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피에르 멜빌 탄생 100주년 회고전]



시대착오적 인물들의 마지막 통찰

- <암흑가의 세 사람>


고다르는 카메라의 두 가지 용도를 거론하면서 지질학자의 영화와 맹인의 영화에 대해 언급한다. 고다르의 진단은 카메라의 재현이라는 쟁점과 관련한 것이지만 그가 말한 두 가지 원리는 영화 내부의 서사와 형식에서도 발견되곤 한다. 먼저 주인공을 둘러싼 현상을 응시하고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발생했는지 되묻는 지질학자의 영화가 있다. 이들은 사건의 인과 관계와 흔적에 새겨진 지층의 역사에 몰두하면서 카메라에 부여된 탐사의 힘을 강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태의 진원지로 시선을 돌리고 세계의 작동 원리를 가늠하며 그러한 원리를 쫓아가는 과정에 온전히 몸을 내맡기는 영화의 양식을 다른 말로는 성찰의 로드무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일찌감치 호러영화의 서사적 관습으로 자리매김한 구조이기도 하며(가령, 눈에 보이지 않는 악령과 저주의 역사를 탐색하는 영화들) 전후의 할리우드가 발전시킨 멜로와 필름 누아르에서도 목격할 수 있는 장르의 성질이다. 문제를 인식하고 성찰의 길목에 섰을 때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 통찰을 얻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필름 누아르의 인물들은 거리 한복판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다른 한편엔 맹인의 영화가 있다. ‘고다르의 자화상’으로도 알려진 <JLG/JLG>(1994)에는 눈먼 편집기사를 고용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이를 통해 고다르는 영화에 감도는 비가시성에 대해 질문한다. 대상을 보여주는 매체인 영화에도 볼 수 없는 것과 보지 않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질문에 맹인의 영화의 논제가 있다. 이 부류에 해당하는 영화의 인물들은 세계의 규칙과 마주하지 않는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거대한 흐름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고작해야 눈앞에 있는 것을 볼 뿐이거나 아예 본다는 행위마저 박탈당하곤 한다.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보는 상태로의 전환을 긍정적으로 수긍하는 서사적 기획은 이 유형에 포함되지 않는다(최근 천만 관객을 모은 <택시운전사>가 이런 예시에 해당한다). 맹인의 영화란 자신들의 삶을 이루는 세계의 구조를 직면하기 힘든 자들의 소외와 맹목을 드러내거나 보편적인 응시의 체계가 아닌 다른 방식의 ‘보기’를 모색하려는 영화다. 눈이 멀었음에도 두 손으로 편집 작업을 하는 <JLG/JLG>의 맹인 편집기사처럼 말이다.




장 피에르 멜빌의 <암흑가의 세 사람>은 후자의 구조를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 명의 범죄자와 한 명의 형사, 그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지만, 정작 그들은 자기 삶의 흐름에 무지하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제시되는 라마크리슈나의 잠언대로 “그들은 피할 수 없이 붉은 원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출소 직후 옛 동료의 돈을 훔친 코레는 뜬금없게도 당구장을 찾는다. 그가 세 개의 공을 놓고 당구를 치는 모습을 카메라는 부감 숏으로 내려다본다. 그 무심한 응시는 당구대 위에 놓인 존재들의 처지를 차갑게 암시한다. 동선은 복잡하고 치밀하지만, 출구는 없으며 도착지는 결정되어 있다. 세 범죄자의 경로도 마찬가지다. 이제 곧 코레를 따라온 추격자들이 들이닥칠 것이고, 예정된 범죄 행각과 도주와 전락이 시작될 것이다. <암흑가의 세 사람>에서 인간은 요동치고 뒤섞이는 당구공이다. 마지막 시퀀스에 이르러 최후의 거래를 치르기 위해 숲속의 별장에 도착한 코레가 실내에 배치된 당구대를 매만질 때, 그는 그 사각의 닫힌 공간에 그려진 자신의 운명을 뒤늦게 자각하면서도 파국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암흑가의 세 사람>에 사진 혹은 사진적 이미지에 대한 부정이 드리워져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탈주한 범죄자 보젤과 함께 예전에 살던 집을 찾은 코레는 액자에 담긴 옛 애인의 사진을 버린다. 그의 몸짓에는 과거의 상처와 역사에 대한 단절의 의지가 새겨져 있다. 그것은 되돌아갈 수 없는 기억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현재형의 상태이다. 코레가 문 앞에서 옛 애인과 대면하기를 회피하고, 마테이 경감의 책상에 놓인 액자 속의 여인이 누구인지 설명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이런 점에서 형사와 범죄자는 은근히 공명한다). 카메라는 오직 인물들이 수행하는 곧 사라지게 될 일회성의 감각을 주시할 뿐이다. 이러한 시선이 <암흑가의 세 사람>의 숙명적인 비극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든다.




부정과 단절의 정조로 형성되는 사진적 이미지를 대리하는 것은 영화를 연상케 하는 장치들이다. 저격수 장센은 총을 삼각대 위에 올려두고 표적을 향해 탄환을 발사(Shoot)한다. 보석상의 감시카메라는 영사기의 소음과 유사한 음향을 내면서 이들의 강탈을 기록한다. 범죄라는 일회적인 체험의 현장성과 영화 매체의 특질이 맞물리는 것이다. 영화에 대한 느슨한 은유로 작동하는 그 장치들은 또한 원형의 모습을 띠는 사물이기도 하다. 총구의 둥근 시야, 빙글빙글 돌아가는 테이프의 움직임이 이를 나타낸다. 원형의 범람은 인물들의 운명을 표상하던 당구공의 외형을 환기하며 그것이 어느새 이들을 포괄하는 환경으로 전이되었음을 보여준다. 세 범죄자가 벌이는 정교한 강도행각의 표면을 은밀히 둘러싸고 있는 것은 이러한 원의 폐쇄적 순환 운동이다.


코레와 보젤과 장센, 그들은 주어진 운명을 묵묵히 수용한다. 이것이 <암흑가의 세 사람>을 맹인의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이다. 그런데 멜빌은 맹목적 응시의 상태에서 영화를 끝맺지 않는다. <암흑가의 세 사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범죄자들의 최후가 아닌 마테이 경감의 시선과 걸음이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최종적인 거래를 치를 때 그는 맹인처럼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모든 것과 관계 맺은 자인 그는 도둑들의 추레한 말로를 지켜본 후 “모든 인간은 유죄”라는 감사관의 충고를 듣는다. 그리고는 차마 무언가를 똑바로 응시하지도, 한곳에 멈춰서지도 않은 채 천천히 걷는다. 사소하고 미약하지만, 그것은 비로소 폐쇄적으로 순환하는 세계의 원리를 확인한 자의 수직 이동이다. 맹인의 눈으로 시작한 영화의 응시가 성찰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전환의 순간이 이 마지막 장면에 담겨 있다. <암흑가의 세 사람>이 감동적이라면, 단순히 시대착오적 인물들의 삶을 영화에 되살려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인간의 시선이 어떻게 통찰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치열하게 숙고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김병규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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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