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로메르 회고전]

 


“편집자의 역할은 감독의 눈이 되어주는 것이다”

- 마리 스테판 감독과의 대화


 




에릭 로메르 영화의 편집자이자 그의 가까운 친구였던 마리 스테판 감독이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다. 지금도 로메르와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그녀는 따뜻한 미소와 차분한 어조로 로메르와 로메르의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4월 26일(수)부터 29일(토)까지 진행한 네 번의 시네토크 행사 중 두 번의 대화를 정리해 보았다.



◆ 4월 26일(수) <여름 이야기> 상영 후 ◆




김성욱(프로그램 디렉터) “에릭 로메르 회고전”을 맞아 특별한 손님을 초대했다. 로메르의 후기 영화인 <겨울 이야기>에서 유작 <로맨스>까지 모든 작품을 편집한 분이다. <비행사의 아내>를 보면 중간에 잠깐 등장해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는 여성이 기억날 것이다. 바로 그분이 마리 스테판 감독이다.

스테판 감독은 3년 전 부산영화제에서 우연히 만났었다. 다른 얘기를 나누다가 로메르의 영화를 편집한 분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때 꼭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고, 이번 기회에 이렇게 서울아트시네마에 초대했다. 한국을 방문한 적은 몇 번 있지만 로메르와 관련된 행사에 오신 건 처음으로 알고 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소감을 먼저 듣고 싶다.

마리 스테판(영화감독) 이 자리가 너무 좋고 행복하다. 몇 년 전에도 에릭 로메르의 회고전을 했다고 들었다. 그때 로메르 감독이 서울아트시네마에 직접 보낸 편지를 봤다. 그건 정말 드문 일이다. 로메르 감독은 극도로 비밀스러운 사람이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어떤 ‘마케팅’적 요소를 쓸모없다고 생각했었다. 본인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자신이 만든 영화를 보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직접 펜을 들어 편지를 썼다는 건 서울아트시네마를 정말 특별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성욱 그 편지를 2001년에 받았었다. 나도 정말 편지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웃음).

로메르 감독과 스테판 감독의 공식적인 첫 작업은 <겨울 이야기>이지만 그전부터 친한 관계를 맺었던 걸로 알고 있다. 처음 어떻게 로메르와 만났는지 듣고 싶다.

마리 스테판 나는 이 만남을 운명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홍콩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시네클럽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글을 쓰면서 누벨바그 감독들의 영화를 좋아했다. <쥴 앤 짐>, <히로시마 내 사랑> 같은 영화를 좋아했다. 당연히 프랑수아 트뤼포와 알랭 레네를 만나고 싶어했다. 그런데 파리에서 30년 정도 사는 동안 트뤼포와 레네는 만날 수 없었지만 로메르와는 같이 영화도 만들고 친해졌다.

이후 우리 가족은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나는 영화를 공부하고 싶어서 다시 파리로 혼자 떠났다. 그곳에서 에릭 로메르의 영화 강의를 들었다. 그때 내가 들을 수 있는 수업은 거의 이론 수업이었다. 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금방 학교를 나왔고 친구들과 함께 무작정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는 로메르의 영화사인 로장주에 가서 예산서와 관련해 우리가 참고할 만한 자료들을 좀 보여달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갔었고, 당연히 비서가 나를 막았다(웃음). 그렇게 번호만 남긴 채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가 왔다. 바로 로메르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오라고 했다. 그 즉시 로장주 사무실로 다시 갔다.

사무실에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어린 학생이었다. 그때 로메르는 <갈루아인 페르스발>을 준비하면서 배우들과 대본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배우 캐스팅 때문에 어떤 연극을 보러 갈 거라며 거기에 나와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당시 프랑스어를 거의 할 수 없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그날 로메르와 함께 공연을 보는 환상적인 경험을 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당시 로메르의 영화를 편집하던 세실 데쿠지(Cécile Decugis)의 보조 편집자로 들어갔다. 세실 데쿠지는 로메르는 물론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의 감독과 작업을 한 편집감독이다. <네 멋대로 해라>를 편집한 바로 그 사람이다. 나는 당시 두 편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었지만 그런 분과 같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무 고민 없이 편집 보조 일을 시작했다. 또한 프랑스에 계속 살기 위해 고정적인 직업이 필요하던 나에게 정말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1969)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어서 <갈루아인 페르스발>(1978)의 펀딩을 비교적 쉽게 받을 수 있었다. TV 방송국의 투자를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영화는 좀 특이한 영화였고(웃음),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 그후 로메르는 규모가 큰 영화를 잘 만들지 못했다. 다음 작품으로는 적은 예산으로 <비행사의 아내>(1981)를 찍었다. 현장에는 조명도 거의 없고 사운드 감독 한 명과 촬영감독 한 명이 있었다. 거리에서 영화를 찍던 초기 누벨바그의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로메르는 자신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출연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겨울 이야기>의 도서관 장면에 나오는 엑스트라는 대부분 로메르의 학생들이다. <비행사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우연히 내 친구와 함께 그 장면에 잠깐 출연할 수 있었다.

김성욱 스테판 감독은 <여름 이야기>의 편집은 물론 세바스티앙 에름(Sebasiten Erms-에릭 로메르의 E와 R, 마리 스테판의 M과 S를 조합해 만든 이름이다. *편집자 주)이란 이름으로 음악에 참여하기도 했다. <여름 이야기>의 작업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마리 스테판 로메르 감독은 <여름 이야기>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영화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자전적인 영화로 보아도 될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20대 당시 모습과 정확히 같다고 말했다. 갈팡질팡하면서 결정을 못 내리는, 그리고 여성과의 관계에서 부끄러움을 타는 모습들 말이다. 이 작품은 로메르 감독이 40년 동안 갖고 있던 시나리오를 거의 고치지 않은 채 그대로 찍은 영화이기도 하다.

로메르 감독과 꾸준히 같이 작업하는 사람은 4~5명 정도다. 나는 편집을 맡았지만 작곡도 하고 피아노도 치고 노래도 불렀다. 또 물론 차도 같이 마셨다. 우리는 가족 같은 팀이었다. 팀원들은 그의 영화 작업을 위해 시간을 비워두었고, 로메르는 시나리오를 미리 써서 긴 시간 동안 준비하는 스타일이었다. 캐스팅을 할 때는 1년 정도의 시간을 여유 있게 쓸 수 있는 배우와 작업을 하려고 했다. 그렇게 거의 매일 만나서 차를 마시며 시나리오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리허설을 했다. 시나리오 완고는 배우들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눈 뒤, 그들의 말투에 충분히 적응한 뒤 나왔다. 그리고 이 완고는 촬영 버전과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일치했다.

관객 1 영화 초반부에 해수욕장과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 장면은 마치 다큐멘터리 같았다. 배우와 엑스트라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어떻게 그런 장면을 찍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마리 스테판 배우들이 아니라 진짜 그곳에서 놀고 있던 사람들을 촬영했다. 로메르는 영화 현장의 스탭 수를 철저히 제한했다. 우리가 보는 흔한 현장과는 다르다. <여름 이야기>의 경우에는 촬영감독 한 명, 필름 로딩하는 스탭 한 명, 사운드 감독 한 명, 붐 마이크 담당 스탭 한 명, 그외 모든 일을 담당했던 스크립터 한 명이 있었다. 그리고 로장주 소속의 PD도 한 명 있었는데 그녀는 달리(dolly)도 밀어야 했다(웃음). 햇빛을 싫어했던 로메르는 그늘에서 리허설을 했고, 리허설이 끝나면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채 배우와 촬영감독과 현장에 가서 동선을 짰다.

