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시네바캉스 서울 - 작가를 만나다]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좌절하게 만들고 싶었다.”

- <꼬마돼지 베이브 2>, <옥자> 상영 후 봉준호 감독과의 대화


정지연(평론가) 오늘 동시 상영으로 <꼬마돼지 베이브 2>를 추천한 이유가 궁금하다.

봉준호(감독) 김성욱 프로그래머랑 ‘돼지 영화제’를 해보자고 얘기를 했다. 돼지에 관한 영화의 리스트를 쭉 늘어놓고 고민했다. 동시 상영을 염두에 두고 세 편의 영화(<P짱은 내 친구>, <레저백(Razorback)>)를 추천했고, 그중 이 영화를 틀게 됐다. <옥자>가 지난 시드니영화제 폐막작이었는데 조지 밀러 감독이 보러 오기도 했다. 식사도 함께 했었다. 오늘 이 영화 상영한다고 얘기도 드렸는데 답장은 아직 없다(웃음).

정지연 <꼬마돼지 베이브 2> 역시 도시로 간 돼지 얘기다. <옥자>를 준비할 때 영감을 준 측면이 있나?

봉준호 오늘 아주 오랜만에 다시 영화를 봤다. 처음 본 건 2000년 중반이었다. 1편도 크게 히트했지만 2편을 더 좋아한다. 이 영화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지 않았나 싶다. <옥자>에도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처연하고 어두운 정서가 깔려 있는데 <꼬마돼지 베이브 2>의 전체적인 느낌이 <옥자>에 영향을 준 것 같다. 두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는 옥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옥자도 말을 할 수 있으면 어땠을까.

정지연 옥자가 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있는지?

봉준호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근데 미자만 알아들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알 길이 없다.

정지연 아이디어의 단계에서 <옥자>는 처음에 어떻게 구체화됐는지 듣고 싶다.

봉준호 2001년도에 <플란다스의 개>가 완전히 실패하고 절망의 늪을 헤매던 시절에 ‘둔자’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산골에서 살던 애가 집 뒤에서 엄청난 산삼을 발견해서 그걸 팔러 도시에 가는 이야기였다. 산골에서만 평생 자란 애가 거래를 하러 가면 도시의 이상한 애들이 막 사기치려고 들러붙지 않겠나.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상한 모험극 구조의 시놉시스를 썼었다. 하지만 너무 재미없어 보여서 컴퓨터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2010년에 <설국열차>를 준비할 때 ‘옥자’라는 동물이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엄청 큰데 억울하게 생긴 동물. ‘슈퍼 토마토’나 ‘슈퍼 연어’처럼 품종을 개량한 생물에는 큰 게 많다. ‘벨지안 블루’라는 거대 소도 있다. 크다는 것에서 시작해 점점 식품 산업 쪽으로 생각이 뻗어나갔다. 거기에 동물을 파트너로서 둔 둔자라는 산골 소녀가 더해졌다.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옛날에 어느 산골 소녀와 관련된 사건이 있었다. 아버지와 둘이 산에 살던 분인데 지상파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고, 그걸 계기로 이동통신사 CF를 찍으면서 유명세를 탔다. 그러다 어떤 강도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지금 그분은 비구승이 된 걸로 안다. 그 사건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정지연 <설국열차> 다음 바로 <옥자>를 구상한 건가.

봉준호 2010년에 서우식, 김태환 프로듀서와 스토리라인을 고려하고 써 놓은 시놉시스가 있었다. <설국열차>를 찍으러 체코에 가야 했으니 그분들이 자료조사를 시작했고 예비 작가가 시나리오도 쓰고 그랬다.

정지연 <옥자>는 <괴물>의 연장선에서 보이는 측면이 있다. 다만 괴물은 말 그대로 괴물로 호명되고, 옥자는 일종의 식구처럼 느껴지면서 제품으로 호명된다. 감독님이 <괴물>을 염두하고 발전시킨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괴물> 때에는 한국 CG 기술도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진 건가.



봉준호 이번에는 한국과 미국 팀이 섞여 있었다. 한국이나 외국이나 10년 사이에 엄청 달라졌다. 가격은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소프트웨어는 많이 개발되면서 상향 평준화됐다. <꼬마돼지 베이브 2>를 마침 봤는데, 거기서 리드 애니메이터였던 에릭 드 보아(Erik-Jan de Boer)가 여러 경력을 쌓다가 <라이프 오브 파이>의 호랑이를 구현한다. 그분이 오스카를 받을 때 나는 <옥자>의 CG를 누가 해야 할까 고민하던 상태였다. 조금만 허술해도 스토리가 성립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들이 10분 이내로 이 캐릭터가 CG라는 걸 잊어야 했다. 그래서 드 보어를 만났다.

옥자 말고도 이 영화에는 고난이도의 그래픽을 사용해야 할 부분이 많다. 예를 들면 뉴욕 퍼레이드 장면. 실제 뉴욕 거리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화면 속의 모든 것이 CG였다. 옥자 외의 다른 CG는 모두 한국 팀과 함께했다.

정지연 소녀와 슈퍼 돼지의 아이디어가 반복된다는 느낌이 있다. 미자는 <괴물>의 현서를 닮아 보였다.

봉준호 모든 배우들은 다 고유한 세계가 있다. 둘 다 연기를 잘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는 하다. 안서현 양은 굉장히 어른스럽고 강인한 면이 있다. 어느 집안이나 만만하지 않고 말을 신중히 걸어야 할 것 같은 애들이 있지 않나. 안서현 양에게도 의도하지 않아도 나오는 카리스마가 있다.

