으면 너무 멋있게 느낀다. 약간 설레기까지 한다. 어렸을 때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을 봤을 때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산길을 달리는 자동차를 카메라가 따라가는 것만으로 이렇게 영화적인 황홀감과 긴장감이 발생하다니. 그래서 <경성학교> 때 이런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는데 한국에서 그런 느낌의 길을 찾는 게 정말 어려웠다. 한국은 전봇대가 안 걸리는 데가 없다. 그래도 정말 어렵게 그 장소를 섭외해서 찍었는데 나중에 다른 영화에서 그 컷 조금만 잘라달라는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다(웃음).
노르웨이에서는 드론 촬영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바람이 굉장히 세게 불어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심하게 흔들렸다. ‘스테디’하게 팔로우하는 게 너무 어려워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찍었다. 여담을 하나만 얘기하자면, 노르웨이 스탭들이 정말 열심히 일을 하더라. 원호의 차를 현지에서 렌트했는데 헌팅을 다니다 보니 차가 자연스럽게 더러워졌다. 흙탕물이 묻어 있는 그 느낌이 참 좋았는데, 다음 날 현지 스탭들이 너무 깨끗하게 타이어까지 세차를 해놓았더라(웃음). 지금 영화를 보면 희한할 정도로 차가 깨끗하다. 원래 NG인데 어쩔 수 없었다.

모은영 용산역은 매우 일상적인 공간인데 이 영화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사실 기차역이라고 하면 서울역이 먼저 떠오르는데, 이 영화에서는 용산역이 나온다.

이해영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곳에 마약 본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내가 만약 브라이언이라면 마약 공장을 어디에 차리고 싶을까? 나는 돈과 권력이 있고, 마약 제조 기술자야 얼마든지 불러올 수 있고, 모든 걸 선택만 하면 되니까 제일 중요한 건 유통이 아닐까? 이런 고민의 결과 교통의 핵심 지역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서울역이 아니라 용산역인 이유는... 용산역은 원래 뿌리가 없던 곳에 거대한 건물을 도시에 콱 때려박은 느낌이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나는 한국 특유의 멋없는 느낌을 정말 좋아한다. 용산역도 그렇고 왕십리역도 그렇고, 그런 거대하고 못생긴 건물에 대한 ‘향수’가 생기기 시작했다. 서울 시청 같은 건물도 그렇다. 처음에는 원래 있던 예쁜 건물을 뒤에서 덮치는 것 같다는 느낌이라 뜨악했는데, 보면 볼수록 저게 바로 서울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들더라. 그런 맥락에서 용산역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관객 1 용산역 장면에서 처음 여름 장면에서는 기둥이 연두색이었는데, 나중에는 파란색으로 바뀌어 있다.

이해영 용산역은 공사를 정말 많이 한다. 헌팅을 갈 때마다 주차장 모양이 바뀌어 있고, 한 번 찍으러 갈 때마다 외관이 변한다. 영화의 처음 부분을 찍을 때는 주차장이 연두색이었는데, 나중에 엔딩을 찍으러 갈 때는 다시 페인트칠을 해서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나중에 CG를 써서 연두색으로 다시 바꾸었는데 방금 지적하신 부분은 내가 놓친 장면이다.
찾아보면 그런 장면들이 꽤 많다. 어딘지는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없지만 총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의 몸에 화약이 연결된 선이 보이는 장면도 있다. 그게 마치 줄넘기처럼 움직이는데(웃음)... 그런 장면들이 여전히 있다.

관객 2 영화를 보며 속도감 있는 편집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오늘 네 번째 봤는데 감독님이 소리로 어떤 리듬을 살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를테면 오연옥이 라이터를 켜는 소리, 진하림이 볼펜을 놓는 소리, 보령(진서연)이 소독약을 흔들면서 뚜껑을 여는 소리 같은 것들. 이런 부분이 영화의 리듬감에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이해영 그런 부분을 봐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편집할 때 그런 리듬이 있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한다. 컷이라는 게 그냥 막 넘길 수 없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인물의 감정이기 때문에 일단 감정에 맞춰 리듬을 만든다. 그런데 가끔은 어떤 소리가 포인트가 되면 좋겠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런 바람을 갖고 편집을 한 다음 음악감독이 음악을 붙이면 정말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방금 말한 라이터 소리 같은 건 실제 동시녹음이 아니다. 그 소리를 만들기 위해 굉장히 많은 소리를 섞고, 거기서도 하이(High)를 높이고 로우(Low)를 깎아서 만들어낸 소리다. 다 어떤 의도가 반영이 된 결과물이다. 마지막에 원호와 형사들이 탄 차가 내려가다가 “지원 요청해!”라는 대사가 나오고 그때 딱 맞춰서 자동차가 끼익 소리를 내면서 설 때,  이런 소리와 컷에도 어떤 박자를 맞춘다. 이런 건 나뿐 아니라 많은 감독들이 신경 쓰는 부분일 것이다.

