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를 만나다]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치유의 경험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 <황제>, <설계자> 상영 후 민병훈 감독 시네토크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오늘 상영한 <설계자>와 <황제>를 보면서 최근에 민병훈 감독의 영화가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두 편의 영화 모두 예술가들이 중심적으로 나온다. 시나리오를 쓴다던가, 무대 연출가라던가.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들과 그들이 가진 고민이 있다. 민병훈 감독의 초기 작품이 가진 활력과 비교하자면 많이 무거워졌다.

민병훈(영화감독) SF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나의 이야기, 내 주변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영화제에 초대받아서 마르세유에 가게 됐는데 간 김에 영화를 찍어야지 생각하고 급하게 시나리오를 구상해서 나온 게 <설계자>다. 그냥 내 얘기를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영화제나 전주영화제에 가는 즐거움이 전보다 많이 사라졌다. 나이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네마의 형태가 많이 사라졌기 때문인 것 같다. <황제>도 많이 무겁다. 가벼운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황제>는 김선욱 피아니스트의 연주와 나의 속내를 연결하는 과정이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인물들이 가진 우울이 있고, 현실의 많은 사람들과 나에게도 우울이 있다. 그 우울의 형태와 늪에 빠져 있는 인간들의 초상을 음악과 함께 영화의 이미지로 드러내고 싶었다. 즐거운 도전이 된 작업이다. 두려움이 있었지만 값진 경험의 시작이었고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활력소를 얻는 ‘힐링’의 경험이었다.

김성욱 영화에 남성적 멜랑콜리가 느껴지는 장면들이 있다. <설계자>의 남자가 절벽에 서 있는 모습이나 <황제>의 초반부에서 남자가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미지는 우울함과 함께 어떤 심연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그림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가 연상됐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 모두 물의 이미지가 강하다.

민병훈 물이나 불같은 소재를 이용해서 인간의 심리를 표현하는 작업은 이전에도 했었다. 그때는 살짝 건드리는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아예 전면에 두고 작업했다. 러시아에서 공부를 했던 경험이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다. 러시아의 대자연에서 보이는 심연의 세계 같은 것들이 내 정신세계와 맞닿아 있다. 이번에는 내가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지형도나 문제의식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이미지로 드러낼 수 있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지금 나아진 건 아니지만 내 작품에도 새싹의 기운이 태동하고 다른 방식의 영화가 생겨날 것 같다. 본질의 변화가 영화의 변화를 이끌 거라고 생각한다.

김성욱 두 편의 영화가 갖는 공간의 특성이 있다. 집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에서 집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개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가 없는 것 같다. <황제>에서는 “집으로 돌아가세요.”같은 말이 몇 번 언급되는데 돌아갈 집이 어딘지 의문이 든다. 피아니스트와 오케스트라가 나오는 장면이 있고 그 전에 영화관 장면도 나오는데 둘 모두 관객은 없다. 아까 말씀하셨던 어떤 변화, 관객의 공간이 점점 소멸하는 느낌이 있다. 그렇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자연의 풍경 속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 장면을 보면서 만약 음악이 있고 연주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있고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든다면 그 장소를 집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민병훈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콕 집어서 하시니 더 이상 보탤 말이 없다.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이 그렇다. 집이 있든 없든 어차피 떠돌이 인생이고 찰나의 삶인데, 많은 사람들이 부질없는 걸 뒤쫓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들 때 그런 부분을 조심해야 한다. 영화가 우상이 되거나 그 안에 빠져 허우적거리면 작품도 자멸할 거다. 자존감 있는 이야기는 영화를 만들 때 내 정신이 얼마나 곧게 서 있고 튼튼한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다른 예술가들을 바라볼 때도 그 고유의 형태를 존중하려고 한다. 김선욱 피아니스트 몰래 연주를 들으러 가기도 했었다. 관객으로 거기에 앉아 있는 행위 자체가, 혹은 그 공기의 기운 자체가 이미 100점이기 때문에 결과물에 치우칠 필요가 없다고 본다. 2년에 걸친 나의 모든 생각을 포함한 것이 이 영화가 가진 자존감이라고 생각한다. 관객들도 일종의 예술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상업성과 무관하게 그 행위가 그 자체로 소중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가 어딘지 알 필요가 없고 집도 필요 없었다. 그 안의 무국적성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김성욱 배우와의 연기 작업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내레이션과 모놀로그가 많아서 연극적으로 느껴지는데, 실제 연극은 두세 시간 동안 감정이 연결되어 가지만 이 경우엔 공간도 계속 달라지고, 시간적으로도 분절적인 작업을 했다. 배우들의 감정이나 대사의 리듬을 연결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민병훈 쉽지 않았다. 영화 작업이 길어지니 도중에 도망간 배우들도 있다(웃음). 어떤 정보 없이 공간에 데려가서 배우들에게 몸을 풀거나 생각할 시간을 준 다음 바로 시작하는 편이다. 리허설을 많이 하지도 않는다. 내가 왜 배우들을 새벽에 깨우는지, 왜 촬영을 저녁에 하는지는 나와 대화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들도 이해한다. 처음 야외에 피아노를 놓았을 때는 김선욱 피아니스트가 꽤 낯설어했다. 그러다 점점 장소의 분위기를 보고 어떤 연주를 해야 하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 생각해서 스스로 그 공간에 맞는 곡을 선곡하기도 했다. 다른 배우들도 내가 정한 큰 틀 안에서 몇 번 비슷하게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호흡이 깨지지 않았던 것 같다.

