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백 주년 기념 로버트 알드리치 특별전]




“알드리치의 영화에서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 <북극의 제왕> 상영 후 이용철 평론가 시네토크




김보년(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오늘 시네토크의 제목은 “할리우드: 고전기와 뉴웨이브 사이 어디쯤”이다. 알드리치의 공식 데뷔가 1950년대 초반이고, 1981년에 유작을 찍었다. 할리우드의 1950년대는 약간 애매한 시기인 것 같다. 흔히 1930~40년대 할리우드를 두고 ‘고전기’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1950년대는 전쟁도 겪은 후이고, 30~40년대에는 활동하지 않았던 감독들도 등장한 후라서 ‘고전기’라고 칭하기는 어렵다. 시대적 매핑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다.


이용철(영화평론가)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은 1918년에 태어났고, 1950년대에 데뷔했다. 아마 감독 중 가장 유명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일 것이다. 로드아일랜드에서 은행업과 출판업을 하던 집안에서 태어났고, 외가에는 록펠러가 있었고, 한 다리 건너면 부통령이 나오기도 하는 - 한 마디로 큰 권력과 재력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알드리치는 1940년대에 결혼을 하자마자 LA로 이사했다. 이후 10년 정도 조감독을 하다 감독으로 데뷔한다.

알드리치가 데뷔 초기에 만든 작품 중 <빅 나이프>(1955)라는 작품이 있다. 그 영화에서 감독의 이름을 일곱 명 정도 나열한다. 조지 스티븐스,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 존 휴스턴 등. 그런데 그 사람들의 이름 중 존 포드나 하워드 혹스는 없다. 그때 이미 존 포드나 하워드 혹스는 황혼기에 들어선 때였다. 알드리치는 1918년생인데, 1901년부터 1910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 대부분 ‘할리우드 고전기’의 마지막에 서 있었던 거다.

그 다음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감독들이 나온다. 우선 1920~30년대에 태어난 감독들, 밥 라펠슨, 로버트 알트만 등이 있고, 그 사람들을 이어서 1940년대생, 그러니까 영화를 학교에서 공부한 세대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가 나온다. 이들은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꽃을 피운 세대였지만 동시에 끝을 내버린 감독들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 이르면 ‘반뉴웨이브 영화’들이 등장한다. <아마데우스>(밀로스 포만, 1984), <간디>(리처드 아텐보로, 1982), <애정의 조건>(제임스 브룩스, 1983), <보통 사람들>(로버트 레드포드, 1980) 등. 그리고 알드리치는 고전기와 뉴아메칸 시네마 사이에 위치한다. 스튜디오는 막을 내리던 시기였고, 사뮤엘 퓰러나 니콜라스 레이 등의 감독이 당시에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세 감독이 두 시기 사이의 다리를 놓아준 거라고 볼 수 있다.

알드리치는 스타일보다 인물을 중요하게 봐야 하는 감독이다. 알드리치 영화에는 고전기엔 상상도 못 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1962)에 나오는 사이코패스 같은 인물을 포함해 고전기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어택>(1956)은 전쟁영화인데, 보통의 ‘고전’ 전쟁영화라면 나쁜 놈은 독일군, 착한 영웅은 미국인으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게 아니다. 겁 많고 용기 없는 대위가 주인공으로 나와 병사들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고 결국 일을 그르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어택”이지만, 내용은 “어떻게 소위가 대위를 죽이게 되었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전쟁영화는 그 전에 나오지 못했다.

조안 크로포드가 나오는 <가을의 낙엽>(1956)은 로맨틱한 영화인 것처럼 시작하는데, 사랑을 고백한 남자가 알고 보면 사이코패스다. 이렇게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이 등장하는 알드리치 영화의 경향은 마지막까지 지속된다. <미합중국 최후의 날>(1977)이라는 후기 작품을 보면 놀랍게도 보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통령을 공개 처형하는 내용까지 나온다.