관객 3 <독전>의 시나리오는 정서경 작가와 함께 작업한 걸로 알고 있다. 이 영화는 주로 박찬욱 감독과 작업을 했던 정서경 작가에게도 의미가 큰 작품이 아닐까 한다. 시나리오 작업 과정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이해영 <독전>의 제작사인 용필름에서 정서경 작가와 함께 <아가씨>를 제작했었다. 임승용 대표와 정서경 작가가 먼저 <독전>의 시나리오 초고를 만들었다. 그후 내가 <독전>을 연출하기로 결정한 후 정서경 작가의 2고를 받았다. 그전까지는 내가 먼저 시나리오를 다 쓴 다음 다른 작가와 함께 고쳐가는 작업을 했었는데, 이렇게 작가와 처음부터 각본 작업을 함께 한 건 처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서툰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정서경 작가와 대화를 많이 했다. 함께, 그리고 서로 번갈아가며 4고까지 썼고, 다음에는 내가 그 시나리오를 가지고 거의 1년 동안 13, 14고까지 썼다.
정서경 작가에게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건 영화 전체를 바라보는 정서를 구현하는 방법이었다. 장르물 안에서 정서를 어떻게 놓치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들. 그리고 락의 캐릭터도 정서경 작가가 만들었다. 그런 부분이 <독전>만의 유니크한 정서라고 생각한다. 캐릭터 구축과 영화의 전체적인 정서에 도움을 많이 받았고, 정말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모은영 거의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마지막 인사를 부탁한다.

이해영 <독전>은 장르물을 처음 만든 신인 감독의 영화라서 흠결도 많고 채워지지 않은 부분도 많다. 그런 부분들을 여러분의 생각으로 많이 채워주어서 완성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관객들과 소통을 할 때 영화가 진짜 영화가 된다는 걸 글로만 알다가 이번에 처음 몸소 느꼈다. 다시 한 번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곳 극장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어떤 분에게는 고루하고 어려운 영화, 옛날 영화만 트는 곳으로 느껴져 오기 꺼려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목도, 감독도 모르고 그냥 시간만 맞춰 와도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분명 좋은 영화를 상영하고 있을 것이다. 여러분들이 서울아트시네마에 자주 오면 좋겠다.


일시 8월 25일(토) <독전: 익스텐디드 컷> 상영 후

정리 권세미 관객에디터

사진 목충헌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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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시네바캉스 서울: 작가를 만나다]


“관객에게 위로를 주는, ‘선물’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 <리틀 포레스트> 상영 후 임순례 감독과의 대화




정지연(영화평론가) <리틀 포레스트>의 전작이 <제보자>였다. <제보자>가 2014년에 개봉을 한 뒤 거의 4년 만에 다시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리틀 포레스트>가 한국에서 만들어지는데 연출을 임순례 감독이 맡는다고 해서 크게 기대했었다. 어떻게 이 작품을 만들었는지 처음 계기를 듣고 싶다.

임순례(감독) 사실 <제보자>가 끝나고 중국에서 영화 연출 제의를 받았다가 결과적으로 잘 안 되면서 텀이 좀 생겼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던 중에 <제보자>를 만들었던 제작사의 대표가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리메이크를 제안했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가 40대 중반 남성이 좋아할 만한 영화는 아니지 않나? 그분이 평소 만들던 영화와 색깔도 많이 다르다(웃음). 그런데 대표님이 개인적으로 그 영화를 보고 매우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하더라. “감독님, 저도 한국 관객에게 위로를 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제안했다. 내가 교외에서 십 년 넘게 생활하고 있고, 소위 ‘자연친화적’ 성향인 걸 알고 <리틀 포레스트>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그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를 봐도 너무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영화들이 많기 때문이다. 볼 때는 재미있게 보지만 보고 나면 뭔가 나도 폭력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그렇지 않은 영화를 만들어 관객들에게 ‘선물’을 드리고 싶었다. 또 한국 영화 제작비가 너무 올라가고 있다. 100억, 200억을 우습게 여기는 풍토에 약간이라도 저항을 해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래서 컴팩트하게, 소소한 이야기를 갖고 위로를 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정지연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를 먼저 본 동료가 “내러티브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계속 보게 된다. 별 사건도 없는데 재밌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감독님은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한국화’를 해야 했을 텐데, 각색이나 연출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 궁금하다.