처음 카메라를 설치하면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하지만 거기 카메라를 계속 놔두면 사람들이 관심을 끄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촬영을 시작한다. 그리고 로메르는 카메라 옆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채 손으로 신호를 주며 연출을 했다. 사람들이 영화를 찍고 있다는 걸 눈치 못 채는 경우도 많았다. 행인이 물어보면 ‘나는 영화감독이 아니라 영화과 교수고, 학생들과 실습 중이다.’라고 말했다(웃음). 한 번은 우리 스탭이 캐나다에서 온 다큐멘터리 촬영팀이라고 둘러대려고 나보고 명함을 준비해 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관객 2 편집감독으로서 편집에 얼마나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홍콩에서 태어나고 캐나다에서 자란 스테판 감독님은 로메르와는 세대 차이도 있고 문화적 차이도 있었을 것 같다.

마리 스테판 우리는 워낙 가족 같은 팀이라서 어떤 작업을 할 때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지 않는다. 동시에 감정을 많이 쓰지도 않는다. 이를테면 나는 내 딸, 내 사위와 함께 7년째 함께 영화일을 하고 있다. 이런 특별한 관계에서는 오히려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이건 나의 작업이기 때문에 그냥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나의 개인적 배경에 대해 질문을 하셨는데... 본인이 자신을 희생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남성들의 세계에 속한 여성, 캐나다에 사는 중국인. 이런 식으로 자기를 프레이밍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라온 배경이 어떻든 꼭 싸워야 하는 각자의 전투를 갖고 있다. 외국인으로서 내가 얻는 도움은 없었고 거의 악영향만 있었다. 특히 프랑스는 다양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회라 힘들 때가 많았다. 하지만 정말 내가 ‘다양성’을 가진 얼굴이라면 거기서 이득을 취하려고 노력했다. 그건 자신의 의지이고 모든 건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누군가 내 말을 듣게 하는 건 나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메르는 항상 젊은 사람들과 일했다. 영화계에서 일을 오래 한 사람들은 안 좋은 습관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본인보다 젊은 사람들, 영화를 처음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런 사람이 주변에 많았기 때문에 로메르와 작업하며 세대 차이를 느낀 적은 없었다. 오히려 로메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작업할 때 그들이 나를 ‘로메르 밑에서 일하는 어린 여자’로 보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관객 3 최근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녹색 광선>과 관련해 강연을 했다. 한 관객이 편집에 대해 질문을 했는데 그는 로메르의 영화에서 편집이 그렇게 도드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리 스테판 링클레이터와 이야기를 해봐야겠다(웃음). 로메르를 비롯한 누벨바그 감독들이 훌륭한 건 오늘날까지 많은 감독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링클레이터, 노아 바움백 등 많은 동시대 감독들이 로메르의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에는 자신을 ‘로메르의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감독들도 있다.

<녹색 광선>은 매우 즉흥적인 영화다. 하지만 이런 영화일수록 편집실에서 할 일이 정말 많다는 걸 알아야 한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시나리오가 이렇게 완벽한데 편집을 할 게 있냐고 묻기도 한다. 시나리오대로 찍어서 순서대로 붙이면 끝나는 게 아니냐고 말한다. 하지만 연출과 편집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면 이런 질문은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시나리오의 첫 번째 대사부터 여섯 번째 대사를 이런 방식으로 찍고, 그 다음 대사들은 저런 방식으로 찍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그 사이에 나올 수 있는 편집의 조합은 무수히 많다. 숏과 숏을 붙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알면 그런 말은 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해, 로메르의 영화에는 편집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편집으로 만들어내는 리듬과 편집만이 줄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존재한다. 로메르는 편집을 정말 좋아했고, 항상 편집에 대해 고민하는 감독이었다.




◆ 4월 27일(목) <가을 이야기> 상영 후 ◆





김성욱 로메르의 영화를 볼 때마다 대화 장면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대화 장면을 어떻게 촬영하고 편집하는지 궁금하다. 편집자로서 로메르와 공유하는 가장 일반적인 원칙이 있다면 무엇인가.

마리 스테판 로메르의 영화는 상당 부분 대화에 집중한다. 로메르는 스토리를 쓴 후 대사까지 다 써야 시나리오가 끝난다. 그의 작업 방식은 이렇다. 대략의 스토리를 쓴 다음 배우를 먼저 만난다. 이건 엄밀히 말해 ‘캐스팅’이라고 할 수 없다. 이전에 함께 작업했던 배우들을 다시 찾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배우들이 시간이 맞으면 그 배우들과 함께 스토리에 대해 굉장히 긴 시간 동안 자세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게 배우들이 말을 하는 방식에 감독이 익숙해지면 이걸 캐릭터에 적용시켜 시나리오를 다시 쓴다. 결국 배우와 캐릭터가 실제로 할 법한 말투로 대사가 만들어진다. 그 이후에는 대사를 전혀 바꾸지 않는다.

로메르는 대화를 나눌 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을 찍는 걸 좋아한다. 로메르의 테마 중 하나는 ‘거짓말하는 사람’이다. 말을 하지만 진실은 말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반응이 훨씬 흥미롭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로메르는 절대 카메라를 두 대 쓰지 않는다. B 카메라가 없다. 한 대의 카메라로 모든 대화 장면을 찍는다. 일단 말하는 사람을 쭉 찍고, 다시 처음부터 듣는 사람을 쭉 찍는다. 듣는 사람의 표정도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김성욱 이 영화는 마리 리비에르의 얼굴로 영화가 끝난다. 다른 영화들과는 끝내는 방식이 좀 다르다.

마리 스테판 감독들은 영화를 만드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기 검열을 한다. 나는 편집자의 역할은 감독의 눈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로메르가 마지막 장면의 소스를 나에게 전달하면서 ‘분위기 좋은 예쁜 장면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렇게 편집실에 혼자 남아 촬영본을 보다 보니 마리 리비에르의 어떤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를 바라보는데, 멀리 있는 뭔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한테는 그 표정이 명확히 ‘후회’의 감정으로 보였다.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서 내린 선택을 후회하는 표정처럼 보였다. 그래서 여러분이 방금 보신 것처럼 마지막 장면을 편집했고, 쉬다가 돌아온 로메르는 그 장면을 보고 매우 좋아했다. <가을 이야기> 개봉 때는 로메르가 특별히 모든 극장에 공지를 하기도 했다. 마리 리비에르의 얼굴이 담긴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상영관에 불을 켜지 말아달라고 했다. 이렇게 캐릭터에게 의미를 만들어 주는 것이 편집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관객 1 개인적으로 <내 남자 친구의 여자 친구>부터 영화의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그전에는 호흡이 느렸는데 이 영화부터 호흡이 빨라지고 공간을 사뿐사뿐 옮겨다니는 경쾌한 느낌이 난다. 그리고 <영국 여인과 공작>과 같은 에릭 로메르의 역사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듣고 싶다.

마리 스테판  역사물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자면, 사람들은 로메르를 젊은 남녀의 연애물을 만든 감독으로 많이 기억한다. 하지만 로메르는 역사물을 꾸준히 만들었다. 로메르가 원래 하던 작업의 방향을 바꿔 역사물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방식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욕망이 그의 필모그래피 전반에 걸쳐 계속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로맨스>도 역사물이고 <삼중 스파이>도 역사물이다. <로맨스>에는 신화적이고 동화적인 요소들이 있으며 <삼중 스파이>에는 진실에 대한 테마,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타인은 절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테마가 들어있다. 이건 로메르가 계속해서 다루어온 테마다.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서 역사물을 만든 게 아니라, 항상 그런 인물, 그런 테마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질문을 받고 로메르의 영화가 정말 느린지 고민을 해보았다. 나는 로메르의 모든 영화가 같은 리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사가 많은 편이라서 사람들은 로메르의 영화가 느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장면들이 밸런스 있게 일정한 속도를 갖고 있다. 물론 요즘 나오는 상업 영화의 속도와 비교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로메르의 영화를 볼 때마다 놀라는 건 영화 속 모든 숏이 그 자리에서 스토리를 진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지점에서 컷을 잘라야 하는지를 로메르에게 배웠다. 그의 숏은 정확한 지점에서 끝난다. 절대 길게 끌지 않는다. 요즘 만들어지는 영화들은 감정적 클라이맥스가 끝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이미 지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숏을 몇 초 더 지속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 몇 초가 나에게는 매우 길게 느껴진다. 하지만 로메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다. 로메르는 어떤 인물이 움직이는 행위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 거의 집착 수준이었다. 한 인물이 여기에서 저기까지 여섯 걸음으로 간다면 그 여섯 걸음을 다 보여주는 게 규칙이었다. 사실 편집자의 입장에서는 지키기 힘든 규칙이다. 그래서 <로맨스> 때는 몇 걸음을 속이기도 했는데, 그때가 되어서야 로메르는 내가 속인 걸 알면서도 그 편집을 그냥 넘어가 주었다.

