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백 주년 기념 로버트 알드리치 특별전]




“알드리치의 영화에서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 <북극의 제왕> 상영 후 이용철 평론가 시네토크




김보년(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오늘 시네토크의 제목은 “할리우드: 고전기와 뉴웨이브 사이 어디쯤”이다. 알드리치의 공식 데뷔가 1950년대 초반이고, 1981년에 유작을 찍었다. 할리우드의 1950년대는 약간 애매한 시기인 것 같다. 흔히 1930~40년대 할리우드를 두고 ‘고전기’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1950년대는 전쟁도 겪은 후이고, 30~40년대에는 활동하지 않았던 감독들도 등장한 후라서 ‘고전기’라고 칭하기는 어렵다. 시대적 매핑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다.


이용철(영화평론가)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은 1918년에 태어났고, 1950년대에 데뷔했다. 아마 감독 중 가장 유명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일 것이다. 로드아일랜드에서 은행업과 출판업을 하던 집안에서 태어났고, 외가에는 록펠러가 있었고, 한 다리 건너면 부통령이 나오기도 하는 - 한 마디로 큰 권력과 재력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알드리치는 1940년대에 결혼을 하자마자 LA로 이사했다. 이후 10년 정도 조감독을 하다 감독으로 데뷔한다.

알드리치가 데뷔 초기에 만든 작품 중 <빅 나이프>(1955)라는 작품이 있다. 그 영화에서 감독의 이름을 일곱 명 정도 나열한다. 조지 스티븐스,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 존 휴스턴 등. 그런데 그 사람들의 이름 중 존 포드나 하워드 혹스는 없다. 그때 이미 존 포드나 하워드 혹스는 황혼기에 들어선 때였다. 알드리치는 1918년생인데, 1901년부터 1910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 대부분 ‘할리우드 고전기’의 마지막에 서 있었던 거다.

그 다음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감독들이 나온다. 우선 1920~30년대에 태어난 감독들, 밥 라펠슨, 로버트 알트만 등이 있고, 그 사람들을 이어서 1940년대생, 그러니까 영화를 학교에서 공부한 세대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가 나온다. 이들은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꽃을 피운 세대였지만 동시에 끝을 내버린 감독들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 이르면 ‘반뉴웨이브 영화’들이 등장한다. <아마데우스>(밀로스 포만, 1984), <간디>(리처드 아텐보로, 1982), <애정의 조건>(제임스 브룩스, 1983), <보통 사람들>(로버트 레드포드, 1980) 등. 그리고 알드리치는 고전기와 뉴아메칸 시네마 사이에 위치한다. 스튜디오는 막을 내리던 시기였고, 사뮤엘 퓰러나 니콜라스 레이 등의 감독이 당시에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세 감독이 두 시기 사이의 다리를 놓아준 거라고 볼 수 있다.

알드리치는 스타일보다 인물을 중요하게 봐야 하는 감독이다. 알드리치 영화에는 고전기엔 상상도 못 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1962)에 나오는 사이코패스 같은 인물을 포함해 고전기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어택>(1956)은 전쟁영화인데, 보통의 ‘고전’ 전쟁영화라면 나쁜 놈은 독일군, 착한 영웅은 미국인으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게 아니다. 겁 많고 용기 없는 대위가 주인공으로 나와 병사들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고 결국 일을 그르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어택”이지만, 내용은 “어떻게 소위가 대위를 죽이게 되었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전쟁영화는 그 전에 나오지 못했다.

조안 크로포드가 나오는 <가을의 낙엽>(1956)은 로맨틱한 영화인 것처럼 시작하는데, 사랑을 고백한 남자가 알고 보면 사이코패스다. 이렇게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이 등장하는 알드리치 영화의 경향은 마지막까지 지속된다. <미합중국 최후의 날>(1977)이라는 후기 작품을 보면 놀랍게도 보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통령을 공개 처형하는 내용까지 나온다.

알드리치의 영화가 스타일 측면에서 엄청난 매력은 없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의 등장인물들은 이후 할리우드 영화에 큰 영향을 준다. <조지 수녀의 살해>(1968)에서는 레즈비언 클럽의 모습을 아주 긴 롱테이크로 보여주고. 레즈비언 섹스를 그대로 화면에 보여주기도 했다. 당시에는 아주 충격적인 시도였다. ‘정상’이 아닌 인물들을 일관되게 등장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알드리치가 현대 영화에 끼친 영향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김보년 그렇다면 뉴아메리칸 시네마를 어떤 개념으로 봐야할까. 뉴아메리칸 시네마는 ‘고전 할리우드’ 만큼이나 정의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이용철 영화에 있어뉴웨이브’를 정의하기 난감한 나라가 영국과 미국인 것 같다. 프랑스는 확실하다. 주동자, 집중된 시기, 선언이 확실히 있다. 미국은 그나마 시발점이 된 하나의 영화, <이지 라이더>(데니스 호퍼, 1969) 때문에 선명한 부분이 있긴 하다. 1969년에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스튜디오들의 인식을 바꿔 놓았다. 그런데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폭발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다가 오히려 몰락시킨 게 바로 그 스튜디오들이다.

당시 소니가 <이지 라이더>를 배급했고, 이 영화가 흥행하며 스튜디오들은 젊은 사람들이 더 이상 늙은 영화를 안 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스튜디오들는 뉴아메리칸 시네마에 맞는 영화들을 만들어내려고 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죽여버렸다. 방법은 간단하다. 돈을 준다고 약속한 뒤 주지 않은 것이다. 피터 폰다에게 <하이어드 핸드(The Hired Hand)>(1971)라는 영화를 찍게 하고는 배급을 안 해준 경우도 있었다.

UCLA의 젊은이 중 영화를 가장 잘 찍는다고 소문난 사람들이 모여서 집도 사고 장비도 사서 만든 조에트로프(zoetrope) 스튜디오가 있었다. 이 스튜디오도 다른 스튜디오들에 의해 비슷한 이유로 해체된다. 1970년대가 지날 즈음 보수적인 시대가 오면서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시대는 진다. <대부>(1972)나 <스타워즈 4>(1977) 같은 영화들이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정점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묘비에 가깝다.

알드리치는 스튜디오로부터 간섭을 막는 방법을 일찍 알았다. 알드리치는 자기 회사를 세운다. 당시 감독들은 보통 스튜디오에 의해 고용되었지만, 알드리치는 회사를 세워 직접 연출과 제작을 한다. 10여 년 동안 조연출을 하면서 깨우친 걸 수도 있고, 젊은 시절 재무를 전공한 사람이기도 했다. 알드리치가 데뷔 전 꿈꾸던 직업은 프로듀서였다. 하지만 르누아르나 채플린, 조셉 로지 같은 위대한 감독들과 작업을 하면서 감독을 꿈꾸는 사람이 된다.

김보년 알드리치 감독은 1930~40년대에는 영화를 만들지 않았고, 1950년대에 영화를 만들기 시작해 1980년대까지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그런데 그의 작품들을 보면 뉴아메리칸 시네마와 교집합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용철 알드리치의 영화적 뿌리는 고전기에 있다. 뉴아메리칸 시네마에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이 사람의 뿌리는 고전기 장르물에 있다. 작가적인 스타일에 욕심이 많았던 사람도 아니다. 알드리치는 웨스턴, 누아르, 사회물 등 여러 장르를 찍었는데, 그건 사실 자신만의 스타일이 없다는 것과 같다. 그는 고전기적 장르 영화 안에 자기만의 인물들을 꽂아넣는 감독이었다.

김보년 알드리치와 같이 떠오르는 사람으로는 사뮤엘 퓰러, 샘 페킨파 등이 있다. 이런 마초들의 영화라 할 만한 작품을 만들었던 감독들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용철 알드리치의 작품들이 마초 영화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알드리치는 자기가 원해서 특정 장르의 영화만 찍은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메이저 스튜디오에게 돈을 받아서 아르바이트처럼 작품을 만들어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때 주로 함께 작업한 배우들이 버트 랭카스터, 버트 레이놀즈 같은 남성성을 대표하는 배우들이다. 알드리치가 언젠가 그런 얘기를 했다. 자기도 뮤지컬이나 멜로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데 스튜디오들이 제안한 배우들을 데리고서는 마초 영화밖에 찍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알드리치는 ‘마초 감독’으로 착각될 수 있지만, 심리적으로 무척 예민한 작품을 찍은 것도 사실이다. 알드리치 영화에 찍혀있는 마초라는 낙인은 일부는 맞지만, 일부는 오해도 있는 것 같다. <허쉬 허쉬 스윗 샬롯> 같은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인물을 만드는 데 성의 구분을 두지는 않았다.

김보년 오늘 함께 본 <북극의 제왕>은 보기 전부터 악명을 너무 많이 들어서 굉장히 ‘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영화의 결론이 안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르신들이 젊은 세대를 향해 보내는 응원, 또는 충고의 영화 같았다.


이용철 알드리치의 영화 중 특히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들은 관객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크게 주는 편이다. <허쉬허쉬 스윗 샬롯>(1964),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조지 수녀의 살해> 같은 영화들은 좀 공포스럽다. 하지만 다른 영화들은 그렇게 무서운 편은 아니다.

