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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러시아 혁명 100주년 특별전

[강연] '혁명과 아방가르드' - <샤갈-말레비치> 상영 후 이지연 교수 강연

[러시아 혁명 100주년 특별전: 혁명과 영화]

   

'혁명과 아방가르드' - <샤갈-말레비치>(알렉산드르 미타, 2014) 상영 후 강연





알렉산드르 미타 감독의 최근작 <샤갈-말레비치>(2014)의 제목은 흥미롭다. ‘샤갈’과 ‘말레비치’가 그 어떤 술어나 수식어, 하물며 접속사도 없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어의 줄표(-)가 가진 계사(copula)로서의 기능을 생각해 본다면 이 짧은 제목 ‘샤갈-말레비치’는 심지어 ‘샤갈은 말레비치다’로도 읽을 수 있다. 적어도 이는 알렉산드르 미타 감독이 이 영화를 단순히 ‘샤갈과 말레비치’로, 다시 말해 그들이 함께 활동하고 대립에 이르며 결국에는 샤갈이 자신의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던 전기적 사실만으로 그리기 싫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게 한다.

<샤갈-말레비치>는 러시아 제국의 변방이었던 비텝스크 출신 화가 마르크 샤갈이 프랑스에서 돌아와 고향에 머물렀던 짧은 몇 년 동안의 사건에 집중하면서 러시아 혁명과 혁명의 소용돌이 가운데 놓인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 하는 영화다. 그러나 푸르스름한 파스텔톤의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샤갈의 그림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어쩐지 핏빛 깃발이 휘날리고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과격한 러시아 혁명을 그의 삶과 연결 짓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샤갈은 혁명과 관련된 그림도, 혁명적인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근대적 회화가 유럽에 비해 늦게 발달한 러시아에서 오랫동안 민중과 함께 했던 이콘, 루복 같은 원시적 예술 형식이나 러시아 전통 문양의 장식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였던 19세기 말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심지어 그는 부르주아 예술의 정점이라 할 페테르부르크의 예술세계파가 추구한 유미주의와 데카당스 미학을 흡수했다. 그의 그림은 러시아 농촌의 풍경과 민중들의 삶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에서 혁명의 외침을 듣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그것은 고양된 영혼이 누리는 절대적 자유를 향한 꿈과 의지로 충만하다. 오히려 주변의 삶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샤갈의 시선이야말로 그가 혁명을 지지하고 혁명에 의해 변화된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도록 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말레비치의 경우는 달랐다. 그의 그림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혁명이었다. 진정한 실재를 그리기 위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낡은 현실의 모든 껍데기들을 파괴하고 해체하려 했던 그의 급진적 시도는 모든 빛을 흡수하는 절대적 암흑과도 같은 대표작 『검은 사각형』으로 수렴되었다. 절대주의라 명명된 이 검은 사각형은 분명 죽음과 온전한 파괴를 가리키지만 동시에 그 검은 표면은 보이지 않는 절대적 비-대상의 존재를 선언하고 그것이 회화적 표면 위에 현전하게 한다. 검은 사각형에 이어 나타난 흰 사각형은 이러한 절대적 대상을 향한 초월을 지시하는 사건이 된다. 그의 창작 행위는 엘 리시츠키(El Lissitzky)의 붉은 쐐기가 흰 원이 이루는 완결된 세계를 뚫고 들어가는 그 파열의 순간과도 같았다.



샤갈이 삶의 의지와 에로스의 예술가였다면 말레비치는 죽음 충동과 타나토스의 화신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다른 두 예술가를 비텝스크라는 특수한 공간에 공존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혁명이었다. 혁명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이들은 예술을 통해 각자가 꿈꾸는 혁명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들의 그림은 전혀 혁명적이지 않을 때조차 혁명에 대한, 혹은 혁명을 향한 퍼포먼스가 되었다. 세계에 대한 재현이 아닌 세계 그 자체가 되는 것, 재현 불가능한 다른 세계의 형상을 예술 텍스트 안에서만이라도 명멸하는 순간으로 계속해서 체험하게 하는 것. 이들의 예술은 소멸을 마주한 채로 끊임없이 존재를 강요하는 집요한 현재성으로 채워져 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기존의 세계상을 넘어서 새롭고 아름다운 세계를 향해 치열하게 내달린 혁명의 예술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정수는 이미 세워진 기념비를 부수고 적극적으로 폐허를 창조하는 무자비한 힘, 곧 죽음 충동에 가깝다. 완결된 혁명이란 죽음과 무에 대한 선언일 수밖에 없다. 에이젠슈타인의 <10월>에서 혁명은 군중이 치켜 든 낫과 머리가 잘려 나가는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상이 병치되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미 완성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이러한 혁명의 운명을 함께한다. 그 가운데서 폭발하는 힘과 포효하는 외침을, 변화의 순간을, 생성을 향한 비명을 그린다. 여기에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가능성과 한계가 동시에 존재한다. 두 명의 전위적 예술가인 샤갈과 말레비치의 서로 다른 삶은 그러한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혁명으로 이끌었던 예술창조를 통한 세계 창조라는 굳은 신념을, 결국 이를 져버리지 못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유토피아를 향한 꿈과 그것의 좌절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지연 교수