임순례 처음에 제안을 받았을 때는 고민을 좀 했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원작이 너무 ‘일본스러’웠다. 이걸 한국의 상황에 맞춰 바꾸는 게 쉽지 않았다. 같은 농경문화고 같은 농촌이지만 영화 속 음식도 너무 다르고, 결론의 결도 굉장히 다르다. 일단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의 결론에서는 그 마을이 오랫동안 유지한 전통 문화를 주인공이 수용하는 식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마을만의 어떤 독특한 전통은 파괴된 게 사실이다.

또 한국 관객은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를 볼 때 이 영화를 좋아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어떤 호의를 품고 봤을 것이다. 이 영화의 느리고 독특한 리듬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그 관객수가 만 명에서 이만 명 사이였다. 일본에서도 매니아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큰 흥행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에서는 독립영화가 아닌 이상 그보다는 많은 관객이 보게 해야 한다. 그래서 원작의 리듬과 호흡을 어떻게 대중적으로 가져올지 정말 많이 고민했다.

이 영화의 핵심 설정은 젊은 여성이 고향 마을에 가서 집 주변에 있는 식재료를 갖고 스스로 요리를 한다는 것이다. 이건 당연히 가져가야 하는 설정이다. 그런데 원작에서는 엄마가 훨씬 일찍 집을 떠난다. 만약 한국에서 엄마가 어린 딸을 혼자 시골에 두고 가면 어떨까? 이건 그 누구도 납득하기 힘든 선택이다. 그리고 단순히 우체부 아저씨가 뭘 가지고 와도 이상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생길 수 있다. 이런 치안과 관련한 현실적인 문제들도 있었다. 혼자 사는 젊은 여성이 농촌에서 안전하게 생활하는 걸 관객들이 편안하게 볼 수 있게 만드는 장치도 함께 고민했다. 관객들이 주인공을 계속 불안하게 지켜보도록 만들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혜원(김태리)의 주변의 친구들이 집을 자주 찾아오고, 고모도 가까운 곳에 살고, 진돗개도 키우는 설정들이 들어갔다. 엄마도 혜원이 좀 더 자란 뒤에 떠나는 걸로 했다.

참고로 제작자가 우리가 만드는 <리틀 포레스트>도 1부, 2부로 나눌지 물어봤다. 내가 그건 안 된다고 했다. <신과 함께>는 관객들이 2부를 기다릴 수 있겠지만 <리틀 포레스트> 1편을 보고 2편을 기다리는 관객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웃음). 그렇게 한 편 안에 사계절을 전부 넣기로 했다. 이런 고민들이 전부 합쳐져 오늘 본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가 만들어졌다.


정지연 추가로 질문하자면, 일본의 원작은 이야기가 뚜렷한 편이 아니다. 캐릭터들도 다들 활기찬 느낌은 아니고, 차분한 인물들이 느긋하게 지내는 느낌이다. 그런데 한국의 <리틀 포레스트>는 상대적으로 이야기가 더 뚜렷한 편이고 한국 이십 대 청년 특유의 생기 같은 것도 잘 느껴진다. ‘대중적’인 화법을 고려했을 때 어떤 걸 보여주고 싶었는지 궁금하다.

임순례 일단 영화에 커다란 서사가 없고, 주변 인물도 친구 두 명과 고모, 엄마, 우체부 정도라서 고민을 많이 했다. 그중 친구들이 양날의 검이었다. 이들 때문에 영화가 지루해지지 않지만, 동시에 이들은 혜원의 혼자 있는 시간을 적게 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혜원은 고민을 안고 있는 친구라서 혼자 조용히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친구들이 너무 자주 찾아온다(웃음). 이 부분을 많이 고민했지만 일단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좀 밝게 가져가고 싶었다.

사실 혜원이 처한 상황이 굉장히 어둡다. 시험도 다 떨어졌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계획도 없고 돈도 없다. 이런 우울한 현실을 우울하게 보여주면 관객도 같이 우울해질 것 같았다. 이런 색깔을 잡을 때 김태리 씨도 고민을 많이 했다. 이런 많은 고민을 가진 배역이 이렇게 밝아도 되나? 같은 고민이었는데, 이 부분은 내가 밝게 가자고 계속 이야기를 했다. 밝음을 보여준다고 해서 혜원이 갖고 있는 고민이 없어지는 건 아니고, 이 영화의 밝음이 관객을 영화 끝까지 이끌고 독려하는 힘이라고 설명했다. 아무래도 영화 안에 사계절이 다 들어가다 보니 호흡이 짧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기도 했다. 선택을 해야 할 문제였고, 연출자로서 밝음을 선택했다.