이동 장면의 리듬에 대해서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로메르는 사람들이 이동하며 방문하는 장소들을 짧은 두세 개의 연속된 컷으로 보여주는 걸 좋아했다. 많은 영화에서 이런 편집을 볼 수 있다. 이런 편집의 리듬은 현대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관객 2 계절 연작은 봄-여름-가을-겨울의 순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



마리 스테판 실리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 일단 <봄 이야기>(1990)로 계절 연작을 시작했다. 그런데 로메르는 영화 한 편을 준비하는 데 보통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그러다 보니 <봄 이야기> 다음에는 <겨울 이야기>(1992)를 찍었고, 다시 1년 반 정도 걸려서 <여름 이야기>(1996)를 찍었다. 순서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정해졌다. 그리고 <가을 이야기>는 그 시기의 포도밭을 찍어야 해서 시간이 더 걸린 것도 있었다.

관객 3 로메르의 인물들은 항상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로메르의 영화는 ‘버퍼링’이 없는 경제적인 영화란 생각도 든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비교해볼 수도 있고,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에 나오는 침묵의 순간과도 비교해볼 수 있다.

마리 스테판 로메르의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대화들은 매우 잘 쓰여져 있다. 실제로 그는 대화를 매우 좋아했고, 영화에서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반대도 있다. 그는 좋은 영화란 모든 대사를 제거해도 화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는 영화라고 자주 말했다. 캐릭터의 움직임과 표정만으로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캐릭터의 감정은 어떤지 정확히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로메르의 영화는 소리를 끄고 봐도 그들의 표정과 동작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로메르는 무성 영화를 좋아했다.

한국이나 대만의 독립영화 중에는 가만히 있는 카메라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을 길게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로메르는 절대 그런 경우를 허용하지 않았다. 항상 프레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 로메르의 영화는 느리지 않다. 모든 숏이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관객 4 로메르 감독이 편집의 테크닉적인 측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게 무엇인지 듣고 싶다.

마리 스테판 풍경이라고 말하고 싶다. 풍경과 배경. 이를테면 <가을 이야기>의 망가진 마을, 시골길을 달리는 차들의 숏 같은 것들이다. 로메르는 그런 장면을 항상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인간의 몸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걸 보는 걸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이동 숏이 영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대화의 경우에는, 로메르는 대화 장면을 탁구 시합처럼 편집하지 않는다. 소위 ‘토킹 헤드’ 방식이 아니다. 많은 영화들이 말하는 사람을 먼저 보여준 다음 듣는 사람을 보여준다. 하지만 로메르는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한 사람의 표정에 머무르는 순간이 많다. 카메라가 이 사람 저 사람을 왔다갔다하며 혼란을 주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관객 5 로메르 감독님의 영화 속 인물들은 왠지 화를 안 낼 것 같다(웃음). 로메르의 캐릭터와 실제 로메르 감독님이 얼마나 닮았는지 듣고 싶다.

마리 스테판 보통 화를 낸다고 하면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는 걸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로메르는 조용한 목소리로 ‘아 그래? 네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걸 모르겠니?’ 이런 식으로 말한다(웃음). 하지만 나는 그가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기만 해도 충격을 받고는 했었다. 평소의 로메르는 매우 젠틀하다. 나는 무화과 과자를 좋아했는데 편집실에 올 때 일부러 그 과자를 사오기도 했다. 사람에게 불편한 내색을 비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스탭들이 로메르에게 익숙해져서 다른 감독과 작업을 할 때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다른 감독들 중에는 자신이 감독이란 사실을 너무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진정한 감독이 되는 길은 모든 일에 화를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럴 때마다 당황한다. 이게 전부 로메르와 오랜 시간 일했기 때문이다.


정리 l 김보년 프로그램팀

사진 l 주민규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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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기타노 다케시 회고전]

 

 

기타노 다케시, 웃음과 폭력으로 빚은 삶의 이중주

 

 

1990년대 중반, 한국 대학가에서는 국내 개봉이 금지(?)된 영화를 비디오에 복제하여 돌려보는 게 유행이었다. 일본 문화가 전면 금지되었던 시기라 일본 영화가 특히 인기였다. <감각의 제국>의 오시마 나기사, <쉘 위 댄스>의 수오 마사유키, <러브레터>의 이와이 슌지, <철남>의 츠카모토 신야, <링>의 나카타 히데오 등이 전설 같은 감독으로 회자되었다. 그리고 또 한 명, 바로 ‘기타노 다케시’가 있었다.

기타노 다케시의 <3-4X10월>(1990)은 개인적으로 처음 본 일본 영화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제목, 대사보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캐릭터들의 반응, 우회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폭력 묘사 등 영화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본에서도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출현은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 ‘비트 다케시’라는 이름으로 매일같이 TV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시시껍적한 농담이나 내뱉던 그가 영화를 만들었다고? 그것도 웃고 떠드는 코미디와는 달리 선혈이 낭자한 형사물을?



그 남자의 영화, 별나다

기타노 다케시가 <그 남자, 흉폭하다>(1989)를 통해 연출자로 데뷔한 일화는 유명하다. 내정됐던 감독(<의리 없는 전쟁>(1973)의 후카사쿠 긴지!)이 연출직을 포기하자 제작진은 급하게 대안이 필요했고 배우로 출연하기로 했던 기타노 다케시가 계획에도 없던 연출까지 맡게 됐다. 오시마 나기사의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를 비롯하여 배우로서 몇 편의 영화 현장을 경험한 적이 있던 기타노 다케시는 자신의 비전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 남자, 흉폭하다>에는 제목에 걸맞게 툭하면 폭력을 행사해 문제를 일으키는 형사 아즈마(기타노 다케시)가 등장한다. 동료의 죽음을 계기로 마약밀매 조직을 쫓던 중 경찰 일부가 연루된 사실을 알게 된다는 내용은 그리 새롭다고 할 수 없다. 그런 편견은 접어두라는 듯 기타노 다케시는 아즈마를 소개하는 첫 장면부터 파격을 선사한다. 나이 든 노숙자를 린치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그러하거니와 그중 주동자의 집을 찾아간 아즈마가 아이라고 봐주지 않겠다는 듯 주먹을 휘둘러 자백을 받아내는 장면은 당혹스러운 데가 있다.

영화감독으로 첫발을 디딘 기타노 다케시의 입장에서 이 장면은 일종의 선언과도 같다. TV에서는 코미디언으로 웃음과 같은 밝은 면을 부각한다면 영화에서는 폭력으로 인간 심리의 어두운 면을 탐구하겠다는 의지로 비치기 때문이다. 이는 TV와 스크린으로 오가는 기타노 다케시의 영리한 전략이기에 앞서 그의 삶의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기타노 다케시가 본격적인 코미디 활동을 위해 대학교를 그만두고 아사쿠사의 코미디 극장에 들어간 것은 1968년이었다. 일본 현대사에서 1968년은 학생운동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였다. 미일 안보조약의 개정을 놓고 학생들은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고 이에 대학마다 전공투가 결성되는 등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학내 분위기와 달리 기타노 다케시는 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듯 코미디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생애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의 이력은 TV와 스크린을 시계추처럼 오가는 현재의 작품 활동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모순(?)으로 점철된 그의 삶처럼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의 리듬은 ‘역설’이다. 이번 기타노 다케시 회고전의 부제가 ‘웃음과 폭력’이듯 그의 작품에는 장면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감정들이 모순의 리듬을 만들어 영화의 결을 쌓아간다. 예컨대, <그 남자, 흉폭하다>의 중반부에는 아즈마가 동료 경찰에 상해를 입히고 도망가는 범죄자를 쫓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할리우드의 형사물과 다르게 썩 볼품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시야에 들어온 먹잇감은 놓치지 않는 아즈마의 면모와 더불어 쓸쓸한 색소폰 음악을 배경에 깔아 악명 높은 이 폭력 경찰의 애잔함을 노출하는 각성 효과를 이뤄낸다.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의 젊은 시절을 토대로 <아사쿠사 키드>(2002)를 만들고 <소나티네>(1993)에 대해 감독과 직접 장시간 인터뷰를 나눈 시노자키 마코토 감독은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 대해 이런 평가를 한다. “인간은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모두 갖고 있다. 기타노 다케시는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형사물과 야쿠자물을 만든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인데 그게 굉장히 영화적이다.” <그 남자, 흉폭하다>로 인상적인 데뷔를 마친 기타노 다케시의 세계관을 완성한 작품을 꼽자면, <소나티네>와 <하나비>(1997)다.