관객 1 영화 속 자연과 음악이 무척 좋았다. 다만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가 너무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다.

민병훈 연기가 부자연스럽다는 얘기를 해주는 분들이 꽤 많다. 배우의 연기 패턴의 문제라기보다는 연출자의 몫이다. 원래 자연스럽게 연기 잘하는 분들이다. 나는 이 방식으로 정제되어 나오는 걸 원했고, 하나의 그림이 되기를 바랐다.

김성욱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드라마틱한 연기와는 전체적으로 톤이 맞지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연기를 요구한 작업은 아닌 것 같다. 배우들이 서 있는 특정한 위치, 자세, 포즈가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다. 김선욱 피아니스트에 대한 자료를 조금 찾아봤다. 영화에서는 연주하는 모습과 표정만 잠깐 나오는데, 인터뷰를 보니 곡에 대한 해석이나 태도가 상당히 흥미로운 연주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병훈 내가 김선욱 피아니스트와 영화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가 가진 인간적인 묘한 매력 때문이었다. 예술가로서 자신의 삶을 잘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대화할 때에도 젊은 세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풍요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촬영하면서 단 한 번의 충돌도 없이 서로 존중하면서 작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맙단 말을 하고 싶다. 서로에게 시너지가 되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김성욱 영화가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을까에 대해 확신이 없지만 음악이나 자연은 가능한 것 같다. 15년 동안 계속 영화를 상영하고 있지만 영화가 관객에게 치유를 줄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극장에 들어와서 영화를 볼 때는 세상과 단절되기 때문에 그 경험이 관객을 다른 세계로 이끌어 여행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고민하던 자리에서 떠나면 고민을 조금 덜 하게 되듯이. <황제>는 음악이 훨씬 우위에 있는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민병훈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같이 나는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 비관적인 사람이다. 영화의 인물들이 사실 다 자살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런 걸 피하지 않고 얘기하고 싶었다. 영화에서 비겁하게 가고 싶지 않았다. 이 작품이 불편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에게 나름 해소의 역할을 하면 그게 치유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상태에선 최선을 다했다고 본다.

관객 2 김선욱 피아니스트와 함께 작업을 시작한 구체적인 과정이 궁금하다.

민병훈 김선욱 피아니스트의 연주회를 다녀오고 그 다음 주에 바로 만나서 얘기했다.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처음엔 거절하더니 영화를 만들고 싶은 이유를 이야기하자 그럼 한 번 해보자고 답하더라. 음악 영화이지만 김선욱에 대한 다큐도 아니고 클래식 음악 영화도 아니다, 이 영화가 음악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아파하는 분들에게, 또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치길 바란다고 얘기했었다. 출연료도 없이 함께 작업해 줬고, 나중에는 함께하길 잘한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김성욱 앞으로 여러 기회를 통해서 <황제>가 계속 소개될 거라고 알고 있다. 혹시 기획하고 있는 다른 프로젝트가 있으면 말해 달라. 

민병훈 이 이후에 만들 작품으로 두 가지 프로젝트가 있다. 하나는 뉴욕, 파리, 베이징에서 촬영할 ‘약속’ 시리즈. 아마 약속 시리즈가 마지막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이걸 진행하는 도중 여러 영화들을 계속 찍을 예정인데 일단 ‘아티스트’ 시리즈가 이어서 나올 거다. 아티스트 시리즈는 지금 네 분을 생각하고 있는데 아직 그분들은 모른다. 섭외가 잘 되려면 일단 <황제>를 많은 분들이 보아야 한다. 


일시 12월 16일(토) 오후 2시 30분

정리 황선경 관객에디터

사진 하수정 홍보팀장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