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피에르 멜빌 회고전]


마지막 숨결, 장 피에르 멜빌



카메라는 공기를 찍을 수 없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영화는 공기를 담을 수 없다. 영화는 가장 구체적인 액션들만 찍을 수 있지 추상적인 것을 담을 순 없다. 그러나 어떤 감독은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로 주인공의 거센 기운을 표현하기도 하고, 또 어떤 감독은 총에 맞아 죽어가는 주인공의 마지막 숨결을 생생하게 잡아내는 그런 기적을 이뤄내기도 한다. 장 피에르 멜빌은 주인공이 죽어가는 순간을 냉혹하고, 잔인하게 낱낱이 기록하는 감독이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이다(이 경험은 이후 <그림자 군단>에서 정밀하게 묘사된다). 사내들이 서로 친구가 되는 일은 너무나 어렵고, 둘 이상의 사내가 모이면 반드시 배신과 배반이 일어나며, 그들이 만약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라면 필연적으로 예정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 말하는 그런 남자다. 그는 미국의 범죄영화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존 휴스톤과 안소니 만처럼 B무비 감독이 되고 싶어했지만, 프랑스 주류 영화계에서 항상 소외되었고 과소평가받았던 감독이었다. 그는 항상 동시대 ‘침묵의 작가’ 로베르 브레송과 비교되곤 했는데, 브레송이 메이저의 마이너리티라면 멜빌은 마이너의 메이저리티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나노스의 소설 <시골 사제의 일기>를 읽고 영화화하려 했지만 동시대의 라이벌 로베르 브레송이 선수를 쳐서 빼앗겼고, <암흑가의 세 사람>은 미국에서 건너 온 줄스 다신이 먼저 <리피피>란 영화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서랍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그는 10년이 지나서야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 수 있었다).

 

세심한 죽음

내가 멜빌의 영화를 처음 만난 것은 아마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태양은 가득히>와 <암흑가의 두 사람> 때문에 매혹된 알랭 들롱과, <공포의 보수>에서 반했던 이브 몽탕까지 나오는 <대결>이란 제목의 영화였다.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들이 모두 다 단호하게 코를 땅에 박고 죽는 라스트의 스산한 공기에 매혹당하고 말았다. 개봉 당시 “대결”이란 제목으로 상영된 이 영화는 <암흑가의 세 사람>으로 비디오 출시되었다(원제는 “레드 서클(The Red Circle)”이었다). 주인공 알랭 들롱과 장 마리아 블론테, 이브 몽탕, 이 세 사람은 모두 한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죽는다. 그리고 그들이 죽어가면서 남기는 몸짓과 마지막 숨결은 너무나 허무하여, 그때까지 보았던 다른 영화들 속 주인공의 죽음을 모두 가짜로 만들어 버릴 만큼 진짜 같았다. 이 영화에서 죽은 주인공들은 감독의 컷 소리를 들어도 절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당시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은 가짜의, 위선의 죽음들이 영화에서 판을 치고 있는가? <암흑가의 세 사람>에서 총에 맞은 주인공들은 검은 외투와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있고, 그들의 하얀 와이셔츠 소매 깃은 어스름한 저녁 빛과 겨울나무들을 배경으로 허공을 어이없이 크게 휘저은 채 땅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토해내는 마지막 숨결이 저럴 것이라는 설득력을 주는 마지막 숨을 토해내고는, 축축하게 젖은 겨울 풀밭 위에 코를 박고 죽어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시퍼렇게 날이 선 것 같은 초저녁 추위 속에서 마지막 입김을 토해내며 들롱이 죽어간 영화 속 공기가, 극장 안의 담배 냄새와 온갖 시시한 냄새를 걷어내 버리고 내 콧속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멜빌은 왜 그렇게 주인공들의 죽음에 대해 저토록 세심하게 그들이 토해내는 마지막 숨결까지 잡아내려고 하는 것일까? 주인공들이 죽는다는 것은 멜빌의 영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멜빌 영화의 주인공들이 지닌 숙명이다. 그의 영화에선 주인공들이 어떻게 예정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는가 하는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이를테면 <형사>는 범죄자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한 명씩 장례식을 치러주는 형사 알랭 들롱의 이야기였다. 가장 의미심장한 죽음은 범죄자들 중 가장 범죄자 같지 않던 은행원 출신 주인공의 자살 장면이었다. 형사 알랭 들롱이 범죄자의 집에 들이닥치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내는 남편이 욕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욕실 문을 연 알랭 들롱은 범죄자가 입에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 것을 보자, 재빨리 문을 닫고 기다린다. 총소리가 들리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들롱은 쓰러지는 범죄자를 아주, 아주 정중하게 잡아서 바닥에 눕힌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형사는 자살을 막았어야 한다. 그러나 들롱은 자살을 방조하고, 범죄자가 죽어 넘어지는 순간 그의 영혼을 떠받치듯 소중하게 그의 등을 부축하여 땅에 내려놓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저 이상한 사내들의 이상한 몸짓들. 그건 혹시 어떤 종류의 의식이 아닐까? 혹은, 주인공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그리하여 죽음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그토록 세심하게 묘사한 감독이 또 어디 있을까? 뭔가를 하기 위해 옷을 차려입는 사내들의 모습이 멜빌의 영화에서는 너무나 중요한 장면이다. <형사>의 기차 속 강탈 신에서 주인공이 더러워진 작업복을 벗고 ‘진짜’ 작업복인 나이트가운으로 바꿔 입는 장면은 너무나 세심해서 기가 찰 뿐이다. 이제 다 갈아입었겠지 하면 범죄자는 실내화를 꺼내 갈아 신고, 이제 정말 끝났군 하면 범죄 도구인 말굽 자석을 꺼내들어 주머니에 넣는다.