 

그 남자의 삶과 죽음

<그 남자, 흉폭하다> 이후 <3-4X10월>과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1991)를 만들며 감독으로서 일본 내에 입지를 굳히던 기타노 다케시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작품은 <소나티네>다. 그리고 그의 명성을 다시금 확인시켜준 작품은 베니스영화제의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하나비>다.

<소나티네>는 원래 일본판 <다이 하드>를 만들어 보자는 프로듀서의 권유로 시작한 작품이었다. 기타노 다케시는 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소나티네>로 삶과 죽음에 대해 탐구하고 싶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영화를 만들기 전 예능 활동을 하며 친하게 지냈던 동료가 자살하는 일이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함께 술을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였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삶이 허무하게 다가왔다.

<소나티네>와 <하나비>를 최고 작품으로 치는 건 기타노 다케시가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가장 강렬한 방식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담보하는 까닭이다. 그중 하나가 ‘불꽃놀이’의 이미지다. 화려하게 피어났다 곧바로 사그라지는 불꽃놀이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삶과 죽음의 관계를 연상한다. <소나티네>는 조직의 명에 따라 오키나와로 갔다가 음모에 빠지는 내용을 다룬다. 음모를 피하고자 은신하는 동안 주인공 야쿠자들은 해변에서 상대방을 향해 폭죽을 쏘아대며 노닥거리는 등 무료한 시간을 달랜다. 이는 후에 중간보스 무라카와(기타노 다케시)가 음모를 꾸민 조직의 보스를 찾아 총을 난사할 때 불 꺼진 건물 밖으로 비추는 점멸하는 불빛, 즉 유사 불꽃놀이 이미지로 변형된다.

기타노 다케시가 폭력과 죽음을 묘사하는 방식은 과장하거나 부러 축소하는 법이 없다. 직접적이되 어떠한 수식도 가미하지 않아 일상적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죽음은 보통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찾아온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죽음은 삶에 허무를 덧씌운다. 기타노 다케시가 <소나티네>에서 야쿠자를 등장시키고도 종이 인형을 만들어 놀고, 스모 시합을 하는 등 사소해 보이는 시간에 많은 장면을 할애하며 웃음을 주는 이유다. 별 의미 없이 흐르는 시간에 역설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배경이다.  



‘꽃’(花)과 ‘불’(火)을 합성한 <하나비(花火)>는 제목 자체가 ‘불꽃’이다. 이 영화의 불꽃놀이 이미지는 그림으로 제시된다. 니시(기타노 다케시) 형사와 짝을 이뤄 야쿠자를 소탕하던 호리베(오스기 렌)는 잠복근무 중 총을 맞고 하반신이 마비된다. 이에 가족이 떠나고 자살 시도까지 하는 호리베는 니시가 보내준 화구로 그림을 그리며 삶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호리베가 그리는 그림 중 하나는 불꽃놀이다. 화려하게 피었다 사라지는 실제 불꽃놀이와 다르게 그림에는 불꽃이 터지는 순간이 담겨 있다. 불꽃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호리베에게 있어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기타노 다케시는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시노자키 마코토의 질문에 “나의 역사를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TV에서 너무나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최대한 솔직한 감정으로 영화에 임한다. 내 영화를 구성하는 건 나의 본질과 가장 가까운 어둠이다.” <하나비>를 만들기 전 기타노 다케시는 오토바이를 타던 중 큰 사고를 당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은 삶과 죽음의 관계를 더욱 깊이 사유하도록 했는데 그 결과로 이어진 작품이 <하나비>다.

이 영화에는 죽음의 입구에서 삶으로 유턴하는 호리베의 대척점에 죽음을 향해 가는 니시 형사가 있다. 생과 사가 그렇게 짝을 이뤄 인간의 삶을 구성하듯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폭력과 웃음, 도시와 자연, 땅과 하늘, 빛과 어둠 등 두 개의 개념이 대립하는 가운데 결국 공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는 개별 영화뿐 아니라 기타노 다케시의 필모그래피에서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 남자의 가장 조용한 영화

기타노 다케시는 확고한 연출 철학을 가지고 있다. 대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설명을 하면 할수록 영화는 더 나빠진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기타노 다케시의 철학을 극명한 형태로 보여주는 작품이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다.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청년 시게루(마키 구로도)가 여자 친구의 응원을 받으며 서핑을 독학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A4 한 장 분량도 안 되는 듯한 대사만 등장하는 이 영화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인물의 감정을 유발하는 건 반응숏이다.  

쓰레기 수거일을 하다 서프보드를 발견한 그가 처음 바다로 나가 서핑을 하는 광경에 관한 주변의 반응이 그렇다. 서핑이 능숙한 이들의 얼굴에는 서핑에 대한 지식도 없이 바다로 뛰어든 시게루를 향한 황당한 반응이 주를 이룬다. 그에 반해 여자 친구의 얼굴에는 도전에 나선 남자 친구를 향한 응원과 사랑하는 마음이 카메라에 한가득 향기롭게 묻어난다. 이처럼 대조적인 반응은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시게루의 서핑에 대한 주변의 감정이 변화해 가면서 여운을 남기는 식이다.

기타노 다케시 특유의 편집 방식은 인물을 말이 아니라 행위로 규정한다. 기타노의 서정적인 영화 중 한 편인 <키즈 리턴>은 청춘물이 으레 그렇듯 요란하거나 호들갑스럽지 않다. 영화는 한 명은 권투선수로, 한 명은 야쿠자로 승승장구하다 미끄러지는 과정을 거리를 둔 채 바라본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히사이시 조의 음악만이 극 중 청춘을 향한 감독의 애정을 드러낼 뿐이다. 과도한 의미 부여 대신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운에 맡기며 좌충우돌하는 과정 자체를 청춘으로 바라본다.


혼란하다는 면에서 실은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 자체가 정신적으로는 청춘이다. <기쿠지로의 여름>(1999)의 기쿠지로(기타노 다케시)는 계획에도 없이 엄마를 찾아나선 아이와 여행길을 떠난다. 과묵한 아이 옆에서 시종일관 장난질을 멈추지 않는 기쿠지로에게 여행의 목적지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성공과 실패 따위 안중에도 없는 그에게 더 중요한 건 그 사이를 잇는 길 위의 시간 그 자체다. 목적지를 향하는 동안은 무료하다. 기쿠지로에게 지루한 시간에 변화를 가져오는 건 장난질이다.

볼품없어 보이는 기쿠지로의 삶이 주는 교훈은 위대한 인물의 그것보다 더 의미 있어 보인다. 성공과 실패로만 규정되는 유한한 삶보다 더 무한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의도다. 기타노 다케시는 기쿠지로와 같은 여전히 청춘인 자신의 영화 속 인물에게서 바다를 느낀다.