<북극의 제왕>에는 탄생 비화가 있다. 알드리치의 초기 대표작 중 <더티 더즌>(19670이 있다. 흥행에 크게 성공했고 관객들이 알드리치의 이름을 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폭스는 <더티 더즌>의 주인공이었던 리 마빈과 알드리치의 만남을 다시 한 번 성사시키려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북극의 제왕>이다. 사실 <북극의 제왕>을 몇 년 동안 준비했던 건 샘 페킨파다. 페킨파가 원래 이 영화를 파라마운트와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폭스가 뺏어온 거다. 샘 페킨파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못 만들어서 짜증나긴 하지만 나도 알드리치의 팬이니 알드리치 정도면 괜찮다고. 개인적으로 알드리치가 만들었기 때문에 훨씬 고전적인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참고로 <북극의 제왕>은 흥행에는 실패했다).

알드리치 영화 중 흥행에 성공한 작품으로는 <롱기스트 야드>(1974)가 있다. 이 영화에서 알드리치는 시스템을 조롱한다. 당시 기준으로 ‘정상’을 벗어난 사람들을 모아 목표에 성공하는 이야기다. 그렇게 권력층과 시스템을 조롱하는 거다.

아웃사이더에 관한 이야기로 오늘 시간을 끝내면 좋겠다. 알드리치는 권력가의 아들로 태어나 양쪽을 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권력층 중 얼마나 한심하고 야비한 사람이 많은지도 봤고, 할리우드에서 10여 년 동안 밑바닥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걸 자기 작품에 투영하지 않았을까. 알드리치는 아웃사이더 주인공을 통해 투쟁과 승리, 이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알드리치 영화의 반 이상에서 주인공들이 죽는다. 이 사람의 영화에서는 죽음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 아웃사이더의 투쟁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주인공들을 죽였을까? 알드리치는 아웃사이더가 소중하다는 걸 알지만 동시에 이들이 사회적 합의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즉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알드리치의 영화에서 죽음은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루저의 훌륭한 죽음은 평범한 사람들의 승리보다 더 값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투쟁 끝에 명예롭게 죽는 건 시시한 승리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알드리치의 마지막 작품인 <캘리포니아 돌스>(1981)의 원제는 “…All The Marbles”다. ‘운명’, 또는 ‘하늘에 맡긴다’는 이 말의 뜻이 알드리치 영화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기고 죽는 건 하늘만이 안다, 죽든 살든 싸워 보자. 그게 이 영화의 주제다. 일견 바보스러워 보이는 여성들이 처절하게 싸운다. 그리고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나는 내 삶에서 투쟁하겠다는 것이 알드리치의 영화의 일관된 주제다. 그걸 알고 보면 <캘리포니아 돌스>가 코미디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울게 되는 영화다. 이 일관된 주제를 떠올리면서 알드리치의 영화를 한 편씩 보면 좋을 것 같다.

이번에 <북극의 제왕>을 포함해 알드리치의 영화를 여러 편 다시 봤다. 마초 감독이라는 단순한 인식은 오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관점에서 알드리치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일시 7월 1일(일) 오후 4시 <북극의 제왕> 상영 후

정리 황선경 자원활동가

사진 여해연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하라 가즈오 특별전: 물러서지 않는 카메라]



“당시 오쿠자키의 심정이 여전히 궁금하다”

- <천황 군대는 진군한다> 상영 후 하라 가즈오 감독과의 대화




변성찬(영화평론가) 하라 가즈오 감독이 거의 13년 만에 새 작품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을 발표했다. 1972년에 첫 작품을 발표한 뒤 지금까지 8편의 영화만 만들었다. 과작의 감독인 셈인데 이번 영화제에서는 그중 6편을 볼 수 있다. 먼저 감독님의 인사를 듣도록 하겠다.

하라 가즈오(감독) 어제 한국의 젊은 다큐멘터리 감독들과 식사를 했다. 지금 제작 중인 작품들의 영상을 볼 수 있었는데 다들 아주 훌륭한 작품들이라 나도 질 수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영화 연출은 나이와 상관없이 어느 쪽이 더 재미있는지 싸우는 세계다. 젊은 감독들에게 지지 않겠다. 이게 내 인사말이다.

변성찬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 ‘에너지’와 ‘문제적 인물’이란 단어가 저절로 떠오른다. 무엇보다 인물이 갖고 있는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에너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에너지의 또 다른 원인은 인물과 카메라 사이의 관계에 있다. 인물과 카메라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늘 본 <천황 군대는 진군하다>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라 생각한다. 먼저 오쿠자키 겐조라는 이 문제적 인물을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영화를 시작했는지 듣고 싶다.

하라 가즈오 매년 1월 천황에게 인사를 하는 의식이 있는데 이때 오쿠자키가 파칭코 구슬을 쏘는 사건을 일으켰다. 한 기자가 이 사건을 역사적인 사건이라 생각하고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에게 영화화 제안을 했다. 영화를 찍기로 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오쿠자키의 재판정에 몰래 카메라를 들고 들어갔다. 하지만 당시 카메라는 찍으면 ‘지~’하는 소리가 크게 났고, 결국 재판정에서 나와야 했다(웃음). 그리고 10년 동안 아무것도 찍지 못했다.

10년 뒤, 나는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촬영 현장에 촬영 보조로 참여했다. 그때 감독님에게 재미있는 영화를 찍고 싶다고 했더니 오쿠자키 겐조라는 남자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당시 이마무라 감독님은 극영화를 찍고 있던 때라 다큐멘터리를 찍을 생각이 없었고, 나는 다큐멘터리를 두 편 찍었었기 때문에 내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오쿠자키를 만났다.


변성찬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오쿠자키가 감독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래서 카메라와 인물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생긴다. 감독님은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얼마나 예측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하라 가즈오 긴 얘기가 될 것 같다. 내가 오쿠자키보다 20살 정도 어리다. 오쿠자키는 나같이 어린 사람이 감독인 것 자체를 용납하지 못했다. 오쿠자키는 종종 ‘하라 씨는 감독이 아니라 촬영하는 사람이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걸 찍으면 된다’고 말했다. 촬영 중간에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편집을 한 뒤 어느 쪽이 더 재미있는지 비교해 보자는 말도 했다. 하지만 당시는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 시대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돈이 엄청 많이 들었다. 그래서 정말 그만두겠다고, 오쿠자키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면 젊은 카메라맨을 고용해서 8mm로 싸게 찍으라고 강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내가 찍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더라(웃음).

처음 제작을 시작했을 때 어떤 영화를 만들지 함께 논의했었다. 그때 오쿠자키는 전쟁 영화를 만들어도 아무도 보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는 어떤 ‘사건’을 저지르고 싶어했다. 일본에서는 매년 교과서 문제가 생긴다. 일본의 전쟁 행위를 설명하는 말을 조금 약한 표현으로 바꾸면서 생기는 문제다. 그 뉴스가 나왔을 때 오쿠자키는 문부대신을 ‘타겟’으로 삼으려 했다. 실제로 문부대신이 탄 차를 자신의 차로 들이받겠다는 말도 했다. 또 꽃다발에 칼을 숨기고 야스쿠니 신사로 들어가 난동을 부릴 테니 그걸 찍어달라고도 했다. 그런 사건을 찍는 건 괜찮지만, 거기에 얽혀 오쿠자키가 체포되면 영화를 만들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에 담긴 인육과 관련된 내용을 내가 제안했다. 오쿠자키가 당시 병사들을 찾아가 진실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을 영화로 만들면 재밌겠다고 생각했고,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주지는 않았었다. 오쿠자키는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들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면서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면 한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웃음).


변성찬 오쿠자키가 체포되면 더 이상 영화를 찍을 수 없다고 했는데, 결국 영화의 끝부분에 그게 현실이 된다.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 실제로 그는 중대장에게 총을 쏘려고 했다. 감독님과 사전에 얘기가 된 일인지 궁금하다.


하라 가즈오 영화의 삼분의 일 정도가 지났을 때 오쿠자키는 이미 중대장을 죽이겠다는 결의를 했다. 나에게 중대장을 죽이는 걸 찍어달라고도 말했다. 내가 살인을 제안한 게 아니다. 오쿠자키의 그 말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감독이 출연자에게 뭔가를 제안하고 거절당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지만 출연자가 살인을 하겠다고 감독에게 말하는 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찍어야 할지 말지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오쿠자키는 그걸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세상에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찍을 수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은 나밖에 없을 거라고 말하더라. 오른손으로는 촬영을 하면서 왼손으로 살인을 막을까, 같은 생각도 했다. 하지만 결국 촬영하면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살인을 전제로 한 현장에 가서 촬영을 하는 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오쿠자키에게 직접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고 그냥 촬영을 하겠다는 답을 주지 않았다. 그랬더니 오쿠자키는 내가 촬영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두 번 다시 살인 장면을 찍어달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변성찬 감독님의 말을 들으니 오쿠자키가 더 알 수 없는, 굉장히 예외적인 인물인 것 같다. 감독님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두 번의 공백이 있다. 1974년에 <극사적 에로스>를 만들고 다음 작품인 <천황 군대는 진군한다>를 1987년에 발표했다. 이게 첫 번째 공백이고 두 번째 공백은 촬영만 8년이 걸린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이다. 오쿠자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천황 군대는 진군하다>를 만드는 데까지 어느 정도의 기간이 걸렸나?