 

고독한 전문가들

<암흑가의 세 사람>에 등장하는 세 명의 범죄자 들롱, 블론테, 몽탕과 한 명의 형사 브루빌은 모두 자신의 일에서는 전문가이지만, 그 외 정상적인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상에는 미숙아이다. 브루빌이 연기한 마테오 형사 역시 마찬가지다. 마테오는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서 아이들을 부르는 것처럼 다정하게 세 명의 이름을 부른다. 그가 거실의 불을 켜면 집안에는 사람이 없고, 세 마리의 고양이가 소파와 거실 바닥에 앉아 있다. 그는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고, 부엌으로 가서 고양이 먹이를 준다. 집안의 사진들로 추측건대 아내가 일찍 세상을 뜨고 자식들이 없는 쓸쓸한 사람인 것 같다. 들롱의 경우 여자에게 배신당했다. 그녀는 들롱을 배신한 옛날에는 친구였던 자와 같이 살고 있다. 블론테는 체포된 범죄자로 이송 중이었으니, 이미 가족과는 멀리 떨어진 존재이자 외톨이인 것 같다. 이브 몽탕 역시 알콜 중독자로 커다란 방안에 가구라곤 하나도 없고,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된 커다란 트렁크 두 개가 거실 벽에 입을 벌리고 옷장 대용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모두 결혼 또는 여자와의 관계에서 실패한 사람들이다. 그들, 사내들의 사랑은 절대적 평등의 세계이다. 사내들끼리 서로의 평등을 확인한 순간이 그들의 우정을 확인하고 죽으러 가는 순간이다.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내들의 관계에서 우정은 절대로 없다. 그래서 <암흑가의 세 사람>에서 들롱과 블론테가 처음 만난 순간. 그들은 서로 처음 본 남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짧은 순간, 같은 피가 흐른다는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아무런 소통 없이도 믿고 의지하며, 심지어 죽음의 순간에 동참하여 같이 죽어버린다.

그들은 전문가들이어서, 정상적인 사람들이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할 때 조용히 일을 한다. 그들이 도둑질을 하기 위해 움직이는 소리는 전혀 안 들리고,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와 바람 소리, 전깃불 소리만이 간간히 들릴 뿐이다. 그들은 범죄로 인해 얻어지는 결과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마치 위대한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만 신경을 쏟을 뿐 그 나머지 인간관계와 성공을 위한 비즈니스에는 백치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이 범죄를 저지를 때에는 너무나 경건하고, 원칙을 철통같이 지키며, 악마처럼 교활하다. 하지만 범죄에 성공한 그 다음 순간부터 그들은 모든 것에 미숙하여, 또 다른 도플갱어인 형사들(그들 역시 범인을 잡는 일에는 너무나 교활하고 경건한 예술가들이지만, 그 외의 것에는 백치 수준이다)이 파놓은 함정에 너무나 어이없게 걸려들거나 죽음을 맞는다. 말하자면 멜빌 영화의 사내들은 현대인이 아니다. 멜빌의 주인공들은 전근대적인 낭만주의자들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낙오자들이다. <암흑가의 세 사람>의 범죄 장면 클라이맥스에서, 이브 몽탕은 트라이포드와 망원경이라는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그동안 쌓아 올린 자신의 스킬과 직감을 믿은 채 단호하게 총을 들어올려 쏘아버리고 성공한다. 이처럼 시대착오적인 낭만주의자인 그들은 필연적으로 배신을 당하기 위한 존재들이고, 배신을 당하는 순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몰사를 당하고 만다. 그들은 너무나 금욕적이고 윤리적이어서 배신 앞에서는 혼란에 빠지고, 그동안 쌓아 올렸던 전문가적 냉혹함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범죄를 하는 행위 자체가 경건한 예배와도 같은 인간들인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범죄를 할 때 너무나 금욕적이고, 원칙을 지키는 것에 너무나 철저한 윤리적인 인간들이다. 범죄를 완성하고, 함정에 걸려들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그들은 너무나 순진한 패배자들이자 날지 못하는 새, 알바트로스들이다. 그래서 어둑한 저녁 무렵, 필사적으로 도망치다 두어 발의 총에 맞아 축축한 땅에 코를 처박고 마지막 숨을 토해내고 죽을 때. 그 마지막 숨결에서 나는 숭고함을 발견하고 몸을 부르르 떤다.

 

죽음을 완성하는 경건한 예배

사실 그런 것 아닌가? 어떤 일에는 너무나 강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누군가가 어느 순간 틈새를 열어 추락한 알바트로스처럼 비웃음과 조롱을 당할 때, 그에게 매혹당하고 마는 것 아닌가? 멜빌 영화에서 사내들이 행하는 의식은 마지막에는 필연적으로 당하고야 말 배신을 준비하는 경건한 예배와 기도였던 셈이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죽으며 내뱉는 마지막 숨결은 그 예배의 완성의 순간인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세심하게 기록해야 하겠는가?  



오승욱 영화감독 

*이 글은 『판타스틱』 10호(2008년 2월)에 실렸던 글입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