바다는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이후 기타노 다케시의 세계관을 이루는 중요한 배경 중 하나다. 물에 몸을 담그긴 싫어도 멀리서 바라보는 건 좋아하는 기타노에게 바다는 우리네 삶의 은유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바다 위의 파도는 똑같이 반복되는 것 같아도 매번 다른 형태로 찾아온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유한한 것 같아도 무한하다. 바다는 그런 무한의 시간을 품고 있다. 기타노 역시 <소나티네>로 대표되는 야쿠자물과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와 같은 서정적인 작품을 파도처럼 오가며 자신만의 영화의 바다에서 무한으로 나아간다.   

 

기타노 다케시, 만세!

<기쿠지로의 여름> 이후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특유의 독창성을 잃은 듯한 행보를 보인다. 물론 <자토이치>(2003)처럼 일본 영화 역사에서 반복되는 소재를 변형하여 재미를 준 작품도 있다. 하지만 <아웃레이지>(2010)처럼 자극적인 묘사로 일관하거나 ‘도저히 분류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기염(?)을 토한 <다케시즈>(2005)처럼 소재의 참신함에 그친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최신작 <8인의 수상한 신사들>(2014) 역시 전직 야쿠자 할아버지들이 등장한다는 점이 흥미롭지만, 그냥 평이한 코미디물 수준이다. 앞으로의 작품 또한, 그렇지 않을까 예상이 되지만, 그런데도 기대하게 되는 건 그가 기타노 다케시이기 때문이다.



<소나티네>의 원래 제목은 ‘오키나와 피에로’이었다. 극 중 배경 오키나와와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삐에로>를 변형시킨 제목이었다. <소나티네>로 변경한 건 당시 피아노를 배우던 기타노 다케시가 한창 연습 중이던 곡이 ‘소나티네’인 것과 관련이 있다. 피아노를 배우고 어느 정도 손에 익으면 ‘소나티네’를 연주한다고 한다. 다만, 그 이후로 넘어가기가 쉽지 않아 반복 연습이 필요한 곡이라고 하는데 영화도 계속 만들다 보면 더 나아질 거라는 생각에 ‘소나티네’라는 제목이 탄생했다.  

어쩌면 기타노 다케시의 최근 작품목록은 다음 단계의 영화로 넘어가기 위한 연습 단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꾸준히 만들다 보면 <하나비>나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를 넘어선 또 다른 차원의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3-4X10월>은 야구를 함께하는 젊은이들이 탱크로리를 타고 야쿠자에게 복수하는 내용의 영화다. 제목의 ‘3-4’는 9회말에 날리는 역전 홈런을 의미하는 일본의 야구 용어라고 한다(10월은 그때 영화를 촬영했기 때문에 붙인 거라고!). 2000년 중반 이후의 필모그래프를 두고 한물 갔다고 놀려대는 이들에게 기타노 다케시가 멋지게 복수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실제로 그런 날이 온다면 이렇게 외치겠다. 감독 만세! 기타노 다케시 만세!

 




글 l 허남웅 영화평론가

그림 l 허남준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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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Special]

 

 

“우리의 목표는 멀티플렉스와 정확히 반대다”

- 벨라이트 박스 대표 피어스 핸들링 초청 워크숍

 

 

지난 3월 15일(수)과 16일(목),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는 서울아트시네마를 포함한 전국의 시네마테크 관계자들과 모여 ‘시네마테크 건립,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워크숍을 진행했다. 이번 워크숍은 특별히 토론토에 위치한 시네마테크 ‘벨라이트 박스(Bell Lightbox)’의 피어스 핸들링 대표를 초대하여 진행했다. 열정적인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한 핸들링 씨는 시네마테크 건립을 위해서는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긴 시간 동안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이 지면에는 3월 15일의 워크숍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는 오랜 시간 동안 전용관 마련을 촉구해왔다. 그 성과로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네마테크 전용관 건립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현재 실제로 건립을 진행 중이다. 오늘은 중요한 손님을 한 분 모셔서 특별한 사례를 직접 들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토론토 벨라이트 박스의 대표인 피어스 핸들링 씨를 모셨다. 피어스 씨는 1982년부터 토론토영화제에서 일을 시작했고, 2010년에는 성공적으로 벨라이트 박스를 건립했다.

피어스 핸들링(벨라이트 박스 대표) 도시마다 다양한 특징이 있다. 나는 토론토에서 벨라이트 박스를 건립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서울은 서울만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일종의 케이스 스터디로 봐주면 좋겠다. 그래도 대략의 아이디어와 공통적인 철학은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 목표와 철학

벨라이트 박스를 만드는 데 열정적이었던 이유는 영구적인 시네마테크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는 영화를 통해서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었다. 영화는 궁극적으로 더 적극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고, 나아가 연결된 세계를 만들어준다. 우리가 토론토에서 하는 일은 모두 이 목표 아래 있었다. 특히 모든 연령대의 관객을 흡수하고 그들에게 영화에 대한 정보를 주고 연결하는 문화기관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일은 1976년에 처음 시작됐다. 우리는 토론토영화제를 시작했고, 14년이 지난 다음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일 년에 단 열흘이 아닌, 일 년 내내 상영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이 필요했고, 그런 프로그래밍을 선보일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즉 관객과 일 년 내내 소통하고 싶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영화의 역사에 더 쉽게 접근하게 만들고 싶었다. 상업적이고 내러티브 위주의 ‘미국적인 영화’만 접할 수 있는 관객에게 새로운 장소를 선보이고 싶었다.



- 벨라이트 박스의 건립 과정

‘토론토키즈필름페스티벌’이란 영화제가 있다. 당시에는 아이들을 위한 영화제가 없었지만 우리는 이들이야말로 미래의 시네필이라고 생각했다. 이 프로그램을 일 년 동안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싶었기 때문에 일단 토론토 바깥에서 순회 상영을 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커뮤니티가 지금은 160개가 넘는다. 이 순회 상영 프로그램을 통해서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제3세계 영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영화들을 지금까지 상영하고 있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부터 토론토영화제(TIFF)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만 순회 상영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몰랐다. 왜냐하면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영화 역사에 관한 특별한 콜렉션을 만들고 싶었다. 필름, 대본, 영화 소품 등 특별한 자료들을 캐나다 영화인들로부터 기부받기 시작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가이 매딘, 아톰 에고이양 등이 선뜻 우리에게 귀한 자료를 보내주었다. 처음에는 이걸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일단 보존이 중요했고 전시를 할 공간도 필요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안정적인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토론토영화제는 빌딩의 일부분을 빌려서 쓰고 있었는데 1층은 우리가 쓰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온타리오에 작은 스크리닝룸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안정적인 공간을 마련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5년이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10년이 걸렸다. 당시 우리는 부지가 없었기 때문에 부지를 찾는 일부터 시작했다. 일단은 토론토 시내 안에서 부지를 찾았다. 사람들이 찾아오기 편한 곳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의 소통이 활발한 곳이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이반 라이트먼 감독의 가문과 만났고 좋은 부지를 찾을 수 있었다. 시내에 있었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었으며 지하철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주변 환경도 괜찮았다. 참고로 이 부지를 소유한 분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단순히 상업적 공간이 아닌 예술적 유산을 남기고 싶어 했다. 그분들도 우리의 제안을 환영해주었다.

부지를 확보한 다음에는 건립에 필요한 기금을 모았다. 정부뿐 아니라 기업, 개인에게도 후원을 받았다. 총 1억 9천 6백만 달러의 기금을 모으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건축을 하면서도 돈을 모아야 했다. 펀딩의 과정은 물론 쉽지 않았다. 일단 캐나다의 영화인들을 찾아가 왜 우리가 이런 일을 하고 왜 이런 건물이 필요한지 설득했다. 정부를 설득하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정부 사람들은 이 건물의 필요성을 처음에는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열흘 동안 영화제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1년 동안 운영하는 프로그램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멀티플렉스의 목적은 쉽게 이해를 한다. 그 공간을 찾는 사람들은 빨리 왔다가 빨리 떠난다. 사람의 순환이 빨리 이루어진다. 그렇게 해야만 운영이 잘 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하려는 건 멀티플렉스와 정확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최대한 이 공간에 오래 머무르기를 바랐다.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고, 밥을 먹고, 전시를 보게 하고 싶었다.