정지연 촬영을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과 했다. 해외 거장들과 많이 작업했던 분이다. 어떻게 작업하게 됐나?

봉준호 다시 <설국열차>로 되돌아간다. 영화 편집이 다 끝나고 나면 영화의 색을 만져주는 굉장히 중요한 스탭이 있다. <설국열차>의 컬러리스트가 이반 루카스(Yvan Lucas)라는 분이었다. 프랑스 출신으로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분이었는데 그분이 한번 만나보라고 소개해줬다.

정지연 <설국열차>는 한국에서의 마지막 필름 영화이고, <옥자>는 봉준호 감독의 첫 번째 디지털 작업이다. 다리우스도 필름 작업을 많이 했던 걸로 안다. 필름이 아닌 디지털로 작업하면서 어떤 매혹이나 한계를 느꼈나?

봉준호 처음에는 35mm 필름으로 하려고 했다. 나도 촬영감독도 필름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미국에는 아직 필름 현상소가 남아 있다. 타란티노와 J.J. 에이브람스, 크리스토퍼 놀란을 비롯한 감독들이 코닥이랑 거래를 했다고 한다. 1년에 일정량의 필름을 생산해 주면 그걸 책임지고 소비하겠다는 계약. 나는 뭐 그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 디지털로 해보니까 의외로 좋더라(웃음). 선과 악을 나누듯 ‘필름은 선, 디지털은 악’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어떤 새로운 미학을 발견하느냐의 문제다.

어쨌든 필름으로 촬영하기로 했는데 영화가 투자에 난항을 겪다 결국 투자자가 넷플릭스로 결정됐다. 감독의 최종 편집권을 보장하고 모든 걸 지원해 준다더라. 그런데 회사 원칙이 디지털 4K로 찍어야 한다고 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들이 모두 지키는 원칙 같은 거다. 여러 방법을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협상도 하려 했는데,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 안 되는지 10페이지짜리 서류를 보내주더라. 그래서 그냥 디지털로 하기로 했다. 그리고 필름이 안 된다고 하니 다리우스가 ‘알렉사 65’라는 카메라 기종을 사용하고 싶다고 했다. 그 카메라는 해상도가 6.5K다. 학교에서 선생이 머리가 왜 이렇게 기냐고 하면 그 다음 날 삭발하고 오는 애들 있잖나. 다리우스가 약간 그런 기질을 갖고 있다. 그걸로 뉴욕의 어떤 실험영화 감독과 작업해 봤다고 했다. 나도 호기심이 났고, 테스트 촬영을 했다. 시네마틱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 카메라로 하게 됐다. 강원도의 자연을 찍을 때 그 위력이 잘 살아난다.

정지연 예전에 김우영 촬영감독과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카메라를 다룰 줄 아는 누구를 붙여도 잘 찍을 거라고 말하더라. 감독의 머리 안에 저런 이미지들이 있지 않으면 그런 화면이 잘 안 나온다고 말했었다.



봉준호 콘티나 프레이밍, 이동은 직접 설계하긴 하는데, 빛, 색깔, 질감 같은 건 촬영감독의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살인의 추억>도 김형구 촬영감독의 해석이 많이 들어가 있다. 송강호 씨가 논으로 돌아왔을 때, 콘티에는 없었는데, 김형구 감독이 제안했던 하이앵글이 있다. 그런 상호작용이 많이 있다.

영화에서 옥자가 300숏 정도 나오는데, VFX가 연관되는 장면은 정말 미리 설계한 대로 가야 한다. 전체 예산에서 CG 장면이 몇 컷이 나올 수 있는지 미리 계산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비싼 출연료를 가져간 건 옥자다.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옥자가 나오는 장면은 계획한 대로 갈 수밖에 없다. 현장에서 못 바꾼다. 다른 드라마의 숏들은 다리우스와도 함께 많이 얘기했고, 그때그때 변동시킬 수 있었다.

정지연 넷플릭스가 1차 윈도우이다 보니 개인 미디어의 스몰 스크린으로 상영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미장센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봉준호 사실 우리는 일부러 무시했다. 물론 이렇게 큰 예산의 영화를 감독 마음대로 찍게 해준 넷플릭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고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웃음). 하지만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 같은 걸로 보는 관객들을 좌절하게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익스트림 롱 숏으로 찍은 것들, 가령 무덤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미자는 거의 점처럼 보인다. 스마트폰으로 보면 미자가 안 보인다. 스마트폰으로 보다 포기하게 만드는 거다(웃음). 극장에서 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여기저기서 GV를 하고 있다. 편하게 집에서 볼 수 있는데 극장까지 찾아와 준 관객들에게 감사하다. <옥자>의 30만 관객들은 나에게 거의 3000만의 느낌이다.

정지연 본의 아니게 감독님이 한국의 넷플릭스 전도사가 됐다. 개인적으로 디지털 이론에 관심이 많은데, 스몰 스크린의 확산과 함께 영화의 서사 구성이나 미장센이 달라질 거라는 논의를 많이 한다. 롱 숏, 롱 테이크는 극장의 미학이라서 <옥자>에서 많이 쓰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강원도의 풍광이 바로 나오더라.


