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영화 산책 - 오즈 야스지로에서 프레드릭 와이즈먼까지]


미지의 것을 마주하는 방법

- <스테잉 버티컬>

 

알랭 기로디의 <스테잉 버티컬>에는 누군가의 시선에 비친 광경을 먼저 제시하고, 그 시선의 주인을 나중에 보여주는 숏이 종종 등장한다. 오프닝 시퀀스의 드라이빙 숏은 주인공을 화면에 등장시키지 않은 채 한동안 계속된다. 관객은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그 시선의 주인이 차창 밖의 사람들을 응시하는 시점 숏을 감당해야 한다. 시선의 주인을 명시하지 않은 채 시선 숏을 제시하는 방식은 레오가 처음으로 마리를 발견하는 장면에서 다시 등장한다. 걷는 레오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숏이 등장한 직후, 카메라는 양 떼와 양치기 개, 마리가 함께 있는 풍경을 멀리서 당겨 잡는다. 이후 망원경에서 눈을 떼는 레오의 모습이 등장하면서 시선의 주인은 후술된다. 물론 그에 앞서 레오가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숏이 등장했기에 이것이 레오의 시선이라 짐작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경제적으로 숏을 연결하는 대신 시선의 주인을 확정하기를 유예하고 있으며, 그 유예된 자리에 레오의 신체가 들어 앉는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숏의 배열로 인해 레오는 보는 자이자, 누군가에 의해 보이는 자라는 복합성을 지니게 된다.

기로디의 영화에서 시선은 보는 자의 주체성 혹은 보이는 자의 대상화라는 시선의 권력 구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보는 자의 시선은 종종 몸을 숨긴 채 쫓기는 신세로 언제든 전락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관계 대신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관계는 상호동시적인 응시다. 관객에게 있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때때로 고통스럽다. 레오가 마리의 임신 소식을 듣는 장면은 쿠르베의 회화 『세상의 기원』을 연상시키는 성기의 클로즈업 숏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숏은 곧이어 등장한 적나라한 출산 장면과 맞붙는다. 카메라는 앞서 성기를 보여주었던 것과 유사한 위치에서 출산하는 성기를 마주 본다. 영화가 성기를 보여주는 방식은 끔찍하리만치 적나라하되 선정적이진 않다. 기로디가 그려낸 인간의 탄생 장면은 가축의 출산 장면과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을 천하게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이미지를 자연에 가까운 순수한 상태로 돌려놓는 것에 가깝다.

기로디가 말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레오가 테라피스트에게 검진을 받는 장면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무줄기처럼 보이는 선을 얼굴과 몸에 부착한 채 레오는 누워있고, 테라피스트는 몸의 소리를 듣는다. 엑스레이를 통해 신체 내부를 가시화하는 것과 대조되는 치료 방식에는 영화가 풍경을 다루는 방식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 카메라는 몇 개의 드라이빙 숏과 대초원을 보여주는 원경 숏을 통해 풍경을 훑거나, 그 속에 던져진 레오가 늑대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예감에 두려워하면서도 길 위에 선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카메라의 움직임은 두려움과 매혹으로 가득 찬 풍경과 그것이 숨기고 있을 짐승의 기운을 더듬는 것처럼 보인다. 극은 대체로 레오의 시점에서 진행되기에 다른 인물의 등장은 종종 느닷없이 발생하곤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늑대는 어쩌면 이러한 기운을 응축한 대상처럼 보인다. 기적인지 비극일지 모를 두려움과 매혹 속에서 레오와 장 루이스가 늑대와 대치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필요한 것은 힘겨루기나 승패 정하기가 아니라 일단 서로를 감지하는 것이기에 응시의 순간은 좀 더 지속되어야만 한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