하라 가즈오 촬영 시작에서 오쿠자키의 구속까지 1년 반 정도 걸렸다. 그런데 뉴기니에 갔을 때 찍은 필름을 몰수당했다. 그 촬영 분량이 내가 생각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부분이 없어지면서 - 나는 마지막 장면이 없는 영화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 절망적인 마음으로 일 년 동안 아무것도 못했다. 필름까지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숨기고 거의 포기한 상태로 있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니 영화를 완성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어서 그때부터 1년 정도 편집을 했다. 그래서 제작에 총 5년이 걸렸다.


관객 1 두 가지 질문이 있다. 하나는 <천황 군대는 진군한다>에 대한 질문이다. 전반부에는 희생자의 당사자들이 직접 출연하는데 후반부에는 황당하게도 오쿠자키의 아내가 실제 인물의 대역으로 출연한다.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두 번째는 감독님의 작품 세계에 대한 질문이다. 감독님은 영화 안에서 철저히 관찰자의 입장에 머무르는 것 같다. 무리를 해서라도 이 인물을 완전히 파헤치겠다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 같다. 이 작품뿐 아니라 <극사적 에로스>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다. 왜 이런 전략을 취하는지 궁금하다.


하라 가즈오 영화 촬영이 진행되면서 유족들이 오쿠자키와 함께 다니는 것을 불편해하기 시작했다. 유족들은 부담을 느꼈고 결국 같이 행동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 후 오쿠자키는 ‘대역’을 쓰고 싶다며 내 어머니에게 그걸 부탁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이상해서 거절을 했고, 결국 오쿠자키의 부인이 출연하게 됐다. 오쿠자키는 ‘리얼리스트’다. 상대방은 대역인 줄 모르니까 일단 죄송하다는 사과를 받을 수 있을 거라 계산한 것이다. 혼자 가는 것보다 유족과 같이 가는 게 사과를 받기 더 쉬울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고 그게 대의명분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오쿠자키 특유의 리얼리즘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여기에 유족이 있는데 죄송하지 않냐’고 상대에게 소리를 지르는데, 정말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질문에 답을 하자면... 오쿠자키는 원래 중고차를 파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중고차를 파는 오쿠자키의 일상을 찍어도 이 영화에는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쿠자키는 천황제를 부수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었고, 나는 그의 그런 삶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당신이 하고 싶은 걸 카메라 앞에서 해보라고 제안을 했다. 이를 통해 오쿠자키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했다.


변성찬 감독님의 말을 들으며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상해 보았다. 일단 영화가 시작되면 인물이 상황을 주도하고 감독님은 그를 관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촬영 이전 단계에서는 감독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조정이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관객 2 인도네시아 촬영 분량을 모두 몰수당했다. 아마 위령제를 지내지 않았을까 추측했는데, 어떤 장면을 촬영하려고 했었는지 궁금하다.


하라 가즈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려면 30분은 더 걸릴 것 같아서 아주 간단하게 얘기해 보겠다. 촬영을 하던 시기가 그 지역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때라서 촬영 허가가 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뇌물을 써서 일 주일간 있을 수 있는 비자를 받았다.

그렇게 인도네시아에 갔는데 오쿠자키가 호텔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경찰이 출동했다. 그런데도 오쿠자키는 계속 자기가 천황에게 파칭코 구슬을 쐈고, 이곳 뉴기니에서 살아남은 남자라고 얘기했다. 결국 경찰이 군인을 불렀고 중위 정도쯤 되는 군인이 호텔로 왔다. 오쿠자키는 그에게 비싼 요리를 시켜주고 뇌물을 주고, 내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까지 주면서 얘기를 시작했다. 오쿠자키는 자신이 전쟁에서 어떤 일을 겪었고 전우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게 연기라고 생각했지만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일단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결국 군인이 오쿠자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고, 그렇게 오쿠자키가 포로로 붙잡혔던 마을까지 함께 갔다. 여기서도 이장 같은 사람에게 뇌물을 주면서 여러 장면을 찍을 수 있었고 더 높은 계급의 군인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 비록 뇌물을 썼지만 오쿠자키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군대 사무실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는 순간 사람들이 촬영 허가를 받았냐고 물으며 지금까지 촬영한 필름을 다 내놓으라고 했다. 겁을 먹고 일단 필름을 다 꺼냈더니 오쿠자키는 그 위에 양반다리로 앉아서 갖고 갈거면 갖고 가라고 외쳤고, 통역자는 겁을 먹고 도망갔다. 통역도 없는 상태에서 결국 필름을 다 몰수 당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라고 생각했던 분량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되면서 너무 힘이 없어져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여기까지만 얘기하겠다(웃음).


관객 3 오쿠자키 겐조가 출소 후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오쿠자키는 한이 많이 맺혀서 그런지 폭력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것 같았다. 감독님은 오쿠자키의 이런 폭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


하라 가즈오 오쿠자키는 감옥에서 12년 동안 복역했다. 그 사이에 나에게 편지가 왔다. <천황 군대는 진군한다>의 2편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12년 동안 고민했는데 결국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편지에 답장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있는데 그중 오쿠자키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사람이 있었다. 성인 영화를 찍는 사람들이었는데, 오쿠자키가 출소하자마자 차를 태워 도쿄까지 갔다. 그리고는 SM을 소재로 한 성인 영화에 출연을 시켰고, M 역할을 견디다 못한 오쿠자키가 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촬영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소동까지 촬영해서 판매했고, 오쿠자키는 화가 나 고베로 돌아갔다. 그리고 고베에서 혼자 8년 동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8년 동안 나를 증오하고 원망했다고 전해 들었다.

폭력에 대한 얘기는 어렵다. 폭력이라는 말을 쓸 때는 주의해야 한다. 폭력에는 여러 레벨이 있다. 국가의 폭력은 전쟁 같은 것이다. 국가는 군대나 경찰도 소유하고 있다. 이런 국가에 대항하려면 돌을 던지는 식의 폭력을 쓸 수밖에 없다.

영화 안에서 오쿠자키가 사람을 때리는 장면이 두 번 정도 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자세히 보면 진짜로 때리는 것이 아니다. 전우들을 찾아다니며 처형이나 인육에 대한 얘기를 들으려 하지만 상대는 당연히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 일본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폭력에 노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맞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폭력이라는 낯선 순간에 노출되며 숨기고 있던 걸 드러내는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 아마 폭력이 없었다면 인육을 먹었다는 비밀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에 갇혀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육체적으로 자극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폭력을 쓰는 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대장의 아들에게 총을 쏜 건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이다. 오쿠자키가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폭력을 쓸 것이라고 얘기한 건 테러리스트의 논리다. 개인적으로 테러리스트의 논리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그런 논리를 이루는 배경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이런 현실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오쿠자키가 앞으로도 계속 폭력을 사용할 것이라 얘기한 부분은 편집자가 빼려고 했다. 편집자는 이 장면을 빼지 않으면 사람들이 천황과 전쟁을 비판하는 오쿠자키의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 거라고 판단했다. 나도 그 말에는 동의했지만 오쿠자키는 폭력을 통해 국가에 저항하는 사람이었고, 그 말을 빼버리면 영화가 아름다운 결론으로 마무리될 것 같았다. 편집자와 엄청 싸웠지만 결국 이 장면은 넣기로 했다.


관객 4 <전신소설가>에서 ‘여러 사실들이 겹쳐져 있는데 그중 선택을 하기 때문에 픽션이다’라는 소설가의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에서도 한 출연자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도 전쟁의 참상 같은 것을 직접 목격하면 불편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아마 병에 걸리고 말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상관을 살해하겠다고 나선 오쿠자키를 따라가지 않은 감독님의 선택에 공감한 쪽이다. 감독님은 현실을 전부 표현해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어떤 ‘정도’를 지키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하라 가즈오 영화를 찍기 전에는 이런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고, 이런 영상을 담아야겠다고 머릿속으로 정말 많이 생각한다. 그런데 촬영을 시작하면 항상 30% 정도만 겨우 찍을 수 있는 것 같다. 찍을 수 없는 게 압도적으로 많다. 현장에서 찍으면 안 된다고 판단하는 경우도 있고, 찍고 싶지만 조건이 안 맞아서 못 찍는 것도 있다.

일단은 가능하면 다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찍지 못했던 그 조건까지 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찍을 수 없었던 장면들을 생각하다 차기작의 주제를 찾을 때도 있다. 오늘 같은 이런 대화 자리도 영화를 다시 생각하는 과정이다. 어떤 생각으로 찍었는지 말하면서 장면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생각하며 이해가 깊어진다.