봉준호 극장 하는 분들이 위협감을 느끼는 것도 이해가 되더라. 가정용 4K 프로젝터가 나오기 시작했고, 가격대도 점점 내려가는 중이다. 먼 미래를 보면 분명 극장에 위협이 된다. 그렇지만 이건 TV가 처음 나왔을 때도 느꼈던 것이다. 극장은 나름대로 다른 카드를 내놓을 것 같다. 결국 극장과 스몰 스크린이 공존할 거라고 보는데 경쟁의 양상은 훨씬 복잡해지지 않을까.

하지만 영화를 극장에서만 상영하는 특정 기간은 있으면 좋겠다. 여전히 넷플릭스에 감사하면서 이야기하자면(웃음), 일정한 기간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가정에서는 개인이 정지 버튼을 누를 수 있다. 집에서 보면 전화를 받느라 멈출 수 있고, 배고프면 멈출 수 있다. 감독이 상영 시간 동안 장악하려고 했던 리듬을 끊기 쉽다. 감독 입장에서는 극장을 더 좋아할 수밖에 없다.

정지연 영화에서 조금 의아했던 건 미자 캐릭터다. 감독님 영화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장르적인 이야기 속에 탈장르적인 캐릭터들이 있었다. 한국적인 경험에서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들의 파워가 있었다. 근데 미자는 초인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게 의아했다.



봉준호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뻔뻔해지는지, 나는 그게 너무 사실적으로 보였다.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는 아이인데 마음이 급하면 트럭에도 올라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신 관객들이 마음의 준비는 해야겠다 싶어서 미자가 산을 막 내려오다가 미끄러지는 장면을 보여줬다. 이런 시퀀스에서 관객들에게 일단 학습을 시킨 다음, 유리창을 부수고 트럭 위로 점프를 한다(웃음). 통유리를 부수는 장면 같은 건 만화적으로 보일 수는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사실적으로 보았다. 안서현 양에게도 “너 이게 이상하니?”라고 물어보면 “아뇨”라고 대답했다. “부수는 거죠 뭐” 이런 식으로 반응해서 좋았다.

정지연 지하상가 장면에서 가장 큰 활력을 느꼈다. 감독님 영화에서 지하공간, 폐쇄공간은 상징도 많고 중요한 공간인 것 같다. 인터뷰를 보니 그중 상당수가 세트 촬영이라고 하더라. 그게 세트일 거라고 생각은 못했다..

봉준호 세트와 실제 공간이 섞여 있다. 처음 흑인 미군 병사가 놀라는 장면의 계단은 대전이다. 그 다음 상가에 들어온 뒤부터는 회현 지하상가다. 상인협회의 협조를 받아서 새벽에 이틀 밤 동안 어렵게 촬영했다. 회현 지하상가에서 옥자가 코너를 딱 돌면 배우 이정은 씨가 있다. 거기부터는 남양주 세트장이다. 회현 지하상가를 복제하다시피 만든 다음 다 때려 부쉈다. 실제 상가에서는 그렇게 파괴적인 장면을 찍을 수 없다.

정지연 후반부의 무수한 돼지들은 마치 수용소처럼 보인다. <설국열차>에서 하층 계급의 이미지도 그렇고, 수용소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봉준호 축산업이 실제로 그렇다. 한 마리의 소는 ‘동료’들이 도살장에서 계속 죽어나가는 동안 비육장에서 유전자 조작 옥수수로 만든 사료를 먹으며 6개월간 살을 찌운다. 그리고 결국 도살장으로 들어간다. 콜로라도에 있는 대형 도살장에 견학을 가서 봤는데, 차로 20분을 달려도 계속 소들이 나온다. 점점 살을 찌우면서 건물 가까이로 가는 거다. <옥자>의 그 장면도 이런 현실을 리얼하게 묘사한 거다. 대신 철조망에는 약간 아우슈비츠의 느낌을 넣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식량 생산인데, 그들의 입장에서는 홀로코스트다. 동물의 입장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묘사했다. 참고로 <설국열차>의 꼬리칸은 2차 대전 당시 가장 시설이 안 좋은 포로수용소나 난민 캠프 같은 느낌을 주려고 했다.

정지연 그동안 감독님 작품의 엔딩에는 윤리적 불안의 이미지가 보였다. 불안의 순간에서 영화가 종결되는 느낌이 강했다. 이번 영화는 롱 숏으로 밥을 먹는 장면으로 끝난다.

봉준호 항상 끝이 찜찜하다고 싫어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 비난은 평생 짊어져야 할 것 같다. 옥자도 무사히 돌아오긴 했는데 영웅의 귀환은 아니다. 그렇다고 미자가 완전히 파괴가 되어서 돌아온 것도 아니다. 나 역시 애매하고 찜찜한 부분을 느끼면서 찍었다. 다시 찾은 평화인데, 불안한 평화 같다. 새끼돼지는 나중에 추가한 거다. 원래는 마당에서만 보여주려고 했는데 에릭 드 보아가 그렇게 제안했다. 옥자와 미자는 수만 마리의 다른 옥자들을 어쩔 수 없이 내버려두고 왔다. 거기서 겨우 한 마리를 데려온 건데 화면에 같이 잡히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CG팀 입장에서는 해야 할 일이 늘어나는 건데 적극적으로 제안해 주니 정말 고마웠다.



