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무라 쇼헤이 회고전 今村昌平 回顧展]


누에의 시간을 위하여 - <붉은 살의>


이마무라 쇼헤이의 <붉은 살의>는 기차와 함께 다가온다. 영화와 기차가 한 몸통이 되어 질주를 시작하는 순간이다. 기차 바퀴와 함께 돌고 도는 필름 릴, 기차 차량들처럼 같은 간격을 두고 정해진 순서대로 지나쳐가는 필름 스트립, 차창과 같은 빈 사각형 사이로 빛의 입자들을 통과시켜 스크린에 이르게 하는 프레임들… 회전하며 전진하는 기계 기술로서의 영화와 기차는 마치 서로가 서로의 동의어인 양, 서로가 서로를 찍거나 서로에게 찍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 양 그렇게 관객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온다.

쇼헤이는 바로 그 순간 화면의 뒷덜미를 잡아챈다. 그리고 엄격한 질서에 따라 신속하고 정확하게 운동하고 있는 듯했던 영화와 기차의 마디들을 찍어내 늘어놓는다. 그때 그 프리즈 프레임들이 예비하는 것은 영화와 기차보다 흐물흐물하면서도 옹골찬 누에들의 시간이다. 혹은 다르게 말하자면 그것은 성기들의 시간이고, 규범과 법도를 아랑곳하지 않는 생명과 욕망의 시간이며, 잠긴 수도꼭지에 매달린 물방울처럼 끈덕지게 흘러나오고야 마는 시간이다. 언뜻 비어 있고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프리즈 프레임들은 그 수도꼭지에서 기어이 떨어져버리고 마는 물방울과 함께 생동하는 삶을 향하여 다시 움직여나가기 시작한다.

삶 그 자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다분히 쇼헤이적인 여자 주인공이 있으니 그녀가 사다코다. 하나같이 지병으로 골골대는 이 영화 속 남자들에 비하면 그녀의 생명력은 강인하다 못해 황홀할 정도다. 강도와 육탄전을 치른 뒤 방바닥에 넓적다리를 비벼대며 신음하는 그녀, 겁탈을 당한 뒤 부들부들 떨면서도 육덕진 등판에 스스럼없이 찬물을 끼얹는 그녀, 맹렬히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들 각오로 언덕을 올라갔다가 멋지게 시늉만 하는 그녀, 죽어야 된다고, 죽을 거라고 되뇌면서도 밥그릇을 향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그녀, 자신을 기차 밖으로 밀어 떨어뜨리려는 남자에 맞서 온몸으로 버티어내는 그녀, 자신을 사랑한다며 매달리는 남자와 동반 자살할 마음으로 떠났다가 그가 정말로 죽을 지경에 이르자 혼자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오는 그녀, 그런 그녀의 강력하고 위대한 육체성 앞에서 죽음은 때때로 공허한 음성적 기표에 불과한 것이 된다. 특히 그녀가 이제는 내연남이 되어 버린 강간범과 함께 죽어버릴 생각으로 기차를 타고 떠나는 시퀀스에서 그녀는 어딜 봐도 죽으러 가는 길에 오른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폭설로 멈춘 기차에서 내려 남자를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하는 그녀의 눈빛과 걸음걸이는 오히려 새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해 보려는 사람의 그것처럼 느껴진다. 그 가능성의 쟁취에 실패한 뒤 죽음의 저편에서 삶의 이편으로 부리나케 되돌아나오는 그녀의 발걸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격동적이다. 이 영화에서 그녀의 몸짓들보다 생명의 괴력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이 영화에서 결국 승리하는 것들은 회전하고 전진하는 것들이 아니라 꿈틀거리는 것들이다. 항상 기차와 함께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외간 남자는 결코 사다코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며, 수시로 문명의 벡터를 거스르며 오로지 현재의 꿈틀거림에 충실한 그녀 앞에서 그는 그녀의 허벅지 위에 놓인 누에 꼴을 면할 수 없다. 얼마 못 가 그는 어두컴컴한 터널 아래서 혼자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 속에 죽어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외간 남자는 사다코를 시각적 대상으로 대했으며, 기차와 영화의 운동에 자신의 욕망을 실어 나를 줄 알았다. 그에 비하면 사다코 남편이 처해 있는 상황은 훨씬 심각하다. 도서관 내 승진을 대단한 일처럼 여기는 경직된 앎의 소유자인 그는 사다코는 물론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저의 문제로만 파악한다. 사다코를 바라보려고 하기보다 다스리려고 하는 그가 그녀의 욕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녀가 누구와 어쩌다 어떻게 바람이 났는지에 대해 그가 헛발질만 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욕망의 진실을 증거와 지식의 문제로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그에게 할당된 결말이란 누에 농장과 편직 교실로 탈바꿈한 본가에서 껍데기만 가부장인 채로 살아가는 일뿐이다. 그렇게 서가의 질서는 누에의 운동에 잡아먹히고 만다.

꿈틀거림의 운동이 갖는 전복적 위력은 인간 욕망에 관한 앎과 시각화에 관한 문제로까지 고스란히 이어진다. 사다코 남편의 내연녀인 도서관 사서는 그에게 사다코가 외간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고 다닌다고 고자질을 했다가 증거도 없이 모함하지 말라는 호통을 듣고는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뒤를 쫓아다니지만, 마지막 순간에 버스에 치여 죽고 만다. 그 사고에서 카메라만은 살아남아 사다코 남편의 수중에 들어가지만, 사다코가 인화된 사진 속 여자가 자신이 아니라고 끝까지 부인하자 그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 그가 시도하는 최후의 방법은 사다코가 밴 아기의 혈액을 통해 친부 검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도 아기가 유산되어 불가능해진다. 그러니까 사다코의 욕망 앞에서 인간의 눈은 물론이고 카메라와 의학이 가지고 있는 시각적 권력, 지적 권력조차도 매번 무력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인간 욕망에 관한 진실은 그런 불완전한 기계 기술로 손쉽게 포착될 수도, 증명될 수도 없는 것임을 역설이라도 하듯 영화는 사다코가 외간 남자와 함께 꿈틀거렸던 순간들의 진실을 철저히 부정해 버리거나 과감히 살해해 버린다. 심지어 그녀의 욕망이 활동하는 시간은 사다코 본인에게도 온전히 속해 있지 않다. 그녀가 하녀 신분이었을 때 주인댁 몰래 놀아났던 어떤 사내에 대한 기억처럼, 그것은 종종 기나긴 망각 속에 엉켜 있다.

사다코의 욕망에 관한 진실은 오로지 누에의 시간에 속해 있다. 몸에 눈 하나 제대로 붙어있지 않은 누에, 태어나서 죽기까지 먹고 자고 꿈틀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앎도 필요로 하지 않는 누에, 그런 누에들만이 사다코의 욕망 깊숙한 곳까지 응시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받는다. 하지만 누에들의 삶은 짧고, 사다코의 인생은 길다. 누에들은 고치를 지은 뒤 다른 존재가 되어 사라져 버릴 뿐이지만 누에들의 단편적인 시간을 이어내어 자신만의 욕망의 시간을 편직해나가는 것은 사다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화면을 가득 채워가는 사다코의 형체는 그래서 더욱 무시무시하고 거대해 보인다.


이후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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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