정지연 두 가지가 궁금하다. 하나는 혜원이 전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정리가 깔끔하게 안 된 상태에서 고향으로 와 헤어지기 전까지 관계를 조금 더 유지한다. 또 엄마와의 관계도 인상적이다. 영화의 엔딩이 약간 열려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엄마가 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혜원이 활짝 웃으며 엄마를 이해했을 수도 있다는 해석의 여지를 준다. 이렇게 엄마와의 관계가 일본 원작보다 좀 더 커진 면이 있다.

임순례 엄마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일 크게 잡았다. 나는 혜원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간 것, 임용고시 도전 같은 여러 가지 결정들이 엄마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봤다. 엄마와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가 혜원으로 하여금 원하지 않은 선택들을 하게 만든 것이다. 엄마로 인한 트라우마가 극복이 안 된 상태에서 연애든, 취업이든, 진로든 계속 자신이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걸로 봤다.

하지만 엄마 없는 집에서 1년 동안 요리를 하며 엄마와의 삶을 복기했고, 이를 통해 엄마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확인했고 자연스럽게 본인의 앞으로의 삶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다. 이런 흐름을 영화의 중심으로 잡았고, 그렇기 때문에 남자친구와의 결별은 상대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사건은 아니었다. 혜원이 그 일로 심한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 것 같다.

정지연 감독님은 그동안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계속 작품에 녹여냈다. <리틀 포레스트> 역시 취업에 실패한 이십 대 청년이 자신의 문제를 정리하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캐릭터들을 통해 청년 세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나 제시하고 싶은 희망의 모습이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이건 약간 사소한 건데,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의 엔딩을 보면 주인공이 마을 축제에 가서 전통춤을 춘다. 전통적인 공동체에 녹아드는 결론이다. 그런데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에는 의외로 농촌 공동체와의 커뮤니케이션은 다루지 않았다.


임순례 이 영화에서는 철저하게 요즘 젊은이들의 현실을 다뤄보고 싶었다. 요즘 귀농하는 친구들도 많지만, 그 친구들이 전부 그곳 사람들과 잘 섞이는 것 같지는 않더라. 농촌에서 살지만 개인의 삶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나도 조금은 옛날 세대라서 엔딩에 대한 고민이 정말 많았다. 여러 버전의 엔딩을 구상했는데 그중 하나는 혜원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 동네 어르신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그런 모습을 담은 엔딩도 있었다. 새로 이사 온 젊은 귀농 가족과 인사를 하거나, 동네 마을회관에서 친구들과 함께 어르신들에게 육개장 같은 요리를 대접하는 것도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시나리오를 본 우리 스탭들이 경악을 하더라. 무슨 <6시 내 고향>도 아니고 너무 촌스럽다는 거다(웃음). 그래서 마을 공동체에 섞이기보다는 자기 생활을 유지하며 뭔가 협조할 게 있으면 협조한다는 식으로 정리를 했다. 일본은, 특히 시골에는 공동체 문화가 좀 남아 있다고 보는데 한국은 사실 그런 문화가 거의 없다고 본다. 이런 점을 반영했다.

정지연 다른 인터뷰를 보니 감독님이 이번 영화는 지금까지 만든 영화 중 제일 예쁜 영화라고 이야기했다. 비주얼 컨셉을 많이 신경 썼다고 했는데, 공간을 보여주는 방식이나 촬영의 기본 원칙 등을 큰 틀에서 들어보고 싶다.

임순례 일단 인물이 많이 없는 영화고, 동시에 김태리 배우가 거의 모든 장면에 다 나온다. 그래서 일단 김태리 씨가 나오지 않는 장면에서 자연, 소품 등 모든 피사체들이 굉장히 예쁘게 나오길 바랐다. 그래서 조리 도구나 음식 플레이팅이나 자연의 색깔 같은 것에 신경을 많이 썼다.

<리틀 포레스트>의 촬영감독인 이승훈 감독이 <최악의 하루>(김종관), <더 테이블>(김종관)을 찍었었다. 그분의 촬영을 보니 여성 배우들을 정말 예쁘게 찍더라. 그래서 추천을 받고 이 영화들을 찍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김태리 배우도 잘 찍을 것 같아서 함께하기로 했다.

정지연 사계절을 다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각 계절마다 3주씩 촬영했다고 들었다. 그러면서 실제로 스탭들이 농사도 지었다고 하는데, 이런 방식에는 장단점이 있을 것 같다. 감독님도 1년 동안 기다리며 영화를 찍는 건 처음이었을 것이다.