관객 1 폴 다노와 제이크 질렌할을 활용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그간 이 배우들이 보여주지 않은 모습들이라고 생각한다. 또 서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 <괴물>과 달리 좀 비약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봉준호 폴 다노를 10여 년 전쯤 처음 만났다. <설국열차>에서 바퀴벌레 제조하시던 폴 라저(Paul Lazar)가 소개시켜 줬다. 그때 폴 다노는 무슨 이상한 인디밴드를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더라. 처음 만났을 때 한국 감독들 이름을 줄줄이 댔다. 아시아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고, 영화광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많이 맞는 역이 많다. 멍청이, 괴짜, 이상한 놈, 실패한 덕후의 느낌. 그런데 눈빛이 깊고 예쁜 느낌이 있다. 그런 게 영화에서 잘 살아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묘한 아름다움을 찍고 싶었다.

서사 전개의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했으면 더 재밌었을 수도 있는데, 결말 템포에 급급하다 보니(웃음). 어릴 때 좋아하던 영화 중 나사의 달 착륙 음모론을 다룬 <카프리콘 원>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전체적으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데 마지막에 테리 사발라스(Telly Savalas)라는 개성파 배우가 다 해결해 버리는 영화다. 그런 걸 어릴 때부터 보면서 쾌감을 느꼈다. 게다가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사람이 엄청 지쳐서 쉬운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런 것에 감상을 방해받을 수도 있다.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관객 2 뉴욕 회의실 장면에서 배경으로 쓰는 소음들이 인상적이었다.

봉준호 최태영 엔지니어가 여러 가지를 준비했다. 미자를 초청하기로 하고 틸다 스윈튼이 좋아할 때 엘리베이터 소리가 ‘띵동’하고 난다. 처음에는 뭔가 너무 만화 같고 노골적인 것 같아 싫었는데, 점점 너그러워지면서 받아들였다. 과하다고 생각해서 빼달라고 한 것도 있긴 한데 나머지는 좋은 아이디어들이라서 받아들였다. 그 장면은 공간도 미니멀하고 여백이 많다. 사운드의 디테일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상황이라 판단했다.

관객 3 인물들의 묘사나 관계가 일반적인 선악 대립 구도가 아니라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스티븐 연은 거짓 통역을 하기도 하고, ALF는 옥자의 구조를 도와주지만 옥자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한다.

봉준호 워싱턴에서 실제 ALF 멤버들을 만났다. 이들의 기본 취지는 나도 이해하지만 방법적으로 과격한 것도 사실이다. 이들은 타인의 사유재산을 파괴하기도 한다. “기본적인 취지를 지지하지만 당신들을 슈퍼히어로처럼 그릴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물론 그들을 희화화하거나 ‘괴짜’로 묘사하고 싶지도 않았다.

폴 다노가 폭력을 싫어한다면서 스티븐 연을 패는 건 모순적이지만 나름 이유는 있다. 미자가 바라지 않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입체적이라기보다는 사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뉴욕에서 미자가 옥자에게 팔이 물려 있을 때 폴 다노가 옥자를 때리려고 한다. 실제 멤버와 이야기를 했을 때 자기도 그럴 것 같다고 얘기를 하더라. ALF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지만 결국 상식의 연장선상에서 그 지점에 도달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시아에서는 동물운동이나 채식주의를 유난 떤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인간도 살기 힘들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동물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인간도 사랑할 수 있는 거라 본다.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여러 관점이 있는데 아직은 각 문화권마다 차이가 크다. ALF의 멤버들 안에서도 차이를 두고 싶었다. 실버가 토마토를 안 먹겠다고 하니까 같은 멤버들도 그를 약간 이상하게 바라본다.

실제 유전자 관련 식품업자들도 만났었다. 그분들은 인류의 식량 위기를 해결하고 싶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다. 영화에서 틸다가 소시지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괜찮은 식품이지만 대중들이 하도 유전자 조작 식품에 공포가 크기 때문에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는 대사는 그녀의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나의 입장은 옥자, 미자와 ALF의 편이지만 이 대사를 통해 미란도 쪽에도 최소한의 변명의 여지를 주려고 했다.

관객 4 엔딩크레딧에 ‘옥자 목소리’가 따로 있더라. 녹음 과정이 궁금하다.

봉준호 세 명의 이름을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다. 녹음실에서 후시 녹음한 이정은 배우, 뉴질랜드에만 있는 돼지의 소리를 보내준 사운드 디자이너인 데이브 화이트헤드. 그리고 연기와 실제 돼지 소리의 소스를 가지고 디지털적으로 최종 변경한 최태형 감독. 60%는 실제 돼지의 소리가 들어갔고, 감정이 담긴 장면은 이정은 배우가 한 게 많다.




관객 5 후반에 미자가 금돼지를 주고 옥자를 사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이 장면을 구상하게 된 상황을 자세히 듣고 싶다.

봉준호 그 신은 2015년에 완성한 초고부터 있었다. 금돼지의 출발은 할아버지인데, 할아버지는 옥자와 미자를 떼어놓고 싶어한다. 변희봉 배우 세대의 어르신들은 동물에게 정도 주지만 그 정을 끊을 때는 되게 단호하다. 이름 부르면서 키우던 개를 복날에 잡아먹기도 한다. 영화에도 할아버지가 미자 앞에서 돼지 그림을 그리고 안심, 등심, 이런 얘기를 해버리지 않나. 그리고 미자에게 옥자 대신 금돼지를 준다. 처음부터 미자는 그게 탐탁지 않아 금돼지를 던져 버린다. 하지만 이걸 언젠가 쓸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서는 나중에 따로 금돼지를 챙긴다.