알드리치의 영화가 스타일 측면에서 엄청난 매력은 없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의 등장인물들은 이후 할리우드 영화에 큰 영향을 준다. <조지 수녀의 살해>(1968)에서는 레즈비언 클럽의 모습을 아주 긴 롱테이크로 보여주고. 레즈비언 섹스를 그대로 화면에 보여주기도 했다. 당시에는 아주 충격적인 시도였다. ‘정상’이 아닌 인물들을 일관되게 등장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알드리치가 현대 영화에 끼친 영향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김보년 그렇다면 뉴아메리칸 시네마를 어떤 개념으로 봐야할까. 뉴아메리칸 시네마는 ‘고전 할리우드’ 만큼이나 정의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이용철 영화에 있어뉴웨이브’를 정의하기 난감한 나라가 영국과 미국인 것 같다. 프랑스는 확실하다. 주동자, 집중된 시기, 선언이 확실히 있다. 미국은 그나마 시발점이 된 하나의 영화, <이지 라이더>(데니스 호퍼, 1969) 때문에 선명한 부분이 있긴 하다. 1969년에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스튜디오들의 인식을 바꿔 놓았다. 그런데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폭발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다가 오히려 몰락시킨 게 바로 그 스튜디오들이다.

당시 소니가 <이지 라이더>를 배급했고, 이 영화가 흥행하며 스튜디오들은 젊은 사람들이 더 이상 늙은 영화를 안 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스튜디오들는 뉴아메리칸 시네마에 맞는 영화들을 만들어내려고 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죽여버렸다. 방법은 간단하다. 돈을 준다고 약속한 뒤 주지 않은 것이다. 피터 폰다에게 <하이어드 핸드(The Hired Hand)>(1971)라는 영화를 찍게 하고는 배급을 안 해준 경우도 있었다.

UCLA의 젊은이 중 영화를 가장 잘 찍는다고 소문난 사람들이 모여서 집도 사고 장비도 사서 만든 조에트로프(zoetrope) 스튜디오가 있었다. 이 스튜디오도 다른 스튜디오들에 의해 비슷한 이유로 해체된다. 1970년대가 지날 즈음 보수적인 시대가 오면서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시대는 진다. <대부>(1972)나 <스타워즈 4>(1977) 같은 영화들이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정점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묘비에 가깝다.

알드리치는 스튜디오로부터 간섭을 막는 방법을 일찍 알았다. 알드리치는 자기 회사를 세운다. 당시 감독들은 보통 스튜디오에 의해 고용되었지만, 알드리치는 회사를 세워 직접 연출과 제작을 한다. 10여 년 동안 조연출을 하면서 깨우친 걸 수도 있고, 젊은 시절 재무를 전공한 사람이기도 했다. 알드리치가 데뷔 전 꿈꾸던 직업은 프로듀서였다. 하지만 르누아르나 채플린, 조셉 로지 같은 위대한 감독들과 작업을 하면서 감독을 꿈꾸는 사람이 된다.

김보년 알드리치 감독은 1930~40년대에는 영화를 만들지 않았고, 1950년대에 영화를 만들기 시작해 1980년대까지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그런데 그의 작품들을 보면 뉴아메리칸 시네마와 교집합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용철 알드리치의 영화적 뿌리는 고전기에 있다. 뉴아메리칸 시네마에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이 사람의 뿌리는 고전기 장르물에 있다. 작가적인 스타일에 욕심이 많았던 사람도 아니다. 알드리치는 웨스턴, 누아르, 사회물 등 여러 장르를 찍었는데, 그건 사실 자신만의 스타일이 없다는 것과 같다. 그는 고전기적 장르 영화 안에 자기만의 인물들을 꽂아넣는 감독이었다.

김보년 알드리치와 같이 떠오르는 사람으로는 사뮤엘 퓰러, 샘 페킨파 등이 있다. 이런 마초들의 영화라 할 만한 작품을 만들었던 감독들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용철 알드리치의 작품들이 마초 영화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알드리치는 자기가 원해서 특정 장르의 영화만 찍은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메이저 스튜디오에게 돈을 받아서 아르바이트처럼 작품을 만들어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때 주로 함께 작업한 배우들이 버트 랭카스터, 버트 레이놀즈 같은 남성성을 대표하는 배우들이다. 알드리치가 언젠가 그런 얘기를 했다. 자기도 뮤지컬이나 멜로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데 스튜디오들이 제안한 배우들을 데리고서는 마초 영화밖에 찍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알드리치는 ‘마초 감독’으로 착각될 수 있지만, 심리적으로 무척 예민한 작품을 찍은 것도 사실이다. 알드리치 영화에 찍혀있는 마초라는 낙인은 일부는 맞지만, 일부는 오해도 있는 것 같다. <허쉬 허쉬 스윗 샬롯> 같은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인물을 만드는 데 성의 구분을 두지는 않았다.