임순례 어쨌든 사계절 동안 사계절을 다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계절은 다 실내에서 찍고 인서트만 따로 찍는다든가, 이런 방식은 쓰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사계절을 실제로 찍으면서 각 계절마다 어떤 작물이 나고, 하늘 색깔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관광지로서의 아름다움 같은 게 아니라 평범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우리가 잘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담아내고 싶었다. 워낙 시골을 좋아하고, 영화를 빨리빨리 찍는 사람이 아니라서 개인적으로는 큰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니까... 김태리 배우는 <1987>(장준환)을 찍고 있었고 류준열 씨는 <독전>(이해영)을 찍고 있었다. 아시겠지만 배우들이 영화를 찍는 동안 마음속으로 간직해야 하는 정서들이 있다. 그런데 특히 <독전> 같은 건...(웃음). 배우들이 그 감정을 오가는 게 정말 힘들었다고 하더라.

관객 1 영화의 영상도 정말 예뻤지만, 소리에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눈 밟는 소리라든지, 벌레 우는 소리, 튀김하는 소리 등등. 혹시 특별히 더 신경 쓴 소리가 있는지 궁금하다.

임순례 이 영화에 자극적인 요소가 없다 보니 시각적 요소는 물론 자연의 소리도 잘 전달하고 싶었다. 특히 대사가 많지 않다 보니 빗소리,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 소리, 음식 먹는 소리 같은 걸 잘 담으려고 했다. 후반 작업할 때도 사운드에 신경을 많이 썼다.

관객 2 중간에 혜원이 다시 서울로 간다. 거기서 취직을 해서 서울에서 사는 것 같았는데, 곧 다시 시골로 돌아온다. 이때 시골로 온 게 완전히 정착을 하려고 온 건지 다른 목적을 갖고 온 건지 사실 잘 모르겠다. 어쩌면 자기는 도시가 더 맞다고 생각한 걸 수도 있을 것 같다.

임순례 서울에 간 건 보증금 빼러 간 거다(웃음). 혜원은 시골에서 정말 귀농을 할 수도 있고 다시 다른 어떤 삶을 살 수도 있다. 정해진 삶은 없을 것 같다. 여기 시골도 완전히 정착을 한다기보다는 ‘아, 봄이다!’ 하며 그냥 몇 달 동안만 있는 걸지도 모른다. 다시 임용을 준비할 수도 있고, 재하와 사과를 팔 수도 있다. 여러 선택이 있겠지만 그 무엇을 하든 간에 어쨌든 혜원은 이전의 삶보다는 훨씬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시 8월 11일(토) <리틀 포레스트> 상영 후

정리 권세미 관객에디터

사진 목충헌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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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이 신지 전작 회고전 - 불안한 아이들과 우울한 어른들]



홀로 있기 위한 노력

- <이사>(소마이 신지, 1993)



렌코(다바타 도모코)는 홀로 있고자 한다. 소마이 신지의 <이사>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장면은 렌이 혼자 있는 모습이다. 어떤 사이즈의 숏으로든 화면 안에는 단지 렌만이 자리하고, 움직이지 않은 채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한다.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렌은 엄마로부터 달아나며, 아빠와 함께 서있기를 거부하고, 같은 반 친구들의 추궁에 불이 붙은 알코올 램프를 엎어버린다. 격렬한 몸부림 끝에 렌은 비로소 혼자 있게 된다. 자신의 동의 없이 결정된 부모의 결별을 무효화하기 위한 렌의 행동은 엉뚱하기보다 일방적이고 위험하며, 크고 작은 결과를 도출한다.


엄마 나즈나와 아빠 켄이치의 노골적인 다툼에 왜 자신을 낳았냐고 소리치는 렌의 일갈은 전반부에 산재한 렌의 돌발 행동과 영향을 압축한다. 렌이 부모와 친구들 틈을 빠져나가거나 그들을 마주보지 않고 계단 위아래를 오르내리면서 자리를 달리하는 건 되려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다. 렌은 화목했던 가족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이혼 부모를 둔 전학생과 우연히 함께 장을 보면서 비슷한 일상을 공유하지만 전학생의 이혼한 부모가 재취해 배다른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 렌은 충격을 받은 듯 전학생과 같은 공간으로부터 벗어난다.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찾은 렌은 숨죽여 있기도 하고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든 외면하기 위해 집안일을 한다. 보여주는 행동과 달리, 렌은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끝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만큼 고통스럽다.