관객분이 이야기한 그 거래 장면에서는 미자가 낸시의 수준에 맞춰준 것처럼 보인다. 낸시라는 인간은 대화나 설득이 불가능한 사람, 자본주의의 가장 천박한 형태가 의인화된 사람이다. 미자는 그런 사람을 상대하기가 너무 힘들었을 거다. 자존심이 있는 아이로서 미자가 낸시 수준에 맞춰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자는 비록 거래를 했지만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라는 것처럼 행동했다. 왠지 그렇게 말을 하니까 덜 찝찝하더라. 그게 미자의 이상한 성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지연 마지막으로 다음 작품이 궁금하다.

봉준호 오늘도 시나리오를 쓰다 왔다. 기생충은 안 나오고, 인간의 감정에만 충실한 영화다.


일시 8월 5일(토) 오후 3시 10분 <옥자> 상영 후

정리 황선경 관객에디터

장혜진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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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이마무라 쇼헤이 회고전 今村昌平 回顧展]


누에의 시간을 위하여 - <붉은 살의>


이마무라 쇼헤이의 <붉은 살의>는 기차와 함께 다가온다. 영화와 기차가 한 몸통이 되어 질주를 시작하는 순간이다. 기차 바퀴와 함께 돌고 도는 필름 릴, 기차 차량들처럼 같은 간격을 두고 정해진 순서대로 지나쳐가는 필름 스트립, 차창과 같은 빈 사각형 사이로 빛의 입자들을 통과시켜 스크린에 이르게 하는 프레임들… 회전하며 전진하는 기계 기술로서의 영화와 기차는 마치 서로가 서로의 동의어인 양, 서로가 서로를 찍거나 서로에게 찍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 양 그렇게 관객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온다.

쇼헤이는 바로 그 순간 화면의 뒷덜미를 잡아챈다. 그리고 엄격한 질서에 따라 신속하고 정확하게 운동하고 있는 듯했던 영화와 기차의 마디들을 찍어내 늘어놓는다. 그때 그 프리즈 프레임들이 예비하는 것은 영화와 기차보다 흐물흐물하면서도 옹골찬 누에들의 시간이다. 혹은 다르게 말하자면 그것은 성기들의 시간이고, 규범과 법도를 아랑곳하지 않는 생명과 욕망의 시간이며, 잠긴 수도꼭지에 매달린 물방울처럼 끈덕지게 흘러나오고야 마는 시간이다. 언뜻 비어 있고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프리즈 프레임들은 그 수도꼭지에서 기어이 떨어져버리고 마는 물방울과 함께 생동하는 삶을 향하여 다시 움직여나가기 시작한다.

삶 그 자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다분히 쇼헤이적인 여자 주인공이 있으니 그녀가 사다코다. 하나같이 지병으로 골골대는 이 영화 속 남자들에 비하면 그녀의 생명력은 강인하다 못해 황홀할 정도다. 강도와 육탄전을 치른 뒤 방바닥에 넓적다리를 비벼대며 신음하는 그녀, 겁탈을 당한 뒤 부들부들 떨면서도 육덕진 등판에 스스럼없이 찬물을 끼얹는 그녀, 맹렬히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들 각오로 언덕을 올라갔다가 멋지게 시늉만 하는 그녀, 죽어야 된다고, 죽을 거라고 되뇌면서도 밥그릇을 향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그녀, 자신을 기차 밖으로 밀어 떨어뜨리려는 남자에 맞서 온몸으로 버티어내는 그녀, 자신을 사랑한다며 매달리는 남자와 동반 자살할 마음으로 떠났다가 그가 정말로 죽을 지경에 이르자 혼자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오는 그녀, 그런 그녀의 강력하고 위대한 육체성 앞에서 죽음은 때때로 공허한 음성적 기표에 불과한 것이 된다. 특히 그녀가 이제는 내연남이 되어 버린 강간범과 함께 죽어버릴 생각으로 기차를 타고 떠나는 시퀀스에서 그녀는 어딜 봐도 죽으러 가는 길에 오른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폭설로 멈춘 기차에서 내려 남자를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하는 그녀의 눈빛과 걸음걸이는 오히려 새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해 보려는 사람의 그것처럼 느껴진다. 그 가능성의 쟁취에 실패한 뒤 죽음의 저편에서 삶의 이편으로 부리나케 되돌아나오는 그녀의 발걸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격동적이다. 이 영화에서 그녀의 몸짓들보다 생명의 괴력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이 영화에서 결국 승리하는 것들은 회전하고 전진하는 것들이 아니라 꿈틀거리는 것들이다. 항상 기차와 함께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외간 남자는 결코 사다코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며, 수시로 문명의 벡터를 거스르며 오로지 현재의 꿈틀거림에 충실한 그녀 앞에서 그는 그녀의 허벅지 위에 놓인 누에 꼴을 면할 수 없다. 얼마 못 가 그는 어두컴컴한 터널 아래서 혼자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 속에 죽어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외간 남자는 사다코를 시각적 대상으로 대했으며, 기차와 영화의 운동에 자신의 욕망을 실어 나를 줄 알았다. 그에 비하면 사다코 남편이 처해 있는 상황은 훨씬 심각하다. 도서관 내 승진을 대단한 일처럼 여기는 경직된 앎의 소유자인 그는 사다코는 물론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저의 문제로만 파악한다. 사다코를 바라보려고 하기보다 다스리려고 하는 그가 그녀의 욕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녀가 누구와 어쩌다 어떻게 바람이 났는지에 대해 그가 헛발질만 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욕망의 진실을 증거와 지식의 문제로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그에게 할당된 결말이란 누에 농장과 편직 교실로 탈바꿈한 본가에서 껍데기만 가부장인 채로 살아가는 일뿐이다. 그렇게 서가의 질서는 누에의 운동에 잡아먹히고 만다.

