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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행운 - <도박꾼 밥>

[장 피에르 멜빌 탄생 100주년 회고전]



이상한 행운

- <도박꾼 밥>



<도박꾼 밥>(1956)을 보고 이 영화의 마지막 10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멜빌의 첫 번째 본격 범죄 영화인 이 작품은 멜빌이 이후 즐겨 선택한 테마를 잘 보여준다. 한때 잘 나갔지만 지금은 옛 영광을 추억하며 도박으로 살아가는 밥은 거액의 현금이 들어 있는 카지노의 금고털이를 기획한다. 그러나 젊고 경력 없는 부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생각이 짧은 미모의 여인은 작전을 방해한다. 게다가 그의 적도 밥의 앞을 막아서고, 오래된 ‘친구’인 경찰도 밥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이처럼 장애물이 많지만 밥은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밥은 아마 작전에 실패하고 비극을 맞을 것이다. 사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전개이며, 특히 장 피에르 멜빌의 세계에서 이런 실패는 자주 등장한다. 알다시피 멜빌의 주인공들이 비극을 맞는 건 드문 경우가 아니다. 이때 중요한 건 주인공은 자신의 마지막 운명을 모르지만 관객인 우리는 그 결말을 일찌감치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멜빌이 만드는 비극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그러나 멜빌만의 특징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멜빌은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이 걷고 있는 내리막길을 멀리서 오래도록 바라보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이 느끼는 안쓰러움도 갈수록 커져가고,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운명을 뒤늦게 알아챈 주인공이 삶의 비애를 느낄 때에는 그 슬픔이 최고조에 다다른다. 여기서 방점은 ‘뒤늦게’이다. 멜빌은 강력한 슬픔을 한순간에 터뜨리기보다는 그 슬픔을 길게 늘여서 오래도록 보여주는 걸 더 선호한다. 멜빌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유독 ‘분위기’, ‘무드’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는 주인공과 관객이 슬픔에 서서히 젖어들게 만든다.


그런데 이런 맥락에서 <도박꾼 밥>의 마지막 도박 시퀀스를 다시 떠올려보면 멜빌의 영화에서 조금 예외적인 장면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멜빌의 특징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밥은 몇 시간 뒤에 동료들과 함께 카지노의 금고를 털 계획이다. 이를 위해 밥은 미리 카지노에 도착해 분위기를 살피고, 그동안 룰렛과 카드 게임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한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운이 좋은 밥이 거액의 돈을 따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그 돈은 전부 밥이 훔칠 돈이지만, 밥은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도박에 열중한다. 영화는 이 단순한, 그러나 이상한 행위를 거의 10분 동안 특별한 대사도 없이 보여주며 관객이 삶의 아이러니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유도한다. 조금 후 많은 돈을 훔치려는 주인공이 합법적인 행위를 통해 그 돈을 먼저 가져가는 상황(밥은 이제 굳이 카지노를 털 필요도 없다!), 또는 가장 이상한 순간에 주인공을 찾아온 뒤늦은 행운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여기에는 어쩔 수 없이 약간의 비뚤어진, 또는 허탈한 웃음이 동반되며, 이는 경찰에 붙잡힌 밥의 대사에서 더 도드라진다. 그는 자신이 도박에서 딴 돈을 지키고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방금 카지노에서 받은 돈으로 비싼 변호사를 고용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감독의 짓궂음까지 느껴지는 이 상황과 대사 앞에서 관객은 마음껏 슬퍼할 수도, 그렇다고 마냥 재미있어할 수도 없다. 등장인물에 대한 깊은 감정이입을 방해하는 이와 같은 기묘한 아이러니와 유머는 멜빌의 영화에서 쉽게 만나기 힘든 순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주인공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운명의 얄궂은 개입은 멜빌의 특징적 요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깔끔하게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복잡한 요소들을 끌어안고 있는 <도박꾼 밥>의 결말은 멜빌의 범죄 영화를 감싼 비극적 분위기의 정체를 고민할 때 좋은 참조점이 될 것이다.



김보년 프로그램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