김보년 오늘 함께 본 <북극의 제왕>은 보기 전부터 악명을 너무 많이 들어서 굉장히 ‘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영화의 결론이 안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르신들이 젊은 세대를 향해 보내는 응원, 또는 충고의 영화 같았다.


이용철 알드리치의 영화 중 특히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들은 관객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크게 주는 편이다. <허쉬허쉬 스윗 샬롯>(1964),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조지 수녀의 살해> 같은 영화들은 좀 공포스럽다. 하지만 다른 영화들은 그렇게 무서운 편은 아니다.

<북극의 제왕>에는 탄생 비화가 있다. 알드리치의 초기 대표작 중 <더티 더즌>(19670이 있다. 흥행에 크게 성공했고 관객들이 알드리치의 이름을 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폭스는 <더티 더즌>의 주인공이었던 리 마빈과 알드리치의 만남을 다시 한 번 성사시키려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북극의 제왕>이다. 사실 <북극의 제왕>을 몇 년 동안 준비했던 건 샘 페킨파다. 페킨파가 원래 이 영화를 파라마운트와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폭스가 뺏어온 거다. 샘 페킨파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못 만들어서 짜증나긴 하지만 나도 알드리치의 팬이니 알드리치 정도면 괜찮다고. 개인적으로 알드리치가 만들었기 때문에 훨씬 고전적인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참고로 <북극의 제왕>은 흥행에는 실패했다).

알드리치 영화 중 흥행에 성공한 작품으로는 <롱기스트 야드>(1974)가 있다. 이 영화에서 알드리치는 시스템을 조롱한다. 당시 기준으로 ‘정상’을 벗어난 사람들을 모아 목표에 성공하는 이야기다. 그렇게 권력층과 시스템을 조롱하는 거다.

아웃사이더에 관한 이야기로 오늘 시간을 끝내면 좋겠다. 알드리치는 권력가의 아들로 태어나 양쪽을 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권력층 중 얼마나 한심하고 야비한 사람이 많은지도 봤고, 할리우드에서 10여 년 동안 밑바닥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걸 자기 작품에 투영하지 않았을까. 알드리치는 아웃사이더 주인공을 통해 투쟁과 승리, 이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알드리치 영화의 반 이상에서 주인공들이 죽는다. 이 사람의 영화에서는 죽음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 아웃사이더의 투쟁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주인공들을 죽였을까? 알드리치는 아웃사이더가 소중하다는 걸 알지만 동시에 이들이 사회적 합의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즉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알드리치의 영화에서 죽음은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루저의 훌륭한 죽음은 평범한 사람들의 승리보다 더 값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투쟁 끝에 명예롭게 죽는 건 시시한 승리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알드리치의 마지막 작품인 <캘리포니아 돌스>(1981)의 원제는 “…All The Marbles”다. ‘운명’, 또는 ‘하늘에 맡긴다’는 이 말의 뜻이 알드리치 영화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기고 죽는 건 하늘만이 안다, 죽든 살든 싸워 보자. 그게 이 영화의 주제다. 일견 바보스러워 보이는 여성들이 처절하게 싸운다. 그리고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나는 내 삶에서 투쟁하겠다는 것이 알드리치의 영화의 일관된 주제다. 그걸 알고 보면 <캘리포니아 돌스>가 코미디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울게 되는 영화다. 이 일관된 주제를 떠올리면서 알드리치의 영화를 한 편씩 보면 좋을 것 같다.

이번에 <북극의 제왕>을 포함해 알드리치의 영화를 여러 편 다시 봤다. 마초 감독이라는 단순한 인식은 오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관점에서 알드리치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일시 7월 1일(일) 오후 4시 <북극의 제왕> 상영 후

정리 황선경 자원활동가

사진 여해연 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