꿈틀거림의 운동이 갖는 전복적 위력은 인간 욕망에 관한 앎과 시각화에 관한 문제로까지 고스란히 이어진다. 사다코 남편의 내연녀인 도서관 사서는 그에게 사다코가 외간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고 다닌다고 고자질을 했다가 증거도 없이 모함하지 말라는 호통을 듣고는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뒤를 쫓아다니지만, 마지막 순간에 버스에 치여 죽고 만다. 그 사고에서 카메라만은 살아남아 사다코 남편의 수중에 들어가지만, 사다코가 인화된 사진 속 여자가 자신이 아니라고 끝까지 부인하자 그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 그가 시도하는 최후의 방법은 사다코가 밴 아기의 혈액을 통해 친부 검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도 아기가 유산되어 불가능해진다. 그러니까 사다코의 욕망 앞에서 인간의 눈은 물론이고 카메라와 의학이 가지고 있는 시각적 권력, 지적 권력조차도 매번 무력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인간 욕망에 관한 진실은 그런 불완전한 기계 기술로 손쉽게 포착될 수도, 증명될 수도 없는 것임을 역설이라도 하듯 영화는 사다코가 외간 남자와 함께 꿈틀거렸던 순간들의 진실을 철저히 부정해 버리거나 과감히 살해해 버린다. 심지어 그녀의 욕망이 활동하는 시간은 사다코 본인에게도 온전히 속해 있지 않다. 그녀가 하녀 신분이었을 때 주인댁 몰래 놀아났던 어떤 사내에 대한 기억처럼, 그것은 종종 기나긴 망각 속에 엉켜 있다.

사다코의 욕망에 관한 진실은 오로지 누에의 시간에 속해 있다. 몸에 눈 하나 제대로 붙어있지 않은 누에, 태어나서 죽기까지 먹고 자고 꿈틀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앎도 필요로 하지 않는 누에, 그런 누에들만이 사다코의 욕망 깊숙한 곳까지 응시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받는다. 하지만 누에들의 삶은 짧고, 사다코의 인생은 길다. 누에들은 고치를 지은 뒤 다른 존재가 되어 사라져 버릴 뿐이지만 누에들의 단편적인 시간을 이어내어 자신만의 욕망의 시간을 편직해나가는 것은 사다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화면을 가득 채워가는 사다코의 형체는 그래서 더욱 무시무시하고 거대해 보인다.


이후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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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무라 쇼헤이 회고전 今村昌平 回顧展]


산만함을 우회한 단호함 - <돼지와 군함>


<돼지와 군함>의 오프닝 숏은 너무도 명징해서 도리어 의심스럽다. 경쾌한 군대 행진곡을 배경으로 카메라가 미군 부대 성조기에서 출발해 부대 너머 공간까지 패닝한다. 한낮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부감숏으로 이어지던 흐름은 네온사인 위에서 돌연 점프컷하며 밤으로 연결된다. 첫 숏을 성조기에서 시작하는 까닭은 영화가 당대의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은유한 것임을 예고하는 걸까.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은유하기 위해 극적인 서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관계가 서사를 위해 적절히 사용된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카메라의 흐름은 영화의 주된 공간이 군 부대 근처 환락가임을 드러낼 따름이다.

<돼지와 군함>은 미군 부대 근처에서 삶을 꾸리는 이들을 담은 영화의 전형성에서 한 발 비켜나 있다. 무엇보다 미군과 일본인 사이에 일어난 사건의 비극적 강렬도에 기대지 않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의 방점이 되는 사건은 미군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일본인 간의 다툼으로 빚어지며, 미군과 일본인의 관계는 그들이 처한 상황이나 경제적인 격차를 고려할 때 비교적 평등하다. 주인공 긴타는 미군의 모자를 빼앗아 손님들을 환락업소로 꾄다. 이 때문에 단속에 걸려 미군과 업소 관계자들이 군 경찰과 경찰에게 나란히 체포된다.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미군과 일본인의 관계는 일시적 운명 공동체처럼 보인다. 하루코가 세 명의 미군과 하룻밤을 보낸 뒤 샤워 중이던 미군의 돈을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 붙잡혀 수모를 당하는 장면에서도 실제 굴욕을 맞는 이는 속옷 바람으로 하루코를 쫓아온 미군들이다. 여기에서 어느 쪽의 우월함이나 굴종을 읽어낼 여지는 없다.