비파호수에서 렌의 정처 없는 발걸음을 따라 마주하는 축제 현장의 볼거리는 화려하지만 왠지 낯설다. 렌의 여름방학 숙제를 궁금해하는 학교 친구들과 부모의 눈길로부터 벗어난 렌은 아무도 모르는 인파 속에서 축제 현장을 지켜본다. 거대한 볏짚이 거센 불길과 함께 타오르는 광경을 보면서 문득 렌이 아무 저항 없이 사람들과 같은 광경을 넋을 놓고 응시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현장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듯 렌이 앞으로 나서자 축제에 참여하고 있던 또래 소년들이 그녀를 제지한다. 볏짚이 활활 타면서 부서지는 광경은 전반부에서 느끼지 못했던 불가항력을 띠고 있다. 렌의 모든 저항을 무력화하는 불가항력, 그리고 익명의 인파 속에서 렌은 혼자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혼자가 되는 경험을 한다. 엄마, 아빠가 사라진 가운데 홀로 남은 렌을 위로할 수 있는 건 자기자신뿐이다.


어떤 슬픔과 외로움도 혼자 다독이고 이겨내야 하는 숙제라는 걸 깨닫자 렌은 비로소 그녀가 속한 사회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부모와 마주보길 꺼렸던 렌은 기차에서 엄마에게 이혼 서류를 돌려주고 함께 노래를 부른다. 세 사람이 같이 있는 삶을 불길과 함께 떠나보낸 렌에게 부모의 이혼은 더 이상 분노와 절망의 사건이 아니다. 나즈나와 켄이치는 렌 앞에 놓인 무수한 삶의 순간마다 마주치는 인물이지만 그들의 결정은 그들의 몫이다. 위기일발의 렌이 혼자 숨을 고르던 공간은 넓게 확장된다. 그녀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도 함께 있을 수 있다.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은 혼자 감당하는 것이라는 삶의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권세미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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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백 주년 기념 로버트 알드리치 특별전]




“알드리치의 영화에서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 <북극의 제왕> 상영 후 이용철 평론가 시네토크




김보년(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오늘 시네토크의 제목은 “할리우드: 고전기와 뉴웨이브 사이 어디쯤”이다. 알드리치의 공식 데뷔가 1950년대 초반이고, 1981년에 유작을 찍었다. 할리우드의 1950년대는 약간 애매한 시기인 것 같다. 흔히 1930~40년대 할리우드를 두고 ‘고전기’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1950년대는 전쟁도 겪은 후이고, 30~40년대에는 활동하지 않았던 감독들도 등장한 후라서 ‘고전기’라고 칭하기는 어렵다. 시대적 매핑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다.


이용철(영화평론가)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은 1918년에 태어났고, 1950년대에 데뷔했다. 아마 감독 중 가장 유명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일 것이다. 로드아일랜드에서 은행업과 출판업을 하던 집안에서 태어났고, 외가에는 록펠러가 있었고, 한 다리 건너면 부통령이 나오기도 하는 - 한 마디로 큰 권력과 재력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알드리치는 1940년대에 결혼을 하자마자 LA로 이사했다. 이후 10년 정도 조감독을 하다 감독으로 데뷔한다.

알드리치가 데뷔 초기에 만든 작품 중 <빅 나이프>(1955)라는 작품이 있다. 그 영화에서 감독의 이름을 일곱 명 정도 나열한다. 조지 스티븐스,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 존 휴스턴 등. 그런데 그 사람들의 이름 중 존 포드나 하워드 혹스는 없다. 그때 이미 존 포드나 하워드 혹스는 황혼기에 들어선 때였다. 알드리치는 1918년생인데, 1901년부터 1910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 대부분 ‘할리우드 고전기’의 마지막에 서 있었던 거다.

그 다음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감독들이 나온다. 우선 1920~30년대에 태어난 감독들, 밥 라펠슨, 로버트 알트만 등이 있고, 그 사람들을 이어서 1940년대생, 그러니까 영화를 학교에서 공부한 세대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가 나온다. 이들은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꽃을 피운 세대였지만 동시에 끝을 내버린 감독들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 이르면 ‘반뉴웨이브 영화’들이 등장한다. <아마데우스>(밀로스 포만, 1984), <간디>(리처드 아텐보로, 1982), <애정의 조건>(제임스 브룩스, 1983), <보통 사람들>(로버트 레드포드, 1980) 등. 그리고 알드리치는 고전기와 뉴아메칸 시네마 사이에 위치한다. 스튜디오는 막을 내리던 시기였고, 사뮤엘 퓰러나 니콜라스 레이 등의 감독이 당시에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세 감독이 두 시기 사이의 다리를 놓아준 거라고 볼 수 있다.

알드리치는 스타일보다 인물을 중요하게 봐야 하는 감독이다. 알드리치 영화에는 고전기엔 상상도 못 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1962)에 나오는 사이코패스 같은 인물을 포함해 고전기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어택>(1956)은 전쟁영화인데, 보통의 ‘고전’ 전쟁영화라면 나쁜 놈은 독일군, 착한 영웅은 미국인으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게 아니다. 겁 많고 용기 없는 대위가 주인공으로 나와 병사들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고 결국 일을 그르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어택”이지만, 내용은 “어떻게 소위가 대위를 죽이게 되었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전쟁영화는 그 전에 나오지 못했다.