변성찬 <천황 군대는 진군한다>는 30년 전 영화이다. 하지만 영화적 에너지, 사회적 에너지가 바래지 않고 남아 있어서 새삼 놀라웠다. 필름 촬영이라는 굉장히 어려운 조건에서 만들어졌지만 찍지 못한 ‘구멍’ 같은 부분이 매우 강렬하게 다가오기도 했었다. 마지막으로 감독님의 이야기를 듣고 오늘 자리를 마치도록 하겠다.


하라 가즈오 말하고 싶은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오쿠자키가 중대장을 죽이겠다며 총을 들고 갔을 때 그 총은 장난감총을 개조한 것이었다. 그 총은 오쿠자키를 지지하는 사람이 준 것이었고, 오쿠자키는 그 총이 정말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오쿠자키가 중대장의 집에 갔는데 중대장은 없고 아들만 나왔다. 당시 오쿠자키는 중대장의 아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화가 났고, 그래서 이 총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시험해보기 위해 쐈다고 한다. 그래서 정말 처음부터 오쿠자키가 사람을 죽이려는 분명한 살의를 갖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때 오쿠자키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심정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여전히 궁금하다. 그리고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해서 그걸 표현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이처럼 여러 시각을 동원해도 풀 수 없는 문제들, 이런 인간의 불가사의한 점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든다. 이런 얘기를 하면 세 시간 정도 더 필요할 것 같다(웃음).




일시 6월 16일(토) 오후 2시 30분 <천황 군대는 진군한다> 상영 후

정리 김혜령 자원활동가

사진 목충헌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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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가즈오 특별전: 물러서지 않는 카메라]



진술을 기다리는 산파의 시간

<천황군대는 진군한다>




<천황군대는 진군한다>에서 오쿠자키 겐조가 취하는 폭력이라는 수단과 이에 관한 카메라의 방조는 종종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누군가는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할 것이고, 다른 이들은 ‘정당한 목적을 위해 폭력이라는 수단이 때로는 필요하다’는 입장에 설 것이다. 이는 지극히 단순화한 입장일 뿐, 둘 사이에 수많은 결이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오쿠자키 겐조의 행위를 폭력으로 함축해 그것의 당위성을 따지지는 않을 생각이다. 먼저 그것은 나의 능력치를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단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를 폭력으로 정의해야 할지부터 아득하다. ‘폭력의 단계를 나눌 수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거쳐 ‘이 세상에 폭력이 아닌 것이 있을까’라는 자조 섞인 체념에 이르게 될 공산이 크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보고 주인공의 폭력 행위를 비난하는 건 영화의 폭력에 가담한 채 실컷 즐겨놓고는 슬그머니 발을 빼는 것처럼 개운치 않다. 어떤 것을 폭력이라고 칭하는 이상 판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면 오쿠자키의 행위에 관해 잠깐 다른 이름을 붙여봐도 괜찮을 것이다. 이를테면 폭력이 되기 이전의 행위나 상태를 지칭하는 ‘에너지’와 같은 단어로 말이다. 그래야 우리가 영화에 매혹되었던 이유를 투명하게 마주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주된 에너지는 오쿠자키 겐조의 퍼스널리티에서 나온다. 천황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그는, 자신의 분노를 약자에게 푸는 속인들의 세상에서 누구보다 용감한 사람처럼 보인다. 영화 속에서 그가 못 견디는 포인트가 몇 군데 보인다. 사람에게 예의 없게 행동하는 것이나, 돈벌이를 강조하거나, 천황을 섬긴다는 발언을 할 때 그는 분을 삭이지 못한다. 참전 중 동료들의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그는 국가의 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을 지속해왔다. 천황에게 파친코 구슬을 투척하거나 포르노 전단을 만들어 유포하고 부동산 업자를 폭행해 죽음에 이르게 한 대가로 여러 번 투옥된다. 그의 전적은 전쟁 당시 일본군 내에서 일어난 식인 사건을 파헤치는 영화의 여정이 얼마든지 위험하게 돌변할 수 있음을 인지하게 한다. 실제로 오쿠자키의 험악한 시도로 인해 여정은 끝이 난다. 그런데 오쿠자키의 개성을 논하는 데 있어 상대적으로 간과되어 온 부분이 있다. 이는 오쿠자키가 과격한 행위를 하는 목적의 핵심과 관련된다. 그는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행동하는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는 법적인 처벌이나 보상을 염두에 둔 거라 오해될 소지가 있다. 물론 그가 법적 처벌 너머 신적 처벌을 대리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오쿠자키가 처벌로서의 폭력을 행사하는 건 누군가 자신의 행위를 부정하려 할 때다. 궁극적으로 그는 사람들이 과거의 행위를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게 하려 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 영화가 의도하고 지정한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오쿠자키가 원하는 것은 사람들의 진술, 말이다. 그는 법적인 시비가 아니라 사적이고 내밀한 고백을 원한다. 카메라에 기록되는 한 그것은 결코 사적인 발화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야마다 기치타로 전 중사의 집을 찾아간 장면은 말에 관한 오쿠자키의 집착이 뚜렷이 드러나는 명장면이다. 과거의 기억을 헤집는 오쿠자키에게 야마다는 “그만해”라고 소리친다. 야마다는 자신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추모를 한다고 말하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언급한다. 순간적으로 분노를 참지 못한 오쿠자키는 야마다에게 달려들어 그에게 상처를 낸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겨우 정리되고 오쿠자키는 다시 침착하게 설득을 이어간다. 자신이 경험하고 겪은 일을 숨김없이 후대에 전하는 것이 혼령을 위로하는 유일한 방식이며, 끔찍한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더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여하는 것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라는 것이다. 오쿠자키가 야마다의 집에 찾아가는 에피소드는 약 23분에 달한다. 편집을 거의 하지 않은, 실시간적 체험에 가까운 이 장면을 보면서 문득 오쿠자키의 말이 산파 행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야마다에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오쿠자키는 누군가의 기억을 자극하며 그것이 말로 터져 나오기를 말로써 끈질기게 유도하는 기억의 산파 같다. 그만큼 절실하게 말의 탄생을 원한다.


활자, 구술과 오쿠자키 간의 친연성은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이미 강조되었다. 그의 전파사 건물 셔터에는 ‘전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를 처단하자’를 비롯해 누군가를 선동하는 글자로 빼곡하다. 작은 밴은 이동수단이기보다는 홍보용 특수차다. 글자로도 부족해 오쿠자키는 확성기를 통해 말을 뱉어낸다. SNS가 지금처럼 활발한 시기였다면 그는 논쟁적인 발언을 쉼 없이 쏟아내는 인터넷 논객이 되었을 것이다. 마이크를 잡은 채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오쿠자키의 모습에서 그가 말과 글을 애용하는 선동가임이 드러난다. 그에게 말과 글은 곧 행동이요, 행동은 곧 말과 글이다. 오쿠자키가 글씨로 뒤덮인 밴을 타고 확성기를 사용해 1인 방송을 시작하자 경찰들이 나타나 그를 제지한다. 이때 그의 말은 곧 행위다. 영화 말미, 오쿠자키는 상관 무라모토 마사오를 죽이려고 하다 무라모토의 아들에게 중상을 입히고 도주해 지명수배자가 된다. 오쿠자키의 사진과 범행이 기록된 신문의 헤드라인이 리드미컬한 편집으로 드러날 때 그의 행위는 곧 글이 된다. 말이 행위가 되고, 행위가 다시 글이 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하라 가즈오는 오쿠자키의 행위를 말과 글에 적극적으로 연결한다. 소극적이라고 인식된 감독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보고 싶은 이유다. 오쿠자키의 열정이 종종 유족의 간절함을 초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라 가즈오의 영화가 오쿠자키의 존재감에 잡아먹히는 것처럼 보이곤 한다. 오쿠자키는 단지 영화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연출한다. 하라 가즈오의 역할은 카메라맨 정도로 보일 뿐이다. 오쿠자키는 때때로 카메라를 향해 ‘컷’을 외친다. 자신을 적대하며 자리를 피하려 하는 세오 유키오를 폭행하다 제지당한 뒤 반대로 폭행을 당할 때, 오쿠자키는 자신이 맞는 것을 찍지 말고 카메라를 끄라고 지시한다. 야마다를 폭행하다가 제지당할 때는 동요하지 말고 촬영할 것을 요구한다. 오쿠자키의 말에 따라 상황은 종료되거나 지속된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명백하게 하라 가즈오의 영화다. 감독에게 주인공을 통제하거나 넘어서려는 생각일랑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인물로부터 거리를 두고 지켜보거나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자막과 편집, 특히 사운드 편집을 통해서 하라 가즈오는 오쿠자키의 여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동조한다. 인물의 요구에 성실히 응하고, 그와의 동행을 거두지 않는 것, 그것은 하나의 적극적인 표현이다. 하라 가즈오의 카메라는 오쿠자키가 유족들을 대동하고 관련자들을 찾아내 그들에게 진술을 강요할 수 있게 한다. 하라 가즈오가 동행을 거절하자, 그것은 다큐멘터리 영화이기를 그치고 사건이 된다. 오쿠자키가 무라모토를 죽이러 가겠다며 하라 가즈오에게 동행을 요청했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무섭다’고 말하는 하라 가즈오에게 오쿠자키는 불같이 화를 냈다고 전한다. 하라 가즈오가 오쿠자키와 동행하지 않고 이를 무라모토에게 알린 것은 윤리적인 선택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만드는 다큐멘터리의 성립 조건을 생각할 때도 타당하다. 오쿠자키의 시도는 ‘말’을 요구하기 위한 연출이라는 영화의 암묵적 규칙을 깨고,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서의 행위를 카메라에 담고자 한 것이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카메라를 내어준 하라 가즈오의 행위는 오쿠자키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틀을 생성한 것과 같다. 돈키호테에게 산초가 필요하듯, 하라 가즈오의 카메라가 없었다면 오쿠자키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망상증 환자나 과격한 이상주의자, 혹은 너무도 외로운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라 가즈오는 오쿠자키에게 힘을 실어주는 적극적인 동조자였다. 대역을 내세워서라도 필요했던 유족처럼 말이다. ‘결과가 좋으면 목적이 정당화된다’는 오쿠자키의 말에 동의를 한다고 해도, 나쁜 결과를 초래한 오쿠자키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는 없겠다. 다만 한편으로는 오쿠자키의 극단적인 폭력 행위가 진실을 구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돌아보게 한다는 것 역시 마땅히 강조되어야 한다. 누군가가 말하게 만드는 것의 어려움은 카메라를 든 자들의 공통된 고민과 맞닿는 것이기도 하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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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50 새로운 세상, 새로운 영화 May ´68 by Godard]



