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로메르 회고전]


로메르의 산책


에릭 로메르의 25편의 극영화 중 13편의 영화가 파리를 배경으로 한다. 게다가 다큐멘터리 시리즈(신도시에 관한 다큐멘터리 등)와 6편의 단편 영화의 무대 또한 파리, 혹은 파리 근교이다. 손쉽게 우리는 로메르의 영화를 파리 산책영화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거리를 돌아다니고, 때로는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인물들이 이동한다. 카메라가 로케이션을 도입하고 인물들이 공간을 돌아다니는 것으로 사건이라 부를 법한 이야기가 벌어지고, 때론 기적 같은 우연도 발생한다. ‘도덕 이야기’의 첫 작품 <몽소 빵집의 소녀>는 일찌감치 이런 형식을 예시한다. 영화의 중심에 정확하게 몽소 거리라는 장소가 위치하고, 첫 장면부터 주인공이 이를 소개한다. ‘파리 빌리에 가로수 길의 코너 동쪽으로는 바티뇰 대로가 있다. 북쪽으로는 레비 거리와 시장 돔므 드 빌르. 카페 왼쪽으로는 다시 빌리에 가로수 길이 있고, 지하철 서쪽으로는 쿠르셀 대로가 있는데, 쭉 가면 몽소 공원과 학생들의 거주 지대였던 시티클럽을 허문 자리가 나온다. 법대에 있는 동안에는 줄곧 그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몽소 거리의 갤러리에서 일하는 실비는 항상 공원을 지나 집으로 갔다.’ 이토록 상세하게 거리를 소개하는 것은 전혀 극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결국 이 영화는 몽소 거리를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다. 이 거리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간 한 여인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다. 남자는 그녀를 찾아 거리를 돌아다니고, 배가 고파 들린 빵집에서 다른 소녀를 만나게 된다. 이제부터 고민이다. 그는 우연히 만났던 그녀와의 재회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소녀와 만남을 시도할 것인가.


산책 형식이 로메르 영화의 특징이긴 해도 그에게만 고유한 것도 아니고(고다르, 리베트, 바르다 혹은 자크 로지에의 예를 들 수 있겠다), 인물이 정작 산책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그들은 여유롭지 않고 산책보다는 자기 문제에 빠져 있으며, 주변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몽소 빵집의 소녀>에서 주인공의 여정은 사라진 실비를 찾는 목적에 충실하다. 그는 게다가 배가 고프다. <비행사의 아내>의 주인공은 산책하기에는 이미 심신이 피곤하다. 그는 밤새워 일한 탓에 꾸벅꾸벅 졸고 그 때문에 그가 제대로 보지 못한 일들로 불가해한 사건이 발생한다.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에서 파리 근교에 사는 주인공들 또한 전형적으로 틀에 박힌 여정을 반복한다. 로메르적 우연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럼에도 이들이 집에 갇혀 있기보다는 열린 공간을 돌아다니는 움직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카페와 식당, 거리의 공공 공간들에서나 예기치 않은 우연적 만남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산책이 비록 인물의 주 관심이 아니더라도 로메르의 인물들은 거리를, 도시를 돌아다녀야만 한다. 로메르가 기획한 이런 도시적 여정의 건축적 범례는 벤야민이 논했던 파사쥬와 유사해 보인다. 파사쥬란 바깥이지만, 결국 닫힌 공간이다.