그럼에도 영화에는 일본의 상황을 암시하는 듯한 장면을 곳곳에 배치한다. 이를테면 어린 소년이 ‘세계와 일본’이라는 제목의 교과서를 읽는다. 소년이 낭독한 글에 따르면 일본은 이른 시일 내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해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과거의 고루한 생각과 악습이 남은 국가다. 하루코의 마지막 선택으로 돌이켜 생각하자면 영화는 ‘고루한 생각과 악습’으로부터 절연해야 함을 지지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루한 생각과 악습’이 영화 속에서 무수한 움직임과 흐름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결국 영화의 활력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 고루함은 이중적이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실제로 주변에 존재하는 사람을 그리고 싶다는 자신의 지향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돼지와 군함>에서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하지 않는 산만함으로 표현되는 듯하다. 대조적인 것들이 분화하여 출몰하는 이 영화에서 장르적인 대조점을 그리는 것은 누아르와 멜로드라마적 요소다. 누아르와 멜로드라마를 뒤섞는 것이 특별한 것은 아니나, 이 둘 간의 힘겨루기의 결과인 비극과 희극의 정조마저 한데 뒤섞인다는 점이 영화의 특별함을 만든다. 하루코와 긴타의 멜로드라마는 긴타가 얽힌 누아르적 상황과 묘한 긴장을 이룬 채 지속된다. 긴타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누아르와 멜로는 비극으로 합치되지만, 영화는 그것이 주는 비애를 구태여 강조하지 않는다. 이는 긴타의 죽음을 대하는 하루코의 태도와 연출 방식에서 비롯된다. 구급차에 실려 멀어지는 긴타를 향한 하루코의 감정은 ‘바보야’라는 반복된 외침으로 고조된다. 그러나 슬픔은 곧이어 카메라 앞에 끼어든 거리의 놈팡이 무리에 의해 방해받는다. 하루코는 지쳐 쓰러지지 않을 만큼의 슬픔을 느낀 뒤 이내 긴타의 죽음으로부터 멀어진다.

돼지들이 도심의 골목을 가득 메운 풍경은 영화가 멜로와 누아르 대신 선택한 제 3항처럼 보인다. 돼지 떼는 액션과 리액션으로 구획된 세계를 비집고 나타난 우발적인 사건이며 따라서 실제 세계는 정확히 액션과 리액션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시각적으로 확증한다. 이 모든 소동들에도 영화를 당시의 세계 정세와 무관하지 않은 일본의 이중적 정서를 대변한 작품이라 말끔히 정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명확한 결론이란 예의 삶의 복잡한 과정을 거친 뒤에 겨우 말할 수 있는 것임을 영화는 잊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이마무라 쇼헤이가 지향하는 리얼리티의 재현 조건은 아닐까.


김소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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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시네바캉스 서울]


어느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에 대한 매혹

- <페노메나>

 

여기 눈을 뗄 수 없는 고혹적인 소녀 한 명이 있다. 길고 검은 머리칼과 살짝 홍조를 띤 하얀 피부가 대조를 이루는 그녀의 얼굴에는 또래보다 조숙한 분위기를 넘어선 초월적 아름다움이 깃들어있다. 기품 있는 미소녀 제니퍼(제니퍼 코넬리)는 <페노메나>의 도입부에서 구더기가 들끓는 시체의 머리가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전시된 다음 등장한다. 이후 차 안에 날아다니는 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는 제니퍼의 얼굴은 어느새 클로즈업으로 잡혀 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제니퍼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을 수 있다면 그건 잦은 횟수로 등장하는 제니퍼의 바스트 숏이 갖는 힘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빼어난 외모의 주인공을 탐미하는 과정에서 바스트 숏이 자주 노출되는 건 납득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페노메나>의 경우, 부패한 얼굴이나 벌레 떼의 공격, 날카로운 흉기에 찢겨나가는 얼굴들과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 번갈아 등장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 발견한 시점부터 극 중 제니퍼의 얼굴(혹은 상반신)이 여러 상황과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된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제니퍼가 처한 수난이 극한에 도달할 때 그녀를 성녀의 형상에 가깝게 연출하는 화면이 등장하곤 한다. 예를 들어, 곤충과 교감할 수 있다고 말한 제니퍼를 학생들이 조롱할 때는 카메라가 트랙인(track-in)으로 들어가고 환한 조명은 그녀의 상반신을 비춘다. 이때 창밖으로 벌레 떼가 몰려들지만 그 기세가 맹렬해질수록 후광과 함께 빛나는 소녀의 미소는 자신감 이상의 힘을 얻는다. 또한 밤에 학교를 나갔다는 이유로 뇌파 검사를 받는 제니퍼의 얼굴 역시 가시 화관을 쓴 성녀를 연상시킨다.

연쇄 살인범은 소녀들의 머리를 잘라내고 시체를 보관한다. 제니퍼를 동경하고 질시하는 범인은 제니퍼의 육체 역시 소유하고 싶어 하지만 그녀의 머리를 베어내는 데는 실패한다. 한편, 공포에 질린 소녀들의 뒤를 쫓던 카메라 역시 다른 방식으로 제니퍼를 탐미하고 소유하려 한다. 제니퍼를 성녀의 형상으로 표현하는 장면뿐 아니라, 그녀가 변호사에게 전화하거나 버스를 타고 사건 현장으로 향하는 과정에서도 제니퍼의 바스트 숏은 가장 먼저 대두하며, 결코 빠지는 경우가 없다. 이로 인해 관객은 그녀의 장밋빛 볼과 단정한 이목구비, 커다랗고 깊은 눈동자를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얻는다.