“지금 고다르가 중국에 산다면 어떤 영화를 만들지 궁금하다.”

- <동풍> 상영 후 크리스티앙 페겔슨 강의




이나라(이미지문화 연구자) 오늘 강의를 해줄 크리스티앙 페겔슨 씨는 영화와 사회학을 공부했으며, 현재 파리 3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치고 있다. 오늘은 지가 베르토프 시기의 고다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들려줄 계획이다.

크리스티앙 페겔슨(영화평론가) 이 길고 지겨운 영화를 참을성 있게 봐주셔서 감사하다(웃음). <동풍>은 프랑스 관객에게도 그리 쉬운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50년 전 영화이고, 2018년의 우리는 50년 전과 다른 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동풍>에 대해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사회학에 기본을 두고 있기 때문에 영화 텍스트와는 조금 거리를 둔 채 비판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특히 작가주의적 관점보다는 프랑스와 유럽이라는 사회의 맥락에서 <동풍>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은 영화와 픽션이 60년대 중반의 중국과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중국과 프랑스는 문화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매우 먼 편인데 왜 68년 프랑스의 사람들은 중국의 정치 현상인 마오이즘을 그렇게 가깝게 느꼈을까? 68년 5월 프랑스에서 약 두 달 동안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점거 운동을 벌였을 때 나는 십 대였다. 당시 사람들이 중국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1966년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중국 TV가 방송해주던 선전 활동을 프랑스와 유럽의 TV를 통해서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마오쩌둥의 책을 들고 거리에서 그의 이름을 외치는 장면들 말이다(한국의 관객들은 북한의 ‘위대한 영도자’ 때문에 내가 어떤 분위기를 말하는 건지 잘 알 것이다).

사실 1960년대 말 한국에서는 맑시즘이나 마오이즘, 문화대혁명 등의 개념들에 접근하기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한국이 당시 독재 정권 치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전체주의의 안 좋은 예인 북한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다르 역시 바보는 아니다. <동풍>을 만들 때 그는 이미 사십 대였고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든 뒤였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마오이즘에 끌렸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이게 왜 완전히 말이 안 되는 행동이 아닌지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내 생각에 마오이즘에 대한 당시 프랑스 사회의 이끌림은 단지 마오이즘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내재적 접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 문화대혁명과 마오이즘

1960년대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마오이즘과 문화대혁명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이 개념을 재고할 수 있다. 몇 가지 사실만 언급해보자. 58년부터 60년대까지 중국에서 ‘대약진운동’이 일어났다. 마오쩌둥이 이끈 이 운동은 농민들이 공산당에 호감을 갖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대약진운동은 4,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죽음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단적으로 설명하면 몇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프랑스 전체 인구가 사라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약진운동은 결국 실패했고, 60년대 중반 마오쩌둥은 새로운 혁명인 ‘문화대혁명’을 계획했다. 문화대혁명을 요약하면 약 1,700만 명의 젊은 중국인들을 시골로 보내 농부들과 함께 먹고 자고 일하면서 공산당과 혁명에 참여하라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4~5년간 지속된 이 짧은 운동이 결국 공산당이 중국 사회에 미치는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이 문화대혁명은 상당히 억압적인 측면이 있었다. 약 250만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그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자신의 가족들이 공산주의에 따르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감옥에 투옥시켜야 했다.

나는 바르트나 사르트르, 보부아르 같은 당시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왜 단순히 마오주의를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국의 이미지 자체에 매혹당하고 영향을 받았는지 묻고 싶다. 대표적으로 필립 솔레르스와 줄리아 크리스테바 부부는 1960년대에 중국을 방문한 뒤 그 변화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매우 어리석은 말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마치 1930년대 소비에트를 방문한 뒤 그 사회를 높게 평가했던 작가들의 행동과 비슷했다. 내가 알기로 당시 중국의 어두운 현실을 용감하게 이야기한 사람은 시몬 레이스(Simon Leys)라는 학자가 거의 유일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의 현실과 중국인들의 일상이 어떻게 억압받는지 이야기했다. 하지만 혼자서 프랑스의 주류 흐름에 맞서는 건 역부족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이야기를 해보자. ‘마오이즘’이란 사상 자체가 프랑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사회가 중국의 사례로부터 어떤 아이디어를 얻은 건 확실하다. 그건 어떤 ‘대립’이 운동을 가능하게 해주고, 그 대립을 자양분 삼아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대립을 통해 운동의 불꽃을 피운 다음 이 운동성을 통해 기존의 것을 거스르며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이 생각에 따르면 사회에는 ‘공공의 적’이 있고 혁명의 주체들은 여기에 맞서 싸워야 했다. 고다르의 영화에도 이런 생각들이 드러난다. 그는 (조금 모호하지만) 일종의 ‘내전’을 일으키자고 주장한다. 이때 고다르는 영화가 폭탄과 무기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참고로 ‘동풍’이라는 제목 자체가 동쪽에서 온 바람이 운동에 동력을 제공할 것이라는 의미다. 여기에선 오리엔탈리즘의 어떤 전형을 찾을 수 있다. 동쪽으로부터 온 것이 서구에 혁명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중국 여인>



<동풍>



- <중국 여인>과 <동풍>

1966년, 고다르는 <중국 여인>을 만들었다. 다섯 명의 학생이 파리의 한 집에 모여 마오의 사상을 따라 프랑스에서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는 내용이다. 이들을 조금 비꼬는 것 같은 뉘앙스도 녹아 있고 <동풍>보다 재미도 있다(웃음). 이 영화에 나온 것처럼 문화대혁명은 지금까지 TV를 통해 이미지로만 접할 수 있었지만 68혁명을 이끌었던 급진적인 학생 운동가들이 ‘외부’의 운동이었던 마오이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인 이십 대 초반의 남녀들은 베이징의 라디오방송국이 송출하는 마오의 사상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마오의 어록을 공부한다. 그러다가 소련의 장관이 프랑스를 방문한다고 하자 그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고다르는 다소 느슨한 정치적 관점 속에서 중국이 문화대혁명을 통해 끊임 없는 운동성을 만들어내는 급진적이고 새로운 사회이며, 소련은 혁명과는 거리가 멀어져버린 보수적 사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와서 보면 <중국 여인>은 마오이즘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전에 만들어진 예언적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 영화를 만들면서 고다르는 상업적 제작 방식으로부터 완전히 단절하였다.

<중국 여인> 전에 만들어진 <미치광이 삐에로>에도 이와 비슷한 국제적 맥락이 반영되어 있다. 프랑스가 점점 미국화될 것이라는 전망과 비판이 있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이 녹아 있다. 이런 생각은 나중에 만든 <중국 여인>과 <동풍> 같은 영화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 ‘키노 프라우다(Kino-Pravda)’

<동풍>, <중국 여인> 같은 영화들이 중요한 건 고다르가 중국을 (소비에트 관료제와는 다른) 새롭고 급진적인 사회로 그렸기 때문이 아니다. 이 영화들은 지가 베르토프가 말했던 것들 - 카메라는 새로운 도구이자 무기이며, 할리우드 영화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재현이나 스펙터클과 맞서 싸워야 하며, 우리가 만드는 영화가 할리우드보다 더 현실에 가깝고, 변화를 더 급진적인 방법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믿음 - 을 보여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고다르는 <동풍>을 통해 베르토프의 ‘키노-프라우다’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실천하려 했다(하지만 <동풍>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진실’이나 ‘현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고, 아무리 교육을 잘 받은 노동자라도 이해하기 어렵다). 60년대 중반, 고다르를 비롯한 프랑스 감독들은 거의 40여 년 동안 망각의 심연에 빠져있었던 지가 베르토프나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이론을 읽으면서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두 감독은 작품을 연출할 뿐 아니라 영화에 대한 글도 많이 썼던 사람들이라서 상대적으로 접하기가 쉬운 편이었다.

