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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클로드 샤브롤 회고전

야만의 풍경- 클로드 샤브롤의 <도살자>(1969)


 

석회동굴의 오프닝 크레딧이 지나면 영화는 작은 마을의 전경을 비추며 시작된다. 어딘가 음울하고 스산한 느낌이 들던 석회동굴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마을의 모습은 조용하고 평범하다. 이어서 영화는 결혼식장으로 카메라를 옮기는데, 이곳은 처음으로 푸줏간 주인 포폴과 사립교사 교장 엘렌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다음에 진행되는 이야기를 거칠게 설명해보자면 이렇다. 포폴과 엘렌은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그러던 중 마을에 알 수 없는 살인사건이 몇 차례 일어난다. 영화의 후반부에 밝혀지지만 줄곧 포폴이 범인이 아닐까, 추측하던 관객들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다.

 

마을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는, 흔히 우리가 설정 쇼트라고 부를 법한 풍경의 장면들이 영화에는 몇 차례 등장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 영화에서 풍경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그저 앞으로 일어날 불운한 사태에 대한 조짐, 암시로써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포폴이 엘렌의 집에서 자신의 라이터를 발견하게 되는 씬 전에 보이는 풍경의 모습이 그렇다. 점점 저물어가는 노을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관객들이 무언가 불길한 조짐을 감지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의 엔딩, 포폴의 죽음 이후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엘렌이 강가에서 밤을 새운 후 아침을 맞이하는 장면에서의 풍경 장면은 무언가 다른 느낌이다. 종국에 포폴은 (자살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살해하는데, 살인자가 죽은 후 이 마을의 풍경은 어쩐 일인지 여전히 스산하다.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강가에 앉아있는 엘렌, 그녀의 뒤에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카메라는 이들과 점진적으로 멀어지며, 이른 아침의 뿌연 안개가 퍼진 마을의 풍경을 넓게 몽타주 한다. 평론가 로저 애버트는 엘런이 강가에서 밤을 새우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포폴과 엘렌의 정사 장면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의 말에 대한 동의를 차지하고, 그보다는 이 장면이 관객들에게 어떤 정서를 주는지에 먼저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 정서는 아직 사건이 끝나지 않은 것만 같은 느낌, 그리고 고립감이라고 생각된다.

 

샤브롤의 <도살자>를 범죄가 중심이 되는, 그래서 범인의 처벌로 이야기가 모두 해소되는 장르 영화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이는 마을의 풍경이 이를 단적으로 대변한다. 아직 사건이 다 끝나지 않은 것만 같은 찜찜함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엘렌의 표정, 마을 안에 고립되어 버린 느낌을 주는 컷과 줌 아웃 편집은 이 영화의 긴장감을 만들어 냈던 핵심적인 요소가 아직도 이 마을 안에 잔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살인을 영화의 핵심적 요소라고 보기에 이 영화에서 포폴이 저지르는 살인은 게다가 어떤 긴장감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형사가 수사를 진행하지만 <도살자>에서 그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그보다 <도살자>의 그로테스크함을 만들어 내는 주된 요소는 음식이다. 샤브롤은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가 수반하는 도축, 살육의 야만성을 살인, 죄와 연결한다. 감독은 사람들이 모여 결혼식을 즐기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전에 결혼식을 위해 준비된 음식을 더 먼저 보여준다. 샤브롤의 다른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물들이 음식을 먹는다는 원초적인 행위는 <도살자>에서 유난히 강조되어 나타난다. 예컨대 엘렌은 포폴 앞에서 우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체리를 먹고 있다. 샤브롤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야만성을 음식을 먹는다는 일상적인 행위에서 발견한다. 영화의 중반부에 엘렌이 아이들과 함께 석회동굴을 견학하게 되는 장면에서도 나타나듯, 야만성과 문명을 하나의 연장선 안에 놓인다.

 

포폴은 이 영화에서 끔찍한 변태적 살인마로 묘사되지 않는다. 동시에 관객이 그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동정하게 되지도 않는다. 가령, 영화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 군대에서의 복무 경험이 대사로 제시되고는 있지만 영화는 그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할 생각이 없다. 포폴이 관객들에게 어떤 인물로 제시되는지도 모호하다. 그는 범인이지만, 온전한 악인은 아니며, 동정의 대상도 아니다. 중점이 되는 것은 포폴과 일종의 계급적 차이가 뚜렷한 엘렌이 어떻게 그와 내면의 어떤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지에 있다. 포폴이 행한 죄와 그의 내면이 엘렌과 공유됨으로써, 이러한 인간의 야만성은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된다. 작은 마을의 안개 서린 풍경은 이러한 야만성이 가진 보편적 성격을 느끼게 만든다. 영화의 초반, 춤추고 있는 하객들 사이로 포폴과 엘렌을 향해 줌인했던 카메라는 이제 마을 전체를 한 컷에 담는 것으로 영화를 끝내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엘렌과 포폴의 이야기는 이 마지막에서 마을 전체로 확대되고, 엘렌은 (자기 자신도 가지고 있는) 야만성의 세계 안에 고립된다.

 

황선경 | 관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