그렇다고 로메르 영화 속 인물들이 파리만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다. 시대를 달리해 여정은 두 가지 중요한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 하나는 파리 바깥, 지방으로의 휴가, 이른바 바캉스의 여정이다. 60년대 후반 이래로 이런 여정이 로메르 영화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비아리츠, 칼레, 도빌, 루르, 코트 다 쥐르 등등, 무엇보다 바다, 해변이 영화의 무대로 등장한다. 다른 하나는 대체로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파리 근교의 영화들이다. 이를테면 도시와 근교를 오가는 영화들이 등장한다. 대체로 ‘희극과 격언’ 시리즈의 작품들이 그러하다. 도시를 세밀하게 포착하는 현실주의자 로메르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이런 변경의 원인에 거리의 위기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60년대 초반까지 그가 주목한 것은 인물들이 숨쉬기 위한, 완전히 살기 위한 도시에서의 움직임이다. 누벨바그 작가들이 도둑 촬영을 무릅쓰고 거리에서 촬영했던 근본적인 목표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6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파리의 거리는 정치의 열기로 뜨거워진다. 그가 파리를 떠나는 시기가 대략 1965년을 거치면서다. 1967년의 <수집가>의 해변, 1969년의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의 클레르몽-페랑, 1970년의 <클레르의 무릎>의 해변 등이 이후에 나온 작품들이다. 그렇다고 로메르의 바캉스가 거리의 정치를 피한 결과라고, 그의 보수적 태도(!)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68혁명 직후 겨울의 클레르몽-페랑에서 촬영한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은 보수적인 작품인가? 이에 대한 논란을 다루기보다는 모드가 주인공 남자에게 했던 ‘당신은 어디를 가든 마을 사람들에게 비난받는다’라는 말을 떠올리고 싶다. 그는 말하자면 클레르몽-페랑의 폭설에, 사람들의 구설수에 갇힌 존재다. 파리의 현재 시간에서 벗어나 만든 시대극 <O 후작 부인>이나 <영국 여인과 공작>에서 주목할 만한 것 또한 일상적인 공공 공간의 부재이다.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공공 공간에서 유폐된 여인들이다. <O 후작 부인>에서 상대를 알 수 없는 이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은 사람들의 구설수를 피해 집의 구석에 몰린다. 그리고 영국에서 건너온 여인은 프랑스 혁명 시 폭력과 살인이 벌어지는 위험한 거리에서 몰려 집에 거주하는데 심지어 그녀의 침실에 혁명군이 난입한다. 여기서 요점은 산책이 불가능한 그들 일상의 파괴이다.


로메르 영화에 새롭게 등장한 신도시는 역사가 깊은 편이다(바캉스의 해변과 관련해서는 ‘바캉스의 영화’라는 예전의 글로 대신하고 싶다). 로메르는 이미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TV프로를 위해 건축과 도시 계획에 관한 수많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도시의 풍경 Paysages urbains>(1963), <풍경의 변모(공업 시대) Les métamorphoses du paysage: l'ère industrielle>(1964), <셀룰로이드와 대리석 Le celluloïd et le marbre>(1966), <도시의 시멘트 La béton dans la ville>(1969), <새로운 도시 1-4 Enfance d'une ville>(1975)에 이르는 다큐멘터리 작업은 이후 <보름달이 뜨는 밤>(1984)과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의 배경으로 사용되었다.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는 파리에서 20km 정도 떨어진 신도시 세르지 퐁투아즈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희극이다. 주택만이 아니라 대학, 연구기관, 사무실이 새롭게 지어진 곳이다. 신도시 쇼핑센터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좁은 곳으로, 이곳에서 두 주인공 남녀는 하루에 일곱 번이나 우연적인 만남을 거듭해 결국 친구의 친구와 연인이 되어버린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서는 파리 북부의 신도시 마른 라 발레에 거주하면서 직장은 파리에 두고 있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렸다. 그녀는 파리를 사랑한다. 밤과 축제들. 동시에 신도시의 평온함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두 집을 갖고 있으면 정신이 이상해진다’라는 격언처럼 이동이 가져오는 곤란함을 보여준다. 공간을 드러내면서 이야기의 부재로 향했던 모던 영화와 달리 로메르는 반대로 공간의 과잉에서 이야기의 풍부함을 끌어온다. 파리 산책을 다룬 일종의 옴니버스 영화인 <파리의 랑데부>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꽤 재밌는 결론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파리지앵이라면 절대 가지 않는다는 퐁피두 근처의 카페를 우연을 핑계 삼아 가는데, 거기서 바람난 애인의 부정을 목격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깨닫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이를테면, 자기 안의 공간에서 보내는 삶의 본성상 어리석음, 혹은 불투명한 삶에 내재한 부조리한 우연 말이다. 그녀가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틀에 박힌 경로의 산책에서 벗어나 직면하는 사랑과 우연의 장난이다.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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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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