당시 고다르는 브레히트를 인용하여 리얼리즘은 현실을 재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 보여주는 것이라는 조금 헷갈리는 말을 했다(“Realism does not consist in reproducing reality, but in showing how things really are”). 이것이 그가 베르토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 영화의 실천: 작가주의의 폐기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은 이론과 실천이 섞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이 농부를 찾아가고, 농부들이 학생들과 같이 일하는 것처럼 말이다. 고다르 역시 이론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영화적 실천을 시도하려 했다. 그런 맥락에서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고다르가 소비에트 영화의 ‘시네트랙트’로 대표되는 분절적인 짧은 형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마오주의를 선전하는 전단물 같은 짧은 이론적 문구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이 대표적 예이다.

나아가 고다르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기를 원했다. 당시 고다르가 생각하기에 영화는 집단적인 것이었고 한 명의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었다. 그는 할리우드와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다. 고다르는 누벨바그를 통해 ‘작가주의’를 부각시켰지만 이번에는 작가주의와는 반대되는 것을 하고 싶어했다. 이 과정에서 고다르는 ‘지가 베르토프 집단’을 만들었다. 이들은 무엇보다 작가로서의 감독 개념을 없애려 했다. 왜냐하면 영화는 집단적 운동이고, 대중을 일방적으로 교육시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찾아오게끔 유도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다소 유토피아적이고 이상적인 생각이었다.

60~70년대의 고다르는 영화의 혁명적 실천을 위해 작가라는 개념을 지우려 했고, 관객을 영화의 중심에 놓으려 했다. <동풍>을 보면 고다르는 끊임없이 관객에게 말을 건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관객을 설득하는 이런 행동은 마치 마오쩌둥이 인민들에게 말을 걸었던 방식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물론 마오쩌둥의 경우에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부분이 컸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딱히 새로운 건 아니다. 롤랑 바르트, 미셸 푸코 등의 철학자는 이미 60년대부터 저자라는 개념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으며 저자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맑시즘과 영화

1950년대 말 고다르가 누벨바그를 시작할 때 그는 프랑스 전후 영화의 전통에 맞서면서 ‘시네마’의 개념을 새롭게 쓰려 했다. 그 방법론으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세트 촬영 거부, 독립적인 제작, 핸드헬드 촬영 같은 모험적 시도를 했다(개인적으로는 <네 멋대로 해라> 이후 진정한 의미의 누벨바그는 죽었다고 생각한다).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평론가이기도 했던 누벨바그의 멤버들은 『카이에 뒤 시네마』 등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에 대한 개념을 토론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누벨바그의 정신은 희미해졌고 감독들은 각기 다른 노선을 취했다. 이는 1920년대 러시아에서 벌어진 일과 비슷한 과정이었다.

그리고 고다르는 ‘마오주의 시기’라고 불리는 1966년에서 1972년 사이에 지가 베르토프 그룹을 만들었다. 한편 1920년대 중반, 지가 베르토프는 ‘키노-아이’를 주장하며 감독은 현실과 가까운 영화를 만들어야 하며 감독의 눈이 카메라의 눈이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이런 베르토프의 주장은 당시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진영 내에서도 갈등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에이젠슈테인 같은 사람은 베르토프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에이젠슈테인은 이미 <전함 포템킨> 같은 영화에서 혁명을 말하기 위해 스펙터클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나중에 만든 <10월> 같은 영화에서는 혁명을 묘사하기 위해 영화적 ‘조작’을 시도하기도 했다.

<동풍>의 첫 부분에도 이 영화를 베르토프 스타일로 찍을지, 에이젠슈테인 스타일로 찍을지 고민하는 대사가 나온다. 이는 영화라는 것이 재현에 그쳐서는 안 되고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문제 인식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맑시즘적 관점에서 보면 그 현실이란 건 끝없는 계급 투쟁의 장이다. 1920년대의 맑시즘은 단순히 여러 이데올로기 중 하나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역사를 서술할 수 있는 특별하고 새로운 학문이었다. 그리고 마오이즘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역사가 결국 노동자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1920년대의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감독들은 영화를 단순한 광학적 기술이 아니라 현실을 새롭게 설명할 수 있는 관점, 또는 학문으로 여겼다. 베르토프가 시도한 건 맑시즘과 시네마를 하나로 섞으려고 한 것이다. 베르토프에게 영향을 받은 고다르 역시 실패로 끝난 누벨바그 이후 다시 새로운 물결을 만들려고 했다. 이것이 내가 고다르를 경유해 생각하는 정치와 시네마의 관계에 대한 단초이다.


- 68혁명 이후

하지만 이걸로 고다르가 중국과 마오이즘에 끌린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당시 중국에서는 수백만 명의 인민이 사망한 비극이 있었고, 중국의 마오이즘을 프랑스 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68혁명이라는 급진적 운동에 왜 동참했는지 질문하고 싶다.

전후 프랑스는 사실 가톨릭 전통이 강한 매우 보수적인 사회였다.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을 통과하며 제국주의가 붕괴되고 있는 시기였다. 고다르는 알제리 전쟁을 비판하는 <작은 병사>라는 영화를 만들었고, 정부에 의해 3년간 상영을 금지당했다. 당시 프랑스의 대통령은 드골이었는데, 끊임없이 시위가 일어나면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 그런 시기를 통과하는 프랑스 사회는 겉으로는 급진적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뒤에는 보수적 측면이 분명 있었다. 이를테면 1986년에 민영화되기 전까지 프랑스의 모든 TV 방송은 국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68운동은 프랑스라는 국가를 자유롭게 하려는 최초의 운동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68혁명’이라 불리는 사회 운동 뒤에는 다양한 요소가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보수적인 흐름도 있었고, 여성의 권리 신장(실제로 3년 뒤 여성의 낙태 권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성적 표현을 자유롭게 할 권리, 언론 자유의 권리, ‘자신이 될’ 권리에 대한 요구들이 있었다. 그런데 모순적인 건, 이런 운동들이 개인주의적인 동시에 집단주의적인 차원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68혁명에 대한 일종의 신화가 있지만 내가 보기엔 어떤 모순이 존재한다.

당시 급진적인 운동가들이 선택한 마오주의나 트로츠키주의는 19세기의 관념을 20세기에 거의 그대로 가져와 활용했다. 그들은 공장으로 가서 노동자들을 ‘도와주려고’ 했는데, 68혁명 당시 노동자들은 이를 반대했었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힘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은 소비에트의 옛 강령을 따르고 있었기에 어떤 면에서 매우 보수적 집단이었다. 68혁명은 드골 정권에 반대했지만 동시에 프랑스 공산당에도 반대를 해야 했다. 반대로 당시 노동자들 역시 68혁명을 통해 터져나온 모든 목소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68혁명은 두 달 정도 격렬하게 이어지다 나중에는 곧 시들해졌고, 그나마 파리를 벗어난 교외나 시골에서는 잠잠한 편이었다. 그리고 68혁명이 끝난 후 이어진 시민 운동은 상대적으로 더 보수화됐으며 결국 73년쯤에는 그런 세력조차 다 사라지거나 무정부주의,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등으로 분열됐다. 여기에 세대 차이까지 뚜렷해졌다. 68혁명의 동력은 어떤 면에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욕망이었는데, 그걸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약 20년 정도의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운동의 동력은 약해졌다.

마오주의자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중국의 마오이즘을 프랑스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특히 신(新) 중산층의 부상 때문에 전통적인 노동자 계급이 사라졌고 공장도 ‘동풍’으로 인해 사라지고 있었다. 영화의 새로운 방법론을 만들려고 했던 고다르는 <중국 여인>을 발표했지만 많은 관객을 기록하지 못했다. <동풍>은 말할 필요도 없다. 참고로 당시 크게 흥행한 작품은 현실을 아이러니하고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파리의 중국인(Les Chinois a Paris>(1974)이라는 코미디 영화였다.

이나라 고다르에 대한 꽤 거침 없는 비판도 들려주어서 더 흥미로웠다. 영화의 역사는 항상 여행의 역사였다고 생각한다. 고다르를 포함한 서구의 여러 지식인들이 중국에 매혹당했다고 했지만 사실 그 전에도 예술가나 지식인들은 항상 외부에 매혹을 느꼈었다. 68혁명 당시 고다르의 마오이즘에 대한 관심이 단지 ‘중국’이라서 그랬던 걸까? 어쩌면 영화가 항상 찾고 있었던 ‘외부’에 대한 하나의 사례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위치를 바꿔서 생각해보면 지금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은 한국의 관객들도 프랑스라는 외부의 사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를 향한 이런 매혹과 관심의 사례 중 영화만이 갖는 특별한 점이 있는지도 듣고 싶다.

