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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시네바캉스 서울

<려행> 상영 후 임흥순 감독과의 대화

[2017 시네바캉스 서울 - 작가를 만나다]



“영화관 밖에서도 생각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 <려행> 상영 후 임흥순 감독과의 대화

이승민(평론가) <려행>은 하나의 결로 포착할 수 없는 영화다. 이번 작품은 탈북 여성을 본격적으로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면서 기존의 영화보다 더 무대화된 방식을 취한다. 탈북 여성들과 <려행>을 만든 계기를 먼저 듣고 싶다. 그리고 이런 형식을 선택한 이유도 듣고 싶다.

임흥순(감독) APAP(Anyang Public Art Project) 라는 이름의 ‘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가 있다. <려행>은 APAP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이다. 안양시의 지원을 받기도 했기 때문에 삼성산과 안양천이라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영화에 출연한 분들이 모두 바쁜 분들이라서 여러 장소를 섭외하기 힘든 점도 있었다. 그렇게 삼성산에 출연자들을 모신 다음 산의 풍경, 나무, 바위가 주는 느낌을 담고 싶었다.

이승민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이 영화는 삼성산을 무대로 해서 탈북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목소리로 직접 듣는 작품이다. 감독님의 첫 번째 장편 영화인 <비념>을 보면 제주를 4.3 항쟁과 밀접하게 연결시켜 공간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그리고 <위로공단>에서는 구로공단이라는 공간을 다루면서 출연자들의 이야기를 일정 정도 분리시키려 했다. 그런데 이번 <려행>의 주인공인 탈북 여성들은 삼성산이라는 장소와 아무런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그렇게 그 공간에 주인공들이 있을 때 충돌이 발생하고, 그 충돌의 감각이 긴장을 준다.

임흥순 분단은 이념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나뉜 것이다. 이렇게 나뉜 걸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일단 ‘자연’이 먼저 떠올랐다.

이승민 첫 장면에서부터 드러나듯이, 많은 영화들이 스스로를 마치 ‘실제’인 것처럼 보여주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려행>은 ‘이건 무대다’라고 처음부터 이야기한다. 출연자들의 발언 역시 무대화된 발언이다. 다시 말해 무대임을 숨기지 않는다. 발언의 수행성이 도드라지는 점이 색달랐다. 그리고 임흥순 감독의 작품에는 이미지와 말이 맺는 충돌적인 관계가 있다. 출연자의 말과 카메라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갭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관객 1 영화에 출연한 분들의 섭외 과정이 궁금하다.

임흥순 ‘선정’은 아니었고, 만난 분들 중 출연하고 싶다는 분들을 중심으로 촬영했다. 카메라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게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준비 과정에서 만난 분들은 더 있었지만 영화에 출연하기 어렵다고 하신 분들이 있었다.

관객 2 영화의 제목이 ‘려행’이다.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여행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했는데,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의도가 궁금하다.

임흥순 출연자분들의 삶이 아름다운 여행이 됐으면 좋겠다는 의도가 물론 있었다. 하지만 북한과 탈북자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어두운 부분을 부각시킬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북한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 영화를 만들면서 북한을 여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알다시피 현재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은 북한을 여행할 수 없다. 이런 현실을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밝은 미래를 여행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싶었다.


관객 3 영화가 정갈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두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다. 영화의 한 장면에 노란 풍선이 나오면서 세월호를 떠올렸다는 출연자들의 대사가 나온다. 이 장면을 집어넣은 의미가 궁금하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고향을 그리워할 때 ‘어머니’를 부른다. 그런데 <려행>에 나온 분들은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그 장면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임흥순 대부분의 내 작업은 전문 배우와 함께하지 않고 ‘보통 사람’이 갖고 있는 면을 드러내려 한다. 나의 일은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즉 내가 미리 만들어놓은 자리에 배우들이 들어와서 연기하는 게 아니라, 어떤 주제를 놓고 출연자들과 함께 커뮤니케이션하며 구체적인 부분을 만들어 간다. 그러다 보니 우연적인 상황이 만들어지고, 그럴 때마다 쾌감을 느낀다. 앞으로도 그런 작업을 계속하려 한다.

노란 풍선 장면도 마찬가지다. 촬영을 준비하며 등산길 초입에 있는데 무슨 일인지 어르신들이 여러 색깔의 풍선을 불고 있었다. 그중에 노란색 풍선이 있었고, 그 풍선을 보니 저절로 세월호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사실 세월호에 대해서는 항상 얘기하고 싶지만 지금의 현실을 직접 이야기하는 건 나에겐 아직 좀 어려운 문제다. 그러다 보니 먼 과거나 역사적으로 지난 이야기를 작업해 왔었다. 그런데 그날 그렇게 노란색 풍선을 본 다음 이걸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으니 출연자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 풍선을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냐고 물어보시더라. 내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이미 읽으신 거다. 그래서 이야기를 나눈 뒤 그 장면의 연기는 모두 그분들에게 맡겼다. 내가 나의 부족한 부분 때문에 주춤할 때마다 그분들이 내 생각을 다 읽어내시기 때문에 이런 식의 작업 방법이 개인적으로는 편하다.

두 번째 질문에 답을 하자면, 그분과는 예전에도 짧은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분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좋은 기억을 많이 갖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영화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산에 가면 뭘 하고 싶냐고 물어보니 아버지께 제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더라. 그래서 바로 과일 등 제사상을 준비해서 산으로 올라갔다.