내가 다시 강조하고 싶은 건 이 과정이 정말 어려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벨라이트 박스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토론토영화제는 큰 축제이고 경제적인 이득을 직접 가져다주기 때문에 모두가 환영했다. 하지만 시네마테크의 아카데믹하고 문화적인 필요에 대해서는 전혀 인지를 못 했다. 상업적 이득은 쉽게 설명할 수 있지만 문화적 이득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결국 위원회에서 영향력이 큰 몇 사람들을 런던, 파리, 뉴욕, 베를린에 있는 시네마테크로 견학을 보내주었다. 결과적으로 이 견학이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다. 위원회는 생각을 바꾸고 우리의 목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닌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만약 우리가 오페라하우스나 박물관을 만든다고 하면 설득이 좀 더 쉬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네마테크, 나아가 복합 영화 공간을 만든다고 했을 때 우리가 어떤 공간을 목표로 하는지 설명하는 게 쉽지 않았다.

- 벨라이트 박스의 공간 구성

그렇게 건물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그 건물 안에 무엇을 넣을지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영화관, 전시공간, 카페, 레스토랑 등 대략적인 아이디어만 있었다. 그래서 토론토영화제의 모든 스탭을 참여시켜 각 분야에 대한 리서치를 시작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영화관이 영화만 보는 곳이 아니라 사회적인 장소가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바(BAR)나 레스토랑도 중요했다. 각 팀은 런던, 베를린, 파리, 시카고 등 여러 도시의 영화 공간을 둘러보며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회의를 했다.

현재 벨라이트 박스에는 영화관 여섯 개, 큰 갤러리 하나, 작은 갤러리 하나가 있다. 그리고 세 개의 스튜디오가 있고, 카페, 레스토랑, 매점, 기념품 가게 등이 있다. 1층부터 3층은 대중에게 열려 있고, 4~5층은 200명이 넘는 스탭들이 일하는 사무 공간이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대중들이 이용하는 공간이고, 가장 돈을 많이 쓴 공간은 상영관이었다.

상영관에 대해서는 정말 많은 논의를 했다. 처음에는 1,000석짜리 상영관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영화제 이외의 기간에 그 관을 채우는 건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건물을 짓는 동안 영화가 점점 디지털화되기 시작했고 3D도 대중화되었다. 결국 한 관을 빼고는 전부 디지털 상영, 4K 상영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관마다 차이는 있지만 3D는 물론 70mm, 16mm, 8mm 등 거의 모든 포맷이 상영 가능하다. 가장 큰 관은 550석이고 시네마테크관은 150석, 가장 작은 관은 40석으로 운영하고 있다. 가장 작은 관은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설계했다. 지금은 의자를 다 뺀 다음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데 주로 사용하고 있다. 두 개의 영사실이 다섯 개 관을 동시에 담당할 수 있게 설계했다.

또한 다른 행사를 진행하는 데 용이하도록 각 상영관마다 스테이지를 따로 만들었다. 가장 큰 관에서 무성영화를 상영할 때는 오케스트라를 세팅해서 연주 상영을 진행하기도 했다. 완벽한 영화적 경험을 관객들에게 선사하고 싶었기 때문에 특히 사운드에 많은 신경을 썼다. ‘박스인박스’. 즉 일단 콘크리트로 관을 만든 다음 벽과 천장에 고무를 입히고 다시 콘크리트 마감을 했다. 사운드가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고 했다. 우리의 목표는 캐나다에서 가장 좋은 극장을 만드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 목표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1층에 있는 캐주얼한 레스토랑은 항상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좀 더 비싼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도 있다. 현재 사무공간은 17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37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참고로 2003년에는 스탭이 60명이었고 2010년에는 180명이었다.




- 전시 및 교육 프로그램

유럽의 영화 공간들을 둘러보다 파리에서 진행 중인 히치콕의 전시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정말 훌륭한 전시였다. 현재 벨라이트 박스도 두 개의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스탠리 큐브릭전, 제임스 본드전, 그레이스 켈리전, 팀 버튼전 등을 개최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전은 우리가 직접 감독에게 전시품을 기증받아 기획한 전시회다. 메리 픽포드 전시를 할 때는 토론토의 한 콜렉터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교육 프로그램도 열심히 운영 중이다. 특히 필름 라이브러리가 이제 집을 갖게 됐기 때문에 지역 대학이나 다른 커뮤니티와의 협력이 수월해졌다. 아이와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주로 기획하고 있다.

- 조언

벨라이트 박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배운 게 몇 가지 있다. 일단 비전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그려야 한다. 우리는 이 건물은 다른 사람이 아닌 관객을 위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건물을 실제로 사용할 사람들과 소통을 해야 한다. 관객과 영화인, 정부, 기업으로부터 계속해서 피드백을 받았고, 지금도 의견을 듣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란 걸 염두에 두면 좋겠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5년 뒤, 20년 뒤를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벨라이트 박스를 만든 지 7년이 지났는데 벌써 무서운 생각들이 든다. 이미 우리의 사무 공간은 부족해지기 시작했고, 1층의 큰 갤러리에는 생각보다 적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갤러리를 다시 디자인해서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있게 하려고 고민 중이다). 당시에는 이런 문제를 예상하지 못했다.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미리 고민해야 한다. 건물을 지을 때 어떤 계획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문을 열고 대중들이 찾기 전까지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단지 건물을 짓는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질문 1 설득의 과정과 전략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피어스 핸들링 한국의 관객과 영화인들이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통해 얼마나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특히 한국영화의 발전과 앞으로 자라날 영화 꿈나무를 어떻게 지원할 수 있는지 설득해야 한다. 공무원들의 대부분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 문화적 이익 같은 건 이해를 하지 못한다. 항상 경제에 대한 부분을 강조해야 한다.

최근 젊은 관객들은 ‘영상’에는 익숙하지만 역설적으로 ‘영화’ 매체를 접할 기회는 별로 없다. 지금은 이미지의 시대다. 이미지 리터러시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이런 교육이 어떻게 산업에 실제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치는지 설득하는 게 좋다. 시네마테크가 아니면 영화의 역사나 매체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걸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도시든 지식인과 창작자를 끌어들이는 게 중요하다. 모든 공동체는 아이들에게 교육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북미의 경우는 그런 문화 시설을 유치하려고 경쟁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십 대 시절에 문화적으로 좋은 환경에 노출되면 성인으로 자란 다음에도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즉, 이는 서울의 미래 경쟁력 문제와 직결된다.

질문 2 토론토의 인구가 250만 명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벨라이트 박스는 다섯 개 관을 운영 중인데 그 규모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나?

 

피어스 핸들링 상영관의 수를 정할 때 인구는 고려하지 않고 산업 규모를 고려했다. 몬트리올에 아트하우스 극장이 있다. 그들은 세 개의 관을 운영 중인데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현재 벨라이트 박스의 상영관 중 세 곳은 상업 영화와 비상업 영화의 중간에 있는 작품들을 상영한다. <문라이트>, <토니 에드만> 같은 일반 멀티플렉스에서 필요한 만큼 상영횟수를 보장받지 못하는 영화들이다. 적어도 관이 세 개는 있어야 이런 영화들을 안정적으로 상영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관은 시네마테크 관으로 운영하고 있고, 또 한 관은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과 소규모 영화제를 위한 공간으로 운영 중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7년이 걸렸고, 이제서야 우리가 처음에 예상했던 수의 관객들이 오고 있다. 여기서 관객이 더 늘어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 건물이 어떤 곳인지 몰랐다.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완벽히 상업적인 공간이 아닌 이상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는 쉽지 않다. 많이 기다려야 한다.

질문 3 기업의 후원을 어떻게 받고 있나.