크리스티앙 페겔슨 어려운 질문이다. 19세기 중반부터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전반이 동양에 대해 어떤 전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오늘 이야기한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그전에는 일본에 대한 이미지의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중국으로 대체된 것이다. 당시 프랑스에는 중국풍 옷을 입는 게 유행하기도 했었고, 마오주의에 대한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것 같은 다양한 맥락에서 만들어진 중국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60년대 중반 유럽의 지식인들이 중국 정부의 공식 초청을 받아 중국을 방문했었다. 정말 프로파간다적인 여행이었는데 이들은 실망스럽게도 현실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였었다. 나도 방금 고다르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60년대 당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정치적으로 진지하게 다룬 영화는 고다르의 영화를 포함해 한두 편 정도였고, 관객도 그리 많지 않았다.

고다르의 영화와 비교해서 보면 좋을 영화는 크리스 마르케의 작품들이다. 마르케는 마오주의자는 아니었고, 고다르가 ‘지가 베르토프 집단’을 만든 것처럼 러시아 감독 알렉산드르 메드베드킨의 이름을 딴 ‘메드베드킨 그룹’을 만들어 활동했다. 20년대 에이젠슈테인과 베르토프가 서로 다른 노선 때문에 갈등했던 것처럼 고다르와 마르케도 경쟁 관계에 놓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관객 1 <동풍>은 고다르가 추구하는 사회주의적 이념을 관객에게 충실히 전달하려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화법은 관객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난해한 측면이 있다. 고다르의 방식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크리스티앙 페겔슨 사실 오늘 영화가 다 끝날 때까지 관객들이 자리를 뜨지 않고 남아있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웃음). 이건 내가 고다르에게 특별한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68혁명 당시 이미 고다르에 대한 대중의 고정관념이 존재했다. 어디에나 남들보다 좀 더 급진적인 학생들은 있기 마련인데, 이들은 이런 낙서를 남겼다. “고다르는 당신이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멍청한 스위스계 친중국파이다.” 하지만 20년대 러시아의 베르토프 감독이 영화를 통해 혁명 사상을 전파하려고 한 것과 60년대 프랑스의 고다르가 하려고 한 것을 단순히 그 결과물만 놓고 비교하는 건 물론 힘들 것이다.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상영하는 <서른 살의 죽음(Half a Life)>(로맹 구필, 1982)이란 영화를 함께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68혁명 이후 트로츠키주의를 이끈 사람이 만든 영화로서, 68혁명 이후 좌절감을 느낀 사람들에 대한 영화다. 이 영화들을 보면 68혁명에 어떤 취약점이 존재했다는 걸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어떤 사람들이 고다르보다 더 적극적으로 혁명의 운동성을 지속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내 생각에 고다르는 ‘운동’보다는 감독이란 위치를 지키는 데 더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관객 2 68혁명 이후 50년이 지났고, 여기는 프랑스가 아니라 한국이다. 내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계속 고민 중이다. 내 생각에 우리 사회는, 특히 젊은이들은 정부에 더 이상 저항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크리스티앙 페겔슨 고다르라는 사람 자체가 어떤 점에서는 순응주의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처음에는 보수주의적이었다가 60년대 중반에는 아나키스트였고, 그 후로는 공산주의자들과 친분을 맺고 마오주의자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지금은 영화,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중국이 오늘날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한 번 생각해보자. 그리고 세계 어디를 가나 다들 비슷하다. 프랑스의 젊은이들도 취직과 생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내게 1968년이 흥미로운 건 지금과 달리 개인주의적이지 않은 면모가 있었고, 다름에 대한 관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세계가 개인주의적 방향으로 가면서 오히려 그런 관용이 사라지고 있는 면이 있다.

지금 중국은 21세기의 가장 거대한 모순이다. 최악의 공산주의와 최악의 자본주의가 합쳐졌고, 사람들이 거기에 순응을 하고 있어서 변화가 일어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나는 지금 고다르가 중국에서 산다면 어떤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일시 5월 8일(화) 오후 7시 <동풍> 상영 후

사진 최현진 자원활동가

정리 김보년 프로그래머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함께 영화를 만든다는 것: 광화문시네마의 경우]



“절대 담배 안 끊겠다는 반항심으로 만들었다”

- <소공녀> 상영 후 전고운 감독 시네토크





정지혜(영화평론가) <소공녀>는 물론 미소의 이야기지만 서울이란 도시의 주거 형태가 어떻게 분화되고 있는지, 어떤 지경까지 처했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감독님이 영화를 만들 때 공간에 대한 고민도 굉장히 많이 했을 것 같다. 영화의 출발 지점에 대해 먼저 듣고 싶다.


전고운(감독) 이 영화의 주인공은 미소이지만 또 하나의 주인공은 서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도시에서 살아 남으려 하다가 잃어버리는 것들을 기록하고 싶었다. 그리고 <소공녀>를 만들 때는 정권에 대한 불만도 정말 컸다. 이걸 어떻게 간접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던 참에 마침 담뱃값도 오르더라. 내 생각에 정말 말도 안 되는 큰 인상폭이었다. 그런 분노들에서 처음 시작했다.


정지혜 잊혀진 도시의 풍경을 기록하고 싶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이 말은 광화문시네마가 제작한 모든 영화에 해당되는 말 같기도 하다. 이번 특별전을 통해 광화문시네마의 영화들을 본 관객은 공간에 대한 서로 다른 탁월한 해석들을 보았을 것이다. 특히 고시원, 단칸방 등 젊은 청춘들이 머무는 공간을 중요하게 묘사하며 인물을 설명하곤 한다.

그런데 <소공녀>의 미소는 집을 포기하고 담배와 위스키라는 취향, 나아가 사랑의 대상을 지키려 한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란 의문도 사실 좀 들었다. 미소에게 자신이 머무는 공간, 자신이 살아가는 서울이란 도시는 어떤 의미일까?


전고운 거창한 의미가 아니라 그냥 자기가 나고 자란 터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어떤 분들은 서울이 아니라 지방에 가면 되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미소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다른 도시에 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미소가 서울의 상징이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서울은 미소의 모든 것이 담긴 곳이고, 미소가 버텨야 하는 공간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살기에 너무 비싸지면서 발붙일 곳이 점차 줄어든다.


정지혜 ‘미소’의 이름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미소는 친구와 동료, 타인에게 미소를 보내는 인물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관객은 감정이입을 주로 주인공에게 하고 다른 인물들에게는 배타적인 감정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소공녀>를 볼 때는 미소 주위의 인물들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 된다. 미소와 미소의 친구들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으려 했는지 듣고 싶다.


전고운 처음 친구들이 시나리오를 봤을 때 미소에 공감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평범한’ 사람들은 미소의 친구들이 처한 상황을 더 잘 이해했고 미소에게 거부감을 가졌다. 그리고 실제 미소처럼 살고 있는 소수의 친구들만이 미소에게 감정이입을 했다. 나에겐 그 차이가 재미있게 다가왔다.

미소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들이 <소공녀>를 미워하지 않게 하는 방법은 친구들을 밉지 않게 그리는 것이었다. 만약 미소를 이해하지 못해도 친구들을 통해 이 영화를 사랑스럽게 봐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지혜 그 친구들 중 광화문시네마의 멤버도 있었을 것 같다. 광화문시네마는 영화를 만들 때 시나리오 개발부터 함께 힘을 모으는 걸로 알고 있다. <소공녀>의 경우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전고운 내가 지향하는 방향과 다른 감독들이 지향하는 게 많이 다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쪽으로도 잘 열려 있기 때문에 다른 감독의 작품에 각색으로 참여할 수 있다(웃음).

<소공녀>의 경우에는 친구들이 나를 무서워해서 그런지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깔끔하게 ‘재밌다’, ‘이대로 찍어도 되겠다’고 말해주었다. <범죄의 여왕>이나 <족구왕>은 장르 영화다 보니 아무래도 계속 많이 고쳤는데, 이번에는 약간 ‘네 맘대로 해라’ 느낌이었다. 대신 엔딩에 대해서는 치열하게 논의했다.  


정지혜 처음 기획 단계에서는 미소의 나이가 조금 더 많았던 걸로 알고 있다.


전고운 시나리오를 쓰고 나면 어떻게 극장에 걸릴 수 있을지만 생각한다. 처음 쓴 시나리오는 분위기가 좀 더 어두웠고 주인공도 나이가 많았다. 주인공의 나이 들어가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투자-개발 과정에서 나이를 조금 낮추었고, 그러면서 작업이 좀 더 수월하게 진행됐다.


정지혜 <소공녀>는 도시에서 혼자 자신의 취향을 지키면서 나이 들어가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감독님의 개인적 고민도 어느 정도 반영됐을 것 같다.