관객 4 산에 올라가는 장면에서 개미가 다른 커다란 곤충을 끌고 가는 장면 등 곤충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많다.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다.

임흥순 어려운 의미는 없다. 내가 곤충이나 동물을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끌렸다. 물론 출연자 분들이 짐을 지고 장사를 하러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은유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특정 의미를 지시하기보다는 지금 질문하신 것처럼 ‘저걸 왜 넣었지?’라고 다양하게 질문할 여지를 주고 싶다. 세상을 남과 북, 남자와 여자,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건 무리가 있다고 평소 생각하기 때문에 내 작품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인식을 마련하고 싶다.

이승민 임흥순 감독은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할 때 직접적으로, 직선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유연하게 암시하는 어법을 자주 취한다.



임흥순 이 작품에서 제일 중요한 건 인터뷰이들의 말이다. 내가 어떤 형식의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처음부터 정한 건 없었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그분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생긴다. 그때마다 장면들을 스케치해 놓고 그걸 나중에 영화로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장면들을 연결하는 건 편집실에서 한다. 처음부터 그 장면들을 미리 연결할 방법을 정해놓지 않는다. 파편적인 느낌을 주려고 했다. 기존의 서사 방식이나 앞에 나온 이야기와 맞지 않더라도 굳이 맞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관객 5 영화 중간에 촬영 중인 스탭과 출연자들을 함께 찍은 롱 숏이 등장한다.

임흥순 산에 직접 가서 찍었지만 영화를 촬영한 곳은 이미 세트라고 생각했다. 영화 현장과 현장이 아닌 것의 경계를 드러내고 싶었다.

관객 6 영화가 나에게는 좀 어렵게 느껴졌다. 특히 첫 장면의 음악이 매우 불길하고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임흥순 우리 삶 자체에 공포의 느낌이 있다고 생각한다. 탈북자들이 탈북할 때 느낀 공포도 있지만 지금의 한국 현실에도 공포를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불안정한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

영화 음악은 영화를 끌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나는 관객이 영화에 잘 몰입하게 하는 음악에는 별 관심이 없다.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잔잔하고 슬픈 분위기를 만드는 음악은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 음악을 쓰는 영화는 영화가 끝나면 거기서 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영화관을 나와서도 계속 영화와 현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음악을 썼다.

어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앙겔로풀로스의 <유랑극단>을 봤다. 그 영화의 어떤 장면들은 희극이자 비극이다. 한 장면 안에서 희극과 비극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미지는 비극적인데 음악은 희극적으로 쓰는 연출도 있는데, 그런 느낌이 풍성하게 다가왔다. 우리의 실제 삶도 희극과 비극이 공존하고 있는데, 소위 ‘상업 영화’는 특정 부분만 강조하면서 우리의 현실을 실제와 동떨어진 것으로 그린다. 그런 연출을 피하고 싶었다.


관객 7 나는 탈북민인데, 다른 감독님들은 돈벌이가 되는 걸 만들다 보니 탈북민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많이 안 나온다. 그런데 돈도 잘 못 벌 것 같은 이런 영화를 만든 이유가 궁금하다(웃음).

임흥순 예술에는 여러 역할이 있다.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부분에 더 마음이 가고 눈이 간다. 내가 살아온 환경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내 삶이 내가 계획한 대로 되는 게 아니다 보니 우연적인 요소를 영화에 많이 반영하려 한다. 이 영화를 찍은 것도, 탈북민에 관심을 가진 것도 전부 우연이었다. 김근태재단이 주최하는 전시가 있는데 거기에서 ‘평화’를 주제로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탈북민들과 만났고 이 영화에도 출연한 김복주 씨를 만났다. 그때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떤 뭉클함을 느꼈다. 그렇게 <려행>을 시작했다.

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냐는 질문도 받는다. 일단 내가 살아오면서 가족들, 어머니, 여동생, 형수님에게 받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이 많다. 그리고 작업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여성들과 더 잘 맞는다. 여성들이 더 현명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여성의 넓은 시선을 작품 안에 더 반영하고 싶어졌다.

관객 8 나도 탈북민이고, 오늘은 탈북민합창단 단원들과 같이 이 영화를 보러 왔다. 보통 다른 영화나 TV 프로그램은 탈북민들이 북한에서 겪은 고통 같은 것만 이야기한다. 그런데 감독님은 우리의 삶을 담담하게 그린 점이 좋았다. 바람이 있다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열심히 서로 이해하며 살아가는 과정도 그려주면 좋겠다. 작게는 말투에서부터 시작해 우리가 어떻게 서로 오해하고 이해하면서 살아가는지 다뤄주면 좋겠다.

이승민 임흥순 감독은 가려진 것에 주목하고, 무엇보다 잘 듣는 감독이다. 항상 들을 준비를 하고 있는 창작자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관객인 우리도 출연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여기에 임흥순 감독 영화의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려행> 이후의 계획을 듣고 싶다.

임흥순 일단 <려행>의 정식 개봉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편집이 거의 끝난 작품이 하나 있고, 새롭게 작업을 시작한 작품이 또 하나 있다.



일시 8월 12일(토) 오후 4시 <려행> 상영 후

정리 김보년 프로그램팀

사진 주민규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