 

피어스 핸들링 기업들은 무언가를 원하기 때문에 후원을 한다. 우리 극장의 관객들의 많은 수는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그래서 기업들도 경쟁적으로 우리에게 후원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은행, IT기업, 옷, 시계, 주류 회사 등 100개 정도의 기업 후원을 받았다. 이들은 보통 토론토영화제 기간에 후원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그중 몇몇 회사에게 1년 내내 벨라이트 박스에 후원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즉 토론토영화제에 후원하고 싶은 기업은 장기적인 후원을 해야만 한다.

질문 4 벨라이트 박스의 필름아카이브 시설이 궁금하다.

 

피어스 핸들링 현재 프린트 콜렉션이 4,000편 정도 있다(나는 이걸 ‘아카이브’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중 반은 35mm이고 나머지는 16mm이다. 그리고 복원을 위한 네거티브 프린트, 즉 진짜 ‘아카이브’는 100편에 못 미친다. 이걸 유지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지만 정부에서 지원을 해주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나는 경제적인 모델이 하나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는 어떤 부유한 개인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후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영화계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최근 조지 루카스가 자신의 컬렉션으로 영화 박물관을 짓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게 아마 최초의 사례이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영화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등장해 시네마테크나 영화 박물관을 짓는 사례가 생기기를 희망한다.


정리 l 김보년 프로그램팀

사진 l 하수정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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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로메르 회고전]


로메르의 산책


에릭 로메르의 25편의 극영화 중 13편의 영화가 파리를 배경으로 한다. 게다가 다큐멘터리 시리즈(신도시에 관한 다큐멘터리 등)와 6편의 단편 영화의 무대 또한 파리, 혹은 파리 근교이다. 손쉽게 우리는 로메르의 영화를 파리 산책영화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거리를 돌아다니고, 때로는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인물들이 이동한다. 카메라가 로케이션을 도입하고 인물들이 공간을 돌아다니는 것으로 사건이라 부를 법한 이야기가 벌어지고, 때론 기적 같은 우연도 발생한다. ‘도덕 이야기’의 첫 작품 <몽소 빵집의 소녀>는 일찌감치 이런 형식을 예시한다. 영화의 중심에 정확하게 몽소 거리라는 장소가 위치하고, 첫 장면부터 주인공이 이를 소개한다. ‘파리 빌리에 가로수 길의 코너 동쪽으로는 바티뇰 대로가 있다. 북쪽으로는 레비 거리와 시장 돔므 드 빌르. 카페 왼쪽으로는 다시 빌리에 가로수 길이 있고, 지하철 서쪽으로는 쿠르셀 대로가 있는데, 쭉 가면 몽소 공원과 학생들의 거주 지대였던 시티클럽을 허문 자리가 나온다. 법대에 있는 동안에는 줄곧 그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몽소 거리의 갤러리에서 일하는 실비는 항상 공원을 지나 집으로 갔다.’ 이토록 상세하게 거리를 소개하는 것은 전혀 극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결국 이 영화는 몽소 거리를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다. 이 거리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간 한 여인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다. 남자는 그녀를 찾아 거리를 돌아다니고, 배가 고파 들린 빵집에서 다른 소녀를 만나게 된다. 이제부터 고민이다. 그는 우연히 만났던 그녀와의 재회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소녀와 만남을 시도할 것인가.


산책 형식이 로메르 영화의 특징이긴 해도 그에게만 고유한 것도 아니고(고다르, 리베트, 바르다 혹은 자크 로지에의 예를 들 수 있겠다), 인물이 정작 산책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그들은 여유롭지 않고 산책보다는 자기 문제에 빠져 있으며, 주변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몽소 빵집의 소녀>에서 주인공의 여정은 사라진 실비를 찾는 목적에 충실하다. 그는 게다가 배가 고프다. <비행사의 아내>의 주인공은 산책하기에는 이미 심신이 피곤하다. 그는 밤새워 일한 탓에 꾸벅꾸벅 졸고 그 때문에 그가 제대로 보지 못한 일들로 불가해한 사건이 발생한다.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에서 파리 근교에 사는 주인공들 또한 전형적으로 틀에 박힌 여정을 반복한다. 로메르적 우연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럼에도 이들이 집에 갇혀 있기보다는 열린 공간을 돌아다니는 움직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카페와 식당, 거리의 공공 공간들에서나 예기치 않은 우연적 만남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산책이 비록 인물의 주 관심이 아니더라도 로메르의 인물들은 거리를, 도시를 돌아다녀야만 한다. 로메르가 기획한 이런 도시적 여정의 건축적 범례는 벤야민이 논했던 파사쥬와 유사해 보인다. 파사쥬란 바깥이지만, 결국 닫힌 공간이다.



그렇다고 로메르 영화 속 인물들이 파리만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다. 시대를 달리해 여정은 두 가지 중요한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 하나는 파리 바깥, 지방으로의 휴가, 이른바 바캉스의 여정이다. 60년대 후반 이래로 이런 여정이 로메르 영화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비아리츠, 칼레, 도빌, 루르, 코트 다 쥐르 등등, 무엇보다 바다, 해변이 영화의 무대로 등장한다. 다른 하나는 대체로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파리 근교의 영화들이다. 이를테면 도시와 근교를 오가는 영화들이 등장한다. 대체로 ‘희극과 격언’ 시리즈의 작품들이 그러하다. 도시를 세밀하게 포착하는 현실주의자 로메르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이런 변경의 원인에 거리의 위기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60년대 초반까지 그가 주목한 것은 인물들이 숨쉬기 위한, 완전히 살기 위한 도시에서의 움직임이다. 누벨바그 작가들이 도둑 촬영을 무릅쓰고 거리에서 촬영했던 근본적인 목표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6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파리의 거리는 정치의 열기로 뜨거워진다. 그가 파리를 떠나는 시기가 대략 1965년을 거치면서다. 1967년의 <수집가>의 해변, 1969년의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의 클레르몽-페랑, 1970년의 <클레르의 무릎>의 해변 등이 이후에 나온 작품들이다. 그렇다고 로메르의 바캉스가 거리의 정치를 피한 결과라고, 그의 보수적 태도(!)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68혁명 직후 겨울의 클레르몽-페랑에서 촬영한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은 보수적인 작품인가? 이에 대한 논란을 다루기보다는 모드가 주인공 남자에게 했던 ‘당신은 어디를 가든 마을 사람들에게 비난받는다’라는 말을 떠올리고 싶다. 그는 말하자면 클레르몽-페랑의 폭설에, 사람들의 구설수에 갇힌 존재다. 파리의 현재 시간에서 벗어나 만든 시대극 <O 후작 부인>이나 <영국 여인과 공작>에서 주목할 만한 것 또한 일상적인 공공 공간의 부재이다.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공공 공간에서 유폐된 여인들이다. <O 후작 부인>에서 상대를 알 수 없는 이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은 사람들의 구설수를 피해 집의 구석에 몰린다. 그리고 영국에서 건너온 여인은 프랑스 혁명 시 폭력과 살인이 벌어지는 위험한 거리에서 몰려 집에 거주하는데 심지어 그녀의 침실에 혁명군이 난입한다. 여기서 요점은 산책이 불가능한 그들 일상의 파괴이다.