전고운 내 첫 번째 장편 영화라서 미소처럼 철저하게 내 취향을 지키지는 못했고, 조금 내 색깔을 눌러가면서 만들었다. 하지만 열심히 살고 어렵게 취직도 했는데 돈은 부족하고, 취미생활도 없어지고 바빠서 친구도 못 만나는 이런 이상한 구조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을 하며 만들었다. 영화를 다 찍고 난 후 나에게 영화가 미소의 담배와 위스키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정지혜 광화문시네마 멤버들은 서로의 영화에 짧게 출연을 하기도 하는 등 품앗이처럼 협업을 한다. 동시에 상업영화의 틀에서 다른 제작사나 투자사와도 함께 일을 한다. 어떤 어려운 점이 있는지, 또는 어떻게 계속 광화문시네마가 지속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전고운 일단 우리는 ‘광화문시네마’ 소속 멤버 이전에 개인이고 친구다. 친구가 다른 곳에서 영화를 만들면 당연히 친구로서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은, 좀 쑥스럽지만, 사랑이다. 사랑밖에 없는 것 같다(웃음). 영화를 찍으면 누군가의 희생이 따르고, 그렇다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즐거움 말고는 얻을 게 없다. 광화문시네마의 시작이었던 <1999, 면회>를 만들 때도 술자리에서 얘기를 하다가 재밌겠다면서 서로 돈을 모아 영화를 만들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내가 친구에게 받은 건 다음에 돌려줘야 하지 않겠나. 이런 사랑과 책임감의 바톤 터치가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이어졌다.

우리의 사랑이 유지될 수 있는 건 우리가 서로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가 부족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다. 천재가 아닌 사람들이라서 뭉칠 수밖에 없다.


정지혜 전고운 감독은 광화문시네마의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대표로서 어떤 영화를 지향하는지 듣고 싶다.


전고운 다섯 감독의 취향이 전부 다른데 우리는 그걸 암묵적으로 존중해 준다. 사실 연출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는 게 정말 어렵다. 어쩔 수 없는 시니컬함으로 상대의 작품을 무시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려 하지 않는다. 나랑은 다르지만 잘하는 게 있다는 태도를 분명히 가진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취향은 서로 다양한 게 더 재밌기도 하다.


정지혜 연출도 해야 되고 기획과 제작도 해야 되는데 어려운 점은 없는지?


전고운 특별한 피로감은 없다. 우리는 장편영화 찍는 걸 응원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이다. 누가 아이템을 가져오면 그걸 무조건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려고 한다. 아, 한 가지 피로감이 있다면 세금이다. 버는 건 없는데 세금을 내라고 한다(웃음).


정지혜 정말 큰 피로감일 것 같다(웃음).




관객 1 엔딩을 두고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는데 처음 엔딩이 궁금하다.


전고운 미소가 마지막 친구집에서 쫓겨난 다음 어딘가로 전화를 한다. 그런데 그 친구가 독일에 있다고 한다. 장면이 바뀌면 미소가 베를린에서 흰머리를 한 채 똑같이 가사 도우미로 일하면서 양주를 마시고 길에서 담배를 피운다. 그게 처음 엔딩이었다. 그런데 친구들에게 무책임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럼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뭐냐’고 하더라. 그래서 고민 끝에 지금 엔딩으로 바꾸었다.

내가 제일 보고 싶었던 건 미소가 주는 카타르시스였다. 나는 영화에서 담배 피우는 여성만 봐도 희열을 느낀다. 누가 이걸 길게 찍으면 더 좋을 것 같아서 내가 직접 찍어보기로 했다. 엔딩은 정말 모든 경우를 다 생각해 봤다. 미소가 담배밭에서 직접 담배 농사를 짓는 것까지 생각했었다(웃음).


관객 1 미소의 머리가 나중에는 백발로 바뀐다. 정말 인상적이었다.


전고운 영화는 결국 시각적 요소라고 생각한다. 미소의 마지막은 남들에게는 포기지만 자신에게는 선택이다. 그 선택의 결과를 충격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흰머리를 떠올렸다. 약 설정은 그 다음에 집어넣은 것이다. 실제 존재하는 병으로 알고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내가 상상해서 만든 병이다.


관객 2 오늘로 14번 봤는데 볼 때마다 재밌다. 미소의 라이터가 궁금하다. 미소는 가난한데 좋은 라이터를 쓴다. 어떤 설정이었는지 듣고 싶다.


전고운 미소가 어떤 라이터를 쓸지 열심히 고민했다.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라이터 선물을 받는다. 미소는 그 선물 받은 라이터를 소중하게 오랫동안 쓰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참고로 라이터는 지포라이터인데 소리는 뒤퐁라이터다. 그 ‘핑’하는 소리가 짧은 음악 같아서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아는 사람은 눈치를 챌 수 있는 나만의 유머였다.


관객 3 영화에서 유머가 많이 느껴졌다. 평소 즐겨보는 영화나 드라마, TV 프로그램이 궁금하다.


전고운 연출을 잘한 영화는 다 좋아한다. <대부>, <에일리언>, 미카엘 하네케, 마이크 리 등 다양하게 좋아한다. 코미디 영화에서 만족한 영화는 별로 없다. 코미디에서는,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우디 알렌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언젠가 <블루 재스민> 같은 영화를 한 번 만들고 싶다.


관객 3 여성 감독으로서 자신이 어떤 차별점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전고운 차별점이라기보다는 자신감이 있다. 여성 캐릭터를 훨씬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남성 영화의 문화에서도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에 남성 캐릭터도 잘 만들 수 있다. 결과적으로 둘 다 잘할 수 있는 게 내 장점이다(웃음). 많은 경우 남성 감독들은 여성 인물을 너무 평평하게 만들거나, 공중에 띄워놓거나, 사람처럼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한다.


정지혜 결말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다. 마지막에 미소는 텐트에서 살기를 선택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지키며 산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걸까 고민해 보았다. 솔직히 말해 그곳에 있는 미소의 모습을 마음 편하게 보는 게 쉽지는 않았다. 특히 최근의 한국영화에서 길거리를 배회하는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데, 미소의 마지막 거처에 대한 고민을 더 자세히 듣고 싶다.


전고운 그 텐트는 내 나름의 풍자였다. 고작 위스키와 담배라는,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취향을 지킨다는 게 우리나라에서 너무 힘든 일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 ‘내가 정말 텐트까지 쳐야겠냐?’ 같은 느낌이었다(웃음). 갈 데까지 가 보고 싶었다. 담뱃값 아무리 올려봐라, 나는 절대 안 끊겠다 같은 나름의 반항심이었다.

마지막 엔딩을 너무 마음 아파하며 보는 분들이 있는데, 내 주위의 ‘미소’들은 드디어 자신의 공간이 생긴 거라며 그 장면을 너무 좋아하더라. 보는 위치에 따라 영화를 보는 감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점이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다.


관객 4 나는 오늘로 11번 봤다. 시나리오집도 읽었는데 영화에는 없는 장면이 있었다. 미소가 재경(김예은)의 집에서 일하다 잠깐 잠들었다는 이유로 오해를 받아 해고당하는 장면이었다.


전고운 사실 그 장면도 촬영을 했지만 너무 신파로 흘러갈까 봐, 미소를 너무 불쌍하게 몰아가는 건 안 좋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편집을 했다. 관객을 좀 덜 지치게 만들고 싶었다. 정말 많이 고민을 한 편집이었고, 감독의 자리가 힘들다는 걸 새삼 느꼈다.


정지혜 미소는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선한 인물이다. 나중에는 거의 감금을 당하는 상황에 처하는데도 감사하다는 메모를 남기고 떠난다. 이런 예의와 품위가 어떻게 가능할까.


전고운 미소 캐릭터에 영감을 준 내 친구들은 정말 미소처럼 착하다(웃음).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예의바른 친구들이다.

나는 이 사회에 제일 필요한 건 선인이라고 생각한다. 주위 사람을 외롭지 않게 해주고, 힘들 때 옆에 있어주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있어야 다른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사회는 언제부턴가 그런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착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 영화를 만들며 그런 가치가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정지혜 영화를 만들 때 어떤 과정이 제일 즐거운지.


전고운 내 영화 만들 때 말고는 다 즐겁다(웃음). 남의 영화 보고 감놔라 배놔라하는 게 너무 재밌다. 이 영화를 어떻게 재밌게 만들지 고민하는 것과 내 고민으로 인해 영화가 조금 더 좋아지는 게 좋다. 배우자이기도 한 이요섭 감독은 나보고 노예근성이 있다고 하더라. 어떻게 보면 그 말도 맞다. 나는 서포트하는 게 좋다.


정지혜 <소공녀>의 마지막에 ‘강시 프로젝트’가 나온다. 그 작품도 서포트를 할 예정인가?


전고운 앞의 경우와 달리 <강시>는 아직 정해진 게 없다. 하지만 누구라도 시작하면 나는 바로 같이하고 싶다.


정지혜 마지막으로 다음 작품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


전고운 이제 <소공녀>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새 작품을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전에 영화감독이 사람이 할 만한 일인가 먼저 고민해야 할 것 같다. 해보니 정말 미친 직업이다. 아티스트도 돼야 하고, 정치도 해야 하고, 사회성도 좋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걸 다 할 수 없어서 벅차더라. 그래도 쓰고 싶은 이야기는 있다.



일시 4월 28일(토) 오후 6시 30분 <소공녀> 상영 후

정리 김보년 프로그래머

사진 목충헌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