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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에르 멜빌 회고전] 또다른 레지스탕스

[탄생 100주년 장 피에르 멜빌 회고전]



또다른 레지스탕스



1947년, 장 피에르 멜빌은 파리 13구 주택가의 삼층 저택을 개조해 즈네(Jenner)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촬영소는 물론이고 두 개의 사운드 스테이지와 편집실, 의상실과 시사실, 자료와 서적, 재즈를 중심으로 한 방대한 레코드 콜렉션을 구비한, 당시로서는 감독 개인이 소유한 유일한 스튜디오였다. <바다의 침묵>(1949)을 시작으로 <도박꾼 밥>(1956)과 <맨해튼의 두 사람>(1959)을 멜빌이 독립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물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독립성을 위해서는 창조적 아이디어뿐 아니라 빌딩과 물질이 필요하다. 즈네 스튜디오에서 멜빌은 자신의 영화뿐 아니라 타 영화 제작에 스튜디오를 임대해 주었고 - 샤브롤의 초기작과 자크 베케르의 유작 <구멍>(1960)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 촬영에 들어가지 않을 때는 인근 극장에서 필름을 구해와 시사실에서 매일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고 한다. 스튜디오는 취미와 작업이 일체화된 공간으로, 제작자의 주문에 구애받을 필요 없이 자신이 찍고 싶은 작품을 고집스럽게, 장인의 수법 그대로 제작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멜빌이 스튜디오 중심의 고전적 방식만을 고수했던 작가는 아니었다. 뉴욕에서 독립적인 방식으로 제작한 <맨해튼의 두 사람>은 이미 누벨바그 영화의 미학을 선취한 작품이었다. 이 영화에는 멜빌 영화를 특징짓는 사전의 치밀한 계산도, 정교한 영상 표현도, 완성도도 부족해 보인다. 아니, 무언가가 결여돼 있다기보다 그 반대로 자유분방한 터치를 추구한 영화다. 프랑수와 트뤼포의 데뷔작이 파리에서, 동시에 존 카사베츠의 데뷔작 <그림자들>(1959)이 자유롭게 촬영되고 있던 때에 멜빌은 시네마베리테의 스타일에 B영화의 터치로 뉴욕에서 영화를 완성했다. 유엔 총회에서 프랑스 수석대표가 실종되자 그 이유를 찾기 위해 프랑스 통신사 기자와 카메라맨이 맨해튼의 밤을 떠돌아다니는 하룻밤 동안의 이야기다. 멜빌은 영화의 감독, 각본, 그리고 뉴욕의 촬영도 맡았지만 통신사 기자 역도 직접 연기했다.



맨해튼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멜빌의 눈에 드러나는 것은 과거 레지스탕스 전설과의 조우로, 여기에는 그의 과거 경력과 삶의 동력이 숨어 있다. 멜빌은 1937년에 군 복무를 했고, 1940년 덩케르크의 철수 작전 후에 프랑스군의 일원으로 영국에 건너가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 전쟁과 레지스탕스는 멜빌의 삶과 영화에서 중요했고, <맨해튼의 두 남자>는 그런 레지스탕스의 대중적 신화를 재고하는 것으로,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떠올리게 한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멜빌은 이 영화 이후로 자신을 배반하지 않으면서 대중적인 상업 영화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한다. 1967년 즈네 스튜디오가 화재로 소실되면서 이 방향은 더 분명해졌다. 시스템의 바깥에서 모든 제약 없이 법적 허가를 얻지 않고 영화적 문법을 무시하며 특유의 레지스탕스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던 작가가 이제 소수파의 영화광에만 알려진 전설로 남지 않겠다며 누벨바그와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이는 스스로 전설을 지우면서 세상의 경멸을 인내하는, 어쩌면 전보다 더 어려운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2004년의 첫 회고전에 이어 탄생 백 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장 피에르 멜빌 전작 회고전에서 암흑영화의 고독과 만나기를 기대한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암흑의 고독 - 탄생 100주년 장 피에르 멜빌 회고전"

기간│2017년 10월 25일(수) ~ 11월 12일(일)

주최│(사)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후원│영화진흥위원회, 서울시, 서울영상위원회, 주한프랑스대사관, 주한프랑스문화원, 합동영화(주)서울극장

상영작 편수│총 15편

문의│02-741-9782 / www.cinematheque.seoul.kr

관람료│일반 8,000원, 청소년/경로/단체/장애인 6,000원, 관객회원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