로메르 영화에 새롭게 등장한 신도시는 역사가 깊은 편이다(바캉스의 해변과 관련해서는 ‘바캉스의 영화’라는 예전의 글로 대신하고 싶다). 로메르는 이미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TV프로를 위해 건축과 도시 계획에 관한 수많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도시의 풍경 Paysages urbains>(1963), <풍경의 변모(공업 시대) Les métamorphoses du paysage: l'ère industrielle>(1964), <셀룰로이드와 대리석 Le celluloïd et le marbre>(1966), <도시의 시멘트 La béton dans la ville>(1969), <새로운 도시 1-4 Enfance d'une ville>(1975)에 이르는 다큐멘터리 작업은 이후 <보름달이 뜨는 밤>(1984)과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의 배경으로 사용되었다.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는 파리에서 20km 정도 떨어진 신도시 세르지 퐁투아즈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희극이다. 주택만이 아니라 대학, 연구기관, 사무실이 새롭게 지어진 곳이다. 신도시 쇼핑센터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좁은 곳으로, 이곳에서 두 주인공 남녀는 하루에 일곱 번이나 우연적인 만남을 거듭해 결국 친구의 친구와 연인이 되어버린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서는 파리 북부의 신도시 마른 라 발레에 거주하면서 직장은 파리에 두고 있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렸다. 그녀는 파리를 사랑한다. 밤과 축제들. 동시에 신도시의 평온함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두 집을 갖고 있으면 정신이 이상해진다’라는 격언처럼 이동이 가져오는 곤란함을 보여준다. 공간을 드러내면서 이야기의 부재로 향했던 모던 영화와 달리 로메르는 반대로 공간의 과잉에서 이야기의 풍부함을 끌어온다. 파리 산책을 다룬 일종의 옴니버스 영화인 <파리의 랑데부>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꽤 재밌는 결론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파리지앵이라면 절대 가지 않는다는 퐁피두 근처의 카페를 우연을 핑계 삼아 가는데, 거기서 바람난 애인의 부정을 목격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깨닫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이를테면, 자기 안의 공간에서 보내는 삶의 본성상 어리석음, 혹은 불투명한 삶에 내재한 부조리한 우연 말이다. 그녀가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틀에 박힌 경로의 산책에서 벗어나 직면하는 사랑과 우연의 장난이다.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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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샤브롤 회고전]


샤브롤은 현실과 주류 영화를 통렬하게 풍자한다

- <야수는 죽어야 한다> 상영 후 이명세 감독 시네토크




김성욱(프로그램디렉터) 프랑스 문화원 시절에 영화들을 보고 다니던 사람들이 고다르, 트뤼포를 얘기할 때 이명세 감독은 유난히 샤브롤 얘기를 많이 했다고 들었다.

이명세(감독) 1970년대 말 불란서문화원의 시네 클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봤었다.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에릭 로메르,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들을 상영했다. 이 감독들은 당시 영화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고다르를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절이었다. 샤브롤의 영화가 재밌고 좋은데 샤브롤을 얘기하면 조금 무식해 보이는 분위기가 있었다(웃음). 누구나 그렇듯 나도 추리와 서스펜스 장르에 관심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샤브롤은 좀 독특했다. 살인이 벌어지는데 시각적으로 드러나지는 않고 이상한 유머도 쓴다. 긴장감을 강조하기 위해 주류 영화와는 다른 방법을 쓰는 것 같았다.


김성욱 샤브롤 영화는 오프닝이 흥미롭다. <야수는 죽어야 한다>에서 자동차에 꼬마 아이가 치이는 장면이 딱 세 개의 커트로 되어 있다. 그 장면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는데, 굉장히 과감한 연출이라는 생각이 든다. 줌의 활용도 특별하다.


이명세 클로드 샤브롤은 줌을 특이하게 많이 사용한다. 특히 60~70년대에는 줌을 안 쓰는 경향이 있었다. 줌을 쓰면 뭔가 촌스럽고, 소위 ‘작가’가 아니라는 분위기가 있다. 그런데 샤브롤은 그런 걸 비웃듯이 거칠게 보이는 연출을 많이 한다. 영화 후반부에는 샤를이 벽돌을 들었다 놓는 장면에서 줌과 패닝이 거칠게 들어간다. 블랙코미디 같다. 줌이 만드는 거친 느낌과 점프 컷의 조화, 그 불협화음이 좋았다.

전체적으로 진지한 영화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 코미디 장르의 연극으로 만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를이 폴의 정비소에서 증거를 찾으려 부품을 뒤적거리는 장면도 그렇다. 연기를 과장되거나 우스꽝스럽게 하는 것도 아닌데 유머가 있다. 관객을 가지고 논다고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영화와 관객 사이에 오가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특히 거실 장면에 블랙코미디적인 요소가 짙다. 폴의 어머니가 무척 인상적이지 않나. 며느리를 조롱하는 웃음도 그렇고 기괴한 느낌이 있다. 저 인물로 인해서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단순히 하나의 스릴러 서스펜스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김성욱 이 영화의 마지막에 관해서 논란이 조금 있었다. 실제로 기자가 샤브롤에게 묻기도 했다고 한다. 누가 폴을 죽였냐는 것이다. 그때 샤브롤은 “샤를이 폴을 죽인 장면을 당신은 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명세 『오리엔트 특급 살인』처럼 모든 사람이 폴을 죽였을 것 같지 않나?(웃음) 살인이 일어난 다음 TV 뉴스가 이 사건을 보여준다. 이때 폴의 엄마를 제외한 TV 화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표정이 전형적인 미스테리 연극처럼 그려진다. 폴을 죽일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사실 폴의 엄마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폴을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영화가 진짜 범인을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데 누가 범인이냐고 따지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김성욱 말씀하신 대로 폴은 죽인 진범에 대한 질문은 이 영화의 핵심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레스토랑 장면에서 샤를과 엘렌은 굉장히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그때 식탁에서는 웨이터가 닭을 자르고 있다. 이야기의 시간을 보면 그때 아마 폴이 죽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레스토랑 장면이 샤를이 폴을 죽이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명세 아주 클리셰적인 장면이다. 살인과 육식이 붙는 건 몽타주의 전형이다. 살인 후에 야채를 먹는 장면은 없지 않나(웃음). 그 당시에 만들어졌던 영화들, ‘주류 영화’들을 함께 놓고 생각하면 샤브롤이 무엇을 의도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냉소적인 시선이 있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김성욱 후반부에 모리스 피알라 감독이 형사로 등장한다. 영화를 찍을 수 없던 시절에 연기를 했었는데, 영화 속 그의 인상은 잊을 수가 없다. 그가 샤를이 일기를 쓴 이유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냐는, 위장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서 샤를의 나레이션이 자기 고백이 아니라 알리바이 그 자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내레이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이상한 말이지만, 샤브롤은 명확하면서도 모호한 영화를 찍고 있다. 명확해 보이지만 자꾸 생각하면 모호하다. 감독님도 잠정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살인자일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샤브롤에 관한 평을 썼던 외국의 평론가는 ‘범죄의 평등성’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이명세 샤를은 마지막 편지에서 마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사람처럼 말한 다음 바다로 떠난다. 그런데 그 장면 자체만 보면 바다가 너무 반짝거린다. 그냥 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 마지막 그 편지조차 알리바이로 보이기도 한다. 샤를은 처음 등장할 때도 가명으로 등장한다. 이후 자신의 진짜 이름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그 본명의 진위를 영화 안에서 밝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장면조차도 관객에게 내세우는 알리바이로 볼 수도 있다.

관객 범죄를 다루는 영화들을 보면 감독이 그 대상에 대해 취한 태도나 시선이 특히 도드라져 보인다. 영화 안에서 잔혹한 일을 묘사하는 것과 현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명세랙코미디적인 이야기들이 있다. 어떤 사람이 목을 매달아 죽으려고 했는데 도중에 의자가 부러지는 바람에 넘어져 죽었다, 같은 이야기들. 요즘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더 영화 같아서 시나리오를 못 쓰겠다고 말하는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맥락이다. 사실 우리가 어떻게 현실에서 살인을 볼 수 있겠나. 실제 인생은 그렇지 않은데 우리는 영화 안에서 항상 살인과 같은 비일상적 요소들과 계속 마주친다. 샤브롤은 이런 이상한 전형성을 통렬하게 풍자한다.

김성욱 사실 샤브롤의 황금기는 아주 초반에 끝났고 이후 1967년에서 1978년 사이의 시기를 2차 전성기라고 한다. 2차 전성기의 샤브롤은 한 명의 제작자와 계속 작업했다. 이때 샤브롤이 계속해서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건 그 특별한 제작 환경의 영향이 크다. 샤브롤은 ‘감독은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명세 감독님도 샤브롤의 입장에 맞는 분이라는 개인적인 느낌이 있다.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


이명세 내년까지는 꼭 새 영화를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웃음).


일시 I 3월 31일(금) 오후 7시 30분

정리 I 황선경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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