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린치 특별전]


‘보기’라는 행위의 미스터리 <광란의 사랑>


“나는 현실을 떠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미스터리를 좋아한다.”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 중) 이것이야말로 데이빗 린치 영화의 모든 것이다. 그는 비현실 또는 초현실과 미스터리가 불러낸 혼돈을 이성적 사고로 조목조목 따지는 데 관심이 없다. 그가 바라는 건 강렬한 이미지와 그로부터 야기되는 어떤 인상(impression)이다. 그 인상을 저마다의 영화적 경험으로 감각하면 그뿐이라는 쪽에 가깝다. <광란의 사랑> 역시도 그러하다. “신의 미스터리”라고밖에 달리 말할 길 없는 환영과 히스테릭하고 괴이하며 광적인 이미지들이 멜로드라마와 로드무비, 뮤지컬과 갱스터 장르를 품고 있는 이 영화에 자리한다.

<광란의 사랑>이 빚어내는 인상은 오프닝 타이틀이 뜰 때 이미 전달되기 시작한다. 성냥의 머리에 불이 붙는가 싶더니 불씨는 이내 광폭한 화마로 번져 나간다. 불의 발화와 그 결과로서의 전소(절멸)는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전조, 예언처럼 보인다. 이 불길과 함께 “Wild At Heart”(황량한 마음)라는 제목이 스크린에 박히면 그것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황량함 내지는 화마 이후의 황량함일 것만 같다. 불의 전이는 영화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불꽃은 또한 주인공들의 심리나 그들이 처한 상황과도 맞물린다. 곤경에 빠진 룰라(로라 던)와 세일러(니콜라스 케이지)가 물고 있던 담배 끝의 불꽃과 앞선 불꽃과의 디졸브나 담배를 피우던 주인공들이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회상할 때면 어김없이 이 불꽃이 등장한다. 과거와 현재는 그렇게 불꽃의 이미지로 연결돼 있다. 모든 게 다 타버린 지난 시간은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 안에 어른대며 접붙이기를 시도한다. 주인공의 사랑을 위협하는 결정적인 이유 역시도 이 화마의 순간과 관련돼 있음을 영화가 진행되면 알 수 있다. 심지어 불길의 한쪽에는 악마의 날갯죽지와 같은 무언가가 보인다. 사악한 기운이 어른거리는 듯하다.

사악함에 대해서라면, <광란의 사랑>이 『오즈의 마법사』에 대한 데이빗 린치 식의 인용과 해석이라는 점에서 얼마간 이유를 찾아볼 수도 있겠다. 도로시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신비한 나라인 오즈로 갔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환상의 이야기. <광란의 사랑>은 회오리바람 대신 화마가 세일러와 룰라를 ‘신비한 나라’로 데리고 갔다가 그들만의 ‘집’(사랑)으로 돌아오게 한다.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은 ‘세일러’(Sailor)는 살인으로 복역한 후 가석방이 되자마자 연인 룰라와 함께 ‘케이프 피어’에서 “미친 도시” 뉴올리언스를 거쳐 텍사스로 이동한다. 이 여정에서 그들은 과거의 비밀이 현재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과 직면해야 한다. 룰라가 외계인에 대한 망상에 빠져 있던 삼촌에 대해 말하며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가서 조언을 구하면 좋았을 걸”이라 할 때, 세일러는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답한다. 그들의 현재가 망상가의 기벽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뉘앙스다.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은 룰라가 신고 있던 빨간 구두의 양 뒤축을 격하게 맞부딪힐 때면 그건 다분히 도로시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외던 주문을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룰라의 불안증과 광적인 상태를 강렬한 이미지로 보여준 경우이기도 하다. 여기에 마녀들의 환영과 환청까지 가세한다. 이를테면 모텔에서 룰라가 세일러와 달콤한 시간을 보낸 뒤 듣게 되는 기분 나쁜 여자의 웃음소리를 떠올려 보자. 그 소리가 옆방에서 나는 소리인지, 룰라가 기억 속 누군가의 웃음을 상기한 것인지, 혹은 룰라의 엄마 마리에타(다이안 래드)의 웃음을 암시하듯 들려주는 것인지 모호하다. 웃음의 출처도 방향도 정확하게 분간되지 않는다. 불명확함과 애매함은 두려움과 혼란을 부르며 이것이야말로 수많은 고전 속에서 ‘마녀’ 하면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이미지다. 사실 실체의 불명확성에서 오는 균열과 불안은 그 자체로 데이빗 린치가 즐기는 영화의 화법이기도 하다.

마리에타는 상당히 요상한 인물이다. 그녀가 립스틱으로 얼굴 전체를 시뻘겋게 칠했을 때 그것은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는 피로 범벅된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인형처럼 보인다. 얼굴 위에 한 꺼풀이 덧씌워진 듯한 그 모습이 이물처럼 느껴져 더욱 괴기스럽다. 이어서 카메라는 그녀의 얼굴에서 서서히 내려와 코가 뾰족하니 말아 올라져 있는 그녀의 신발을 확인하듯 보여준다. ‘이것이 마녀의 신발이다’라는 투. 그녀는 산토스(룰라를 성폭행한 남자를 처음 마리에타에게 소개한 자이기도 하다.)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룰라의 아버지가 화마에 휩싸여 죽게 된 데 직접적으로 관계한다. 당시 산토스의 운전기사였던 세일러는 룰라의 아버지가 죽던 날 화마의 현장에 있었다. 세일러가 살인의 목격자는 아니라 해도 마리에타에게는 그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 즉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를 죽여야 할 이유가 된다. 세일러는 자신의 의지나 의도와는 무관하게 어떤 상황에 연루된 것이다. 이처럼 관련 없는 것들이 서로 얽혀들고 그것이 어떻게 뻗어나가는가를 지켜보는 것은 데이빗 린치의 영화에서 다른 세계와 미스터리를 결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특히나 연루의 당사자는 이 연루의 순간을 절대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연루됨의 사악함이 있다.

마리에타는 영화가 시작하고 곧바로 진행되는 세일러의 살인의 정황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거기 있긴 했지만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룰라 아버지 살해 현장에 있었던 세일러가 해야 할 말을 그대로 가져와 본인의 것인 양 써버린다. 데이빗 린치 영화에서 ‘본다’는 행위가 갖는 어떤 허점과 한계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사태나 상황의 극히 일부분뿐일지도 모른다. 정작 봐야 할 것은 실제로는 볼 수 없는지도 모른다. <광란의 사랑>에 아주 짧게 등장하는 ‘눈먼 자’가 ‘눈이 멀지 않은 자’에 대한 이상한 조롱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데이빗 린치의 영화를 보고 있어도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좀처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본다'는 것은 한정적이다. 같은 경우로 세일러가 클럽에서,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부르는 노래가 모두 립싱크라는 점도 그렇다. 클럽 신에서 세일러의 노래에 맞춰 들려오는 여성들의 환호 역시도 녹음된 것이다. 사랑에의 도취의 순간과 영화적 클라이맥스에 라이브가 아닌 이미 만들어진 노래가 오버랩될 때의 이상한 불일치. 이런 것들이 비현실적인 순간, 웃음이 비죽이 나오는 동화적이자 환상적인 순간으로 만들어진다. 보는 것과 듣는 것, 진짜와 가짜 사이의 경계조차 그렇게 무람 없이 허물어지고야 만다.


정지혜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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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