조안 크로포드가 나오는 <가을의 낙엽>(1956)은 로맨틱한 영화인 것처럼 시작하는데, 사랑을 고백한 남자가 알고 보면 사이코패스다. 이렇게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이 등장하는 알드리치 영화의 경향은 마지막까지 지속된다. <미합중국 최후의 날>(1977)이라는 후기 작품을 보면 놀랍게도 보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통령을 공개 처형하는 내용까지 나온다.

알드리치의 영화가 스타일 측면에서 엄청난 매력은 없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의 등장인물들은 이후 할리우드 영화에 큰 영향을 준다. <조지 수녀의 살해>(1968)에서는 레즈비언 클럽의 모습을 아주 긴 롱테이크로 보여주고. 레즈비언 섹스를 그대로 화면에 보여주기도 했다. 당시에는 아주 충격적인 시도였다. ‘정상’이 아닌 인물들을 일관되게 등장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알드리치가 현대 영화에 끼친 영향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김보년 그렇다면 뉴아메리칸 시네마를 어떤 개념으로 봐야할까. 뉴아메리칸 시네마는 ‘고전 할리우드’ 만큼이나 정의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이용철 영화에 있어뉴웨이브’를 정의하기 난감한 나라가 영국과 미국인 것 같다. 프랑스는 확실하다. 주동자, 집중된 시기, 선언이 확실히 있다. 미국은 그나마 시발점이 된 하나의 영화, <이지 라이더>(데니스 호퍼, 1969) 때문에 선명한 부분이 있긴 하다. 1969년에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스튜디오들의 인식을 바꿔 놓았다. 그런데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폭발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다가 오히려 몰락시킨 게 바로 그 스튜디오들이다.

당시 소니가 <이지 라이더>를 배급했고, 이 영화가 흥행하며 스튜디오들은 젊은 사람들이 더 이상 늙은 영화를 안 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스튜디오들는 뉴아메리칸 시네마에 맞는 영화들을 만들어내려고 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죽여버렸다. 방법은 간단하다. 돈을 준다고 약속한 뒤 주지 않은 것이다. 피터 폰다에게 <하이어드 핸드(The Hired Hand)>(1971)라는 영화를 찍게 하고는 배급을 안 해준 경우도 있었다.

UCLA의 젊은이 중 영화를 가장 잘 찍는다고 소문난 사람들이 모여서 집도 사고 장비도 사서 만든 조에트로프(zoetrope) 스튜디오가 있었다. 이 스튜디오도 다른 스튜디오들에 의해 비슷한 이유로 해체된다. 1970년대가 지날 즈음 보수적인 시대가 오면서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시대는 진다. <대부>(1972)나 <스타워즈 4>(1977) 같은 영화들이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정점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묘비에 가깝다.

알드리치는 스튜디오로부터 간섭을 막는 방법을 일찍 알았다. 알드리치는 자기 회사를 세운다. 당시 감독들은 보통 스튜디오에 의해 고용되었지만, 알드리치는 회사를 세워 직접 연출과 제작을 한다. 10여 년 동안 조연출을 하면서 깨우친 걸 수도 있고, 젊은 시절 재무를 전공한 사람이기도 했다. 알드리치가 데뷔 전 꿈꾸던 직업은 프로듀서였다. 하지만 르누아르나 채플린, 조셉 로지 같은 위대한 감독들과 작업을 하면서 감독을 꿈꾸는 사람이 된다.

김보년 알드리치 감독은 1930~40년대에는 영화를 만들지 않았고, 1950년대에 영화를 만들기 시작해 1980년대까지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그런데 그의 작품들을 보면 뉴아메리칸 시네마와 교집합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용철 알드리치의 영화적 뿌리는 고전기에 있다. 뉴아메리칸 시네마에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이 사람의 뿌리는 고전기 장르물에 있다. 작가적인 스타일에 욕심이 많았던 사람도 아니다. 알드리치는 웨스턴, 누아르, 사회물 등 여러 장르를 찍었는데, 그건 사실 자신만의 스타일이 없다는 것과 같다. 그는 고전기적 장르 영화 안에 자기만의 인물들을 꽂아넣는 감독이었다.