다만 제니퍼의 전신이 부각되는 예외적인 시기가 찾아오는데, 바로 그녀가 학교를 탈출해 하얀 원피스를 입고 브루크너 선생의 집으로 향할 때다(이는 <킬, 베이비... 킬!>(마리오 바바, 1966)에 등장하는 하얀 옷의 소녀를 상기시킨다). 여기서 ‘지알로’의 선구자 마리오 바바를 계승하는 아르젠토는 지알로 영화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배우를 자신의 세계 안에 위치시키는 방식에 있어 차이를 드러낸다. 바바가 <사탄의 가면>(1960)에서 바바라 스틸의 얼굴에 쇠못을 박으며, 즉 그녀의 신체를 파괴하며 자신만의 괴기의 미학을 추구하는 데 주저가 없었다면, 아르젠토는 제니퍼 코넬리의 얼굴에 흠 하나 내지 않는다. 또한 극 중 연쇄 살인범이 머리를 잘라내는 것을 통해 분노를 표출하고 쾌감을 느꼈다면, <페노메나>의 카메라는 프레임을 제니퍼의 얼굴에 고정하면서 매혹된 시선을 감추지 않는다. 아르젠토의 세계에 초대된 제니퍼는 아름다움과 괴기라는 양극단에서 아름다움의 축을 이끌면서도, 결과적으로 괴기라는 반대항이 보다 강하게 들끓도록 자극하는 존재이다.


권세미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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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시네바캉스 서울]


무자비한 매혹 - <뮤직 룸>


사트야지트 레이의 <뮤직 룸>(1958)은 음악에 사로잡힌 한 늙은 사내의 몰락을 그린 서사시이다. 이 영화를 서사시라고 칭한 것이 의아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다 무너져가는 성과 음악회가 이뤄지는 방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사시는 이 영화의 규모가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난 뒤 마음에 남는 심상을 설명하는 말에 가까운데, 그 작은 사적 공간 속에 역사와 민족, 문명이 소용돌이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분명한 근거가 아니라 빈약한 심상에 의존하는 것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 필연적인 방식처럼 여겨진다. 영화의 시작은 서사 이전, 아직 준비되지 않은 관객을 사로잡는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공중에 매달린 채 천천히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보여주는 간소한 이미지가 영화의 출발점이다. 까만 배경 속에서 오롯이 빛나는 샹들리에를 향해 카메라가 서서히 줌인하면서 샹들리에는 점점 화면에 가까워진다. 이때 시퀀스를 흐르는 음악은 이 숏에 무성영화에 가까운 흥취를 불어 넣는다. 무성영화에서 후시 녹음된 소리가 화면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부터 촉발된 것이라 착각하게 마련이듯, 움직이는 샹들리에는 마치 지금 들려오는 음악을 그 안에 담고 있는 악기 혹은 음악-기억을 담은 신묘한 물체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착각하는 순간 샹들리에는 무시무시한 힘을 얻는다. 카메라가 샹들리에를 향해 줌인한다는 기술적인 설명은 이 시퀀스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카메라는 샹들리에에 붙들린 채 끌려갈 뿐이다. 카메라 뒤에서 샹들리에를 마주하게 된 관객은 마치 우주 한가운데서 서서히 다가오는 미지의 물체를 마주했을 때만큼이나 무력하게 샹들리에 이미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샹들리에의 화려한 이미지와 맞붙는 숏은 성의 꼭대기 테라스에 임시로 마련된 의자 위에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늙은 남자 로이의 얼굴 클로즈업이다. 그의 얼굴은 살아 움직이며 관객을 희롱하는 샹들리에와는 대조적으로 무료하게 죽음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샹들리에만큼이나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불가해한 얼굴로 거기 있다. 샹들리에와 로이의 얼굴은 영화가 보여주는 대조적인 두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샹들리에가 기억하고 예언하는 힘이라면, 사내의 얼굴은 망각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웃의 신흥 부호 마힘의 아들 입회식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는 다시금 그를 사로잡고 잊힌 기억과 대면하게 만든다.

이후 영화가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로이의 과거는 우아하고도 처절한 몰락의 서사다. 로이의 뮤직 룸에서 열린 음악회는 그의 재산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아내와 아들을 죽게 만든다. 그런데도 음악은 지칠 줄 모르는 포식자처럼 그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죽음으로 내달리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음악은 남자의 삶을 서서히 좀먹는 악령인가. 하지만 관객은 음악의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결코 설 수 없다. 음악은 서사를 넘어 관객을 매혹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제외하고 극 중 로이가 반응하는 유일한 소리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마힘의 집에서 들려오는 개발의 소리다. 그런데 로이가 모든 것을 쏟아부은 마지막 음악회 도중 무희의 몰아치는 움직임에서 촉발된(혹은 움직임과 꼭 맞춰 들리는) 악기의 반복된 소리는 어쩐지 개발의 소리와 겹친다. 이는 마지막까지 음악이 로이의 편이 아님을 씁쓸히 인정하게 한다. 그러나 로이는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은 채 그것이 자신을 위한 음악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의 무지함은 결코 그를 비난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다.

로이의 몰락은 비스콘티의 <레오파드>(루키노 비스콘티, 1963)에서 버트 랭커스터의 육신 위에 새겨진 애잔하면서도 매혹적인 쇠락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런데 <레오파드>에서 음악은 주인공의 편에서 몰락의 정조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사용됐다면, <뮤직 룸>에서 음악은 주인공의 몰락과는 관계없이 그를 비웃으면서 샹들리에와 함께 다음 삶을 영위한다. 이는 선악과는 무관한 음악의 본성이다. 그것은 일종의 무심함인데 다름 아닌 그것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관한 무심함이다. 이 영화가 무시무시하도록 아름다운 이유도 거기 있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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