김보년 알드리치와 같이 떠오르는 사람으로는 사뮤엘 퓰러, 샘 페킨파 등이 있다. 이런 마초들의 영화라 할 만한 작품을 만들었던 감독들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용철 알드리치의 작품들이 마초 영화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알드리치는 자기가 원해서 특정 장르의 영화만 찍은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메이저 스튜디오에게 돈을 받아서 아르바이트처럼 작품을 만들어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때 주로 함께 작업한 배우들이 버트 랭카스터, 버트 레이놀즈 같은 남성성을 대표하는 배우들이다. 알드리치가 언젠가 그런 얘기를 했다. 자기도 뮤지컬이나 멜로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데 스튜디오들이 제안한 배우들을 데리고서는 마초 영화밖에 찍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알드리치는 ‘마초 감독’으로 착각될 수 있지만, 심리적으로 무척 예민한 작품을 찍은 것도 사실이다. 알드리치 영화에 찍혀있는 마초라는 낙인은 일부는 맞지만, 일부는 오해도 있는 것 같다. <허쉬 허쉬 스윗 샬롯> 같은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인물을 만드는 데 성의 구분을 두지는 않았다.

김보년 오늘 함께 본 <북극의 제왕>은 보기 전부터 악명을 너무 많이 들어서 굉장히 ‘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영화의 결론이 안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르신들이 젊은 세대를 향해 보내는 응원, 또는 충고의 영화 같았다.


이용철 알드리치의 영화 중 특히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들은 관객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크게 주는 편이다. <허쉬허쉬 스윗 샬롯>(1964),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조지 수녀의 살해> 같은 영화들은 좀 공포스럽다. 하지만 다른 영화들은 그렇게 무서운 편은 아니다.

<북극의 제왕>에는 탄생 비화가 있다. 알드리치의 초기 대표작 중 <더티 더즌>(19670이 있다. 흥행에 크게 성공했고 관객들이 알드리치의 이름을 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폭스는 <더티 더즌>의 주인공이었던 리 마빈과 알드리치의 만남을 다시 한 번 성사시키려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북극의 제왕>이다. 사실 <북극의 제왕>을 몇 년 동안 준비했던 건 샘 페킨파다. 페킨파가 원래 이 영화를 파라마운트와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폭스가 뺏어온 거다. 샘 페킨파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못 만들어서 짜증나긴 하지만 나도 알드리치의 팬이니 알드리치 정도면 괜찮다고. 개인적으로 알드리치가 만들었기 때문에 훨씬 고전적인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참고로 <북극의 제왕>은 흥행에는 실패했다).

알드리치 영화 중 흥행에 성공한 작품으로는 <롱기스트 야드>(1974)가 있다. 이 영화에서 알드리치는 시스템을 조롱한다. 당시 기준으로 ‘정상’을 벗어난 사람들을 모아 목표에 성공하는 이야기다. 그렇게 권력층과 시스템을 조롱하는 거다.

아웃사이더에 관한 이야기로 오늘 시간을 끝내면 좋겠다. 알드리치는 권력가의 아들로 태어나 양쪽을 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권력층 중 얼마나 한심하고 야비한 사람이 많은지도 봤고, 할리우드에서 10여 년 동안 밑바닥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걸 자기 작품에 투영하지 않았을까. 알드리치는 아웃사이더 주인공을 통해 투쟁과 승리, 이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알드리치 영화의 반 이상에서 주인공들이 죽는다. 이 사람의 영화에서는 죽음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 아웃사이더의 투쟁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주인공들을 죽였을까? 알드리치는 아웃사이더가 소중하다는 걸 알지만 동시에 이들이 사회적 합의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즉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알드리치의 영화에서 죽음은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루저의 훌륭한 죽음은 평범한 사람들의 승리보다 더 값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투쟁 끝에 명예롭게 죽는 건 시시한 승리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알드리치의 마지막 작품인 <캘리포니아 돌스>(1981)의 원제는 “…All The Marbles”다. ‘운명’, 또는 ‘하늘에 맡긴다’는 이 말의 뜻이 알드리치 영화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기고 죽는 건 하늘만이 안다, 죽든 살든 싸워 보자. 그게 이 영화의 주제다. 일견 바보스러워 보이는 여성들이 처절하게 싸운다. 그리고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나는 내 삶에서 투쟁하겠다는 것이 알드리치의 영화의 일관된 주제다. 그걸 알고 보면 <캘리포니아 돌스>가 코미디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울게 되는 영화다. 이 일관된 주제를 떠올리면서 알드리치의 영화를 한 편씩 보면 좋을 것 같다.

이번에 <북극의 제왕>을 포함해 알드리치의 영화를 여러 편 다시 봤다. 마초 감독이라는 단순한 인식은 오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관점에서 알드리치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일시 7월 1일(일) 오후 4시 <북극의 제왕> 상영 후

정리 황선경 자원